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꿈을 꾸었다.
오스트리아 동남부 스티리아에서는 지폐 몇 장만 있으면 귀족이 아니라도 넉넉한 1년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그 몇 푼이 없어서 1년 내내 빌빌대는 사람도 있다. 내가 그랬다. 나는 고아원의 평범한 소녀였다.
매일 원장의 눈치를 봐야 하고, 몇 안 되는 빵을 동생들에게 나눠주며, 이따금 내려오는 귀부인의 동정을 동냥처럼 받아먹는 일상이었다.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라임나무 옆 비탈길에서 있었던 그 사건으로부터였다.
보름달이 아주 밝아서 울적하고 감성적인 밤이었다. 얼핏 주워듣기로 이런 달 밝은 날에는 웨어울프가 늑대로 돌변하고, 망자가 무덤에서 기어나오며, 뱀파이어는 여인의 목을 물어뜯은 다음 신선한 피를 마신다고 했다. 나는 귀신이나 흡혈귀 따위를 믿을 만큼 어리석은 성격은 못 되었다. 그러나 보름달의 기이한 영향을 받아서일까? 그날따라 달구경을 하고 싶었다.
물론 고아원 원장은 아이들의 밤산책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점호 시간은 아홉 시였으나, 내게도 보름달의 가호가 통했는지 어땠는지 자정을 좀 넘어 시설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라임나무 아래 도착한 직후였다. 여인의 끔찍한 비명이 들려온 것은.
나는 호기심과 두려움에 휩싸여 비탈길을 내려갔고, 여인의 목을 물어뜯는 흉측한 뱀파이어를 상상했다.
그곳에 상상했던 괴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더 끔찍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 사고 현장이었다.
말과 마차와 마차의 커튼이 수렁에 빠져 마치 포도 덩굴처럼 얽혀있었고, 말은 살아남아 온 힘을 다해 발길질을 했다. 발에 채인 마부는 차체 위에서 뒹굴었는데—— 죽어 있었다. 수렁 안으로 포도주처럼 피를 뿌리며.
비명을 질렀던 여인은 누구였을까. 구멍 밖으로 머리만 삐죽 내민 채 허옇게 눈을 뜬 저 귀부인이었을까.
어느새인가 고아원 원장이 현장으로 달려왔다. 아마 여자의 비명 소리를 듣고 온 거겠지. 원장은 나를 크게 혼낸 뒤에, 마차 안에 돈 될 만한 것이 없는지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마차를 뒤졌으나 보석 따위는 찾지 못했다. 찾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대신 내 또래의 여자아이 하나를 발견했다.
그녀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심장에 벼락을 맞는 느낌이었다고 해야하나.
보름달 빛 아래 아름답게 잠든 소녀.
이 아이, 과거에 만난 적이 있어.
소녀는 아직 살아있었다. 기절만 했을 뿐, 숨도 쉬었고 심장도 뛰었다. 이 지옥 같은 사고에서 잘도 살아남았다. 나는 소녀를 업고 원장에게 데려갔다. 원장은 소녀의 인상착의를 살핀 후 귀한 집 여식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고아원에 데려가기로 했다. 그녀를 치료하면 사례금을 받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시설에 돌아온 후, 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덜컹거리는 심장은 한참동안 진정되지 않았다.
이런 꿈을 꾸었다.
어느 밤, 잠에서 깨어났더니 다락방에 나 혼자였다. 동생들은 다 어디로 갔지? 분명 문틈으로 스미는 추운 바람을 견디기 위해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잠에 들었는데.
창가에서 손수건만한 달빛이 들어와 침대보를 비추었다.
다들 나를 버리고 어디론가 가버렸구나. 무섭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여 훌쩍훌쩍 눈물이 나던 차였다. 왠 여자아이 하나가 소리소문 없이 나타나 달빛을 받고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낯선 아이가.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정말로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내 입술 위에 검지를 대지 않았다면. 소녀는 입꼬리를 활짝 들어올리고 고개를 저으며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잠자코 지시에 따랐다.
소녀가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 존재인지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 순간, 낯선 사람이 나타났다는 두려움보다도 또래와 함께라는 다행감이 더 컸다. 이 아이를 안으면 밤에 춥지 않겠지. 나는 그녀의 끌어당겨 이불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이는 키득키득 웃었다. 달빛 아래라 그런지 웃는 얼굴이 마냥 희고 예뻤다. 나는 아이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으나, 별로 따뜻하지 않았다. 서늘하고 가벼우며 좋은 향기가 나는 몸이었다. 마치 꽃 한 송이를 이불에 숨긴 것처럼.
