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저 계획이란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일까? 인류로부터 가장 멀리 간 창조물. 외계인에게 보내는 편지. 창백한 푸른 점?

모두 맞는 말이다. 보이저 계획은 역사에 남을 과학적인 성취일 뿐만 아니라, 그 속에 품은 열정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찬란한 우주 여행이다.




(보이저 1호와 2호는 아직까지도 살아있고,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 작은 탐사선이 그동안 만난 고난을 생각하면, 단순히 "낭만적인 여행"으로만 칭하는 것은 지나친 축약이 아닐까 생각한다.


보이저 계획은 정치적 문제와 현실적인 한계로 60여년 동안 수많은 난항을 겪었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노력한 수많은 인재들의 이야기는 과학계에 짙은 교훈을 남겼다.


그렇다면 이 머나먼 여정은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이야기는 1965년 여름, 우즈 홀이라 불리는 미국 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다.



(우즈 홀의 전경. 매사추세츠 주, 케이프 코드(Cape Cod) 반도의 남서쪽 끝에 위치한 이 작은 해안 마을은