무언가 거미 같은 것이 가슴을 간질였다. 그것은 아이의 손이었다. 단추 몇 개를 끌러버리고, 아이는 내 옷 안에서 손가락으로 장난을 쳤다.
그만 하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불현듯 쇄골 아래를 콱 찌르는 끔찍한 통증.
이번에는 정말로 소리를 질렀다. 다음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비명을 들은 원장이 다락방으로 올라와 왠 소란이냐며 짜증을 냈고, 어느새 곁에 나타난 동생들이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럼 소녀는 어디 갔을까?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그날 일은 꿈이었을까. 원장은 내가 악몽을 꾼 것이라고 했다. 동생들은 내가 길몽을 꾼 것이라고 했다. 그래, 단순히 꿈이었을 것이다. 쇄골 아래를 더듬었지만 찔린 상처는 하나도 없었기에.
그렇기에, 꿈인 줄로만 알았던 여자 아이가 현실로 나타났을 때 충격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마차 사고 현장에서 건져온 어린 소녀. 가볍고 서늘한 몸. 좋은 향이 나는 머리카락. 달빛 아래서 마냥 하얀 얼굴을 바라보려니, 여기서 입꼬리만 활짝 올라가면 틀림없이 그 예쁜 웃음이 될 거라고.
그날 이후, 나는 원장에게 매일 같이 소녀의 안부를 물었다. 만일 소녀의 상태가 괜찮으면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소녀는 꽃처럼 예쁘고 보석처럼 귀한 아가씨다. 그러나 너는 예쁘지도 귀하지도 않으니 아가씨를 만날 자격이 없다. 원장이 한 말이었다.
듣고 보니 그랬다. 모르는 여자애 한 번 만나보겠다고 어른에게 떼를 쓰는 건 전혀 나답지가 않았다. 늘 빠릿하게 눈치를 살피고, 동생들을 위해 먹을 것 하나라도 더 얻어오는 똑똑한 맏언니. 그게 나였다. 그래서 떼를 쓰는 대신, 그냥 두 다리로 직접 소녀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느덧 달은 보름에서 하현달로 이지러졌다.
점호가 끝난 밤에 몰래 다락방을 탈출했다. 고아원 원장은 모르는 모양인데, 어린애라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법은 절대 없다. 그저 창문을 넘은 후 벽돌을 디딜 때 좀 주의하면 된다. 미끄러지면 그대로 끝장이지만.
바닥에 착지한 후 라임나무를 향해 달음박질 쳤다.
나무를 통과하려 했을 때, 밑동에서 작은 손 한 쌍이 불쑥 튀어나와 멱살을 잡았다.
라임 나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나의 눈에, 미쳐 떠오르지 못 한 하현달과, 그 소녀, 소녀의 붉은 눈이 비쳤다. 꿈에서 봤던, 이제는 현실로 나타난.
라임나무 아래에 나타난 소녀가 내 몸 위로 올라탔다.
안 돼, 올라타게 두어서는 안 돼. 잡아먹힐 거야! 떨쳐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소녀의 고급스러운 드래스, 그 아래 달린 허벅지. 맨 살갗이, 내 반바지 아래 허벅지를 쓸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감촉이 좋았다. 그래서 떨쳐내지 못했다.
“벨라. 나를 만나고 싶었다면서?”
소녀가 이름을 불렀다. 내 이름을.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어?”
“잊었니? 우리 예전에 만났잖아.”
“꿈에서?”
소녀가 미소를 지었다.
“꿈에서 봤던 그 여자애가 역시 너였어?”
“벨라. 내 이름을 불러볼래?”
“난 네 이름 몰라. 그날 아무 대화도 하지 않았잖아.”
그러자 소녀는 나를 풀어주었다. 허벅지도 맨살도 내 몸에서 떨어졌다. 소녀는 일어나 천천히 걸었다. 달이 뜬 방향으로.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듯, 툭 던지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카르밀라.”
뭐라고?
“카르밀라. 그게 내 이름이야. 이번에는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어. 벨라.”
그날 이후, 소녀를 만나기가 아주 쉬워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고 싶지 않을 때도 볼 수밖에 없었다. 소녀가 먼저 찾아와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소녀에 대해 점차 알게되었다.
첫째. 소녀의 이름은 카르밀라다.
둘째. 제법 귀한 집 아가씨지만, 그날 마차 사고로 부모를 잃었다. 친척이 데리러 올 때까지 고아원에서 보살펴주기로 했다.
셋째. 성격이 더럽다.
특히 세 번째 때문에 아주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카르밀라는 쉴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는 일을 할 때도 옆에서 알짱거렸다. 이렇게 성격 더럽고 귀찮은 줄 알았으면 그날 마차 안에 버리고 나왔을 텐데.
예를 들어, 거리에서 구두를 닦고 있으면
“벨라. 너는 하루종일 일만 하네. 일하는 게 그렇게 재밌어? 그럼 내 것도 한 번 닦아봐. 여기.”
이러면서 구둣발을 쑥 내밀었다. 손님 앞이 아니었으면 구두약을 얼굴에 집어던질 뻔했다.
하루는 고아원에 돌아와 저녁을 먹는데,
“벨라. 이렇게 푸르딩딩한 야채죽이 뭐가 맛있어서 허겁지겁 먹어? 난 아까 스테이크를 먹었는데 맛이 없어서 남겼지 뭐야. 필요하면 줄까?”
원장 앞이 아니었으면 그릇을 얼굴에 집어던질 뻔했다. 카르밀라는 정말로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서 가져왔다. 나는 물론 한 입도 먹지 않았고, 동생들이 맛있다 맛있다 거리면서 싹싹 비웠다.
카르밀라는 불행한 사고를 당한 부잣집 아가씨답지 않았다. 하는 짓을 보면 누구도 그녀를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카르밀라는 너무나 당돌하고, 버르장머리 없고, 제멋대로에…… 한 마디로 싸가지가 없었다.
그러나 정말로 짜증나는 점은 따로 있었다.
어느날 카르밀라가 내 허리에 팔을 감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내 사랑하는 벗. 꿈에서 만난 나의 운명.”
그렇게 말하는 카르밀라의 몸은 그녀답지 않게 뜨거웠다.
“너는 내 안에서 달콤하게 죽겠지만, 나는 네 따뜻한 생명 속에서 황홀경을 느끼지.”
아니, 뜨거웠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른다. 가빴던 숨은 그녀가 아니라 나의 숨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름답고 기이한 카르밀라는 하루종일 무심하다가도 어느새 내 손을 다정하게 이끌며 라임나무 아래로 데려가고는 했다.
나무 아래서,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벨라. 너는 내 거야. 내 것이어야 해. 너와 나는 영원히 하나야.”
“그만 해. 또 장난 치는 거지? 우리가 이 정도 사이는 아니잖아. 키스는 연인들끼리 하는 거야.”
“왜, 우리가 하면 안 돼?”
카르밀라는 불 같은 입술로 내 얼굴에, 눈꺼풀에, 귓볼에 키스했다. 그리고 입술에 입을 맞추려 했지만—— 나는 그녀를 밀칠 수밖에 없었다.
황홀했다. 동시에 짜증났다. 카르밀라는 분명 장난을 치고 있다. 나를 골탕 먹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혐오감이 밀려왔다.
카르밀라는 순순히 물러났다. 더 이상 나를 만지지 않았다. 자기 방으로 느릿하게 걸어가면서도, 문득 뒤돌아 이렇게 말했다.
“잘자. 너랑 떨어지는 건 싫지만, 오늘은 안녕. 내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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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보고 급 꼴려가지고 급하게 써봤어용
원래 카르밀라의 화자 로라는 부잣집 아가씨지만
우리 제멜루는 고아원 애였다는 설정이 있어서 배경도 고아원으로 바꿈
사실 쓰다가 말았는데
반응이 좋다면 끝까지 마저 써오겠사와요
그나저나 우리 제멜 스킨 진짜 잘 뽑히지 않았냐 백제멜 등짝 키야아아아ㅏㅏㅏ
카르밀라가 머얌
뱀파이어 나오는 소설
놀랍게도 1880년대 소설인데 보빔이다ㅋㅋㅋㅋㅋ
오오 이런 귀한 보배로운 제발 마저 써주어어어어
맛있다 맛있어 진미야
개추
아니 미친 진짜 개미쳤다 ㅋㅋㅋㅋㅋㅋ 딱 상상하던 발렌티나.ver카르밀라 그 자체야.... 너무 기쁘네, 한줄 한줄 아끼면서 읽었어 진짜 최고야
제발 끝까지 완성해다오.... 결말이 너무 궁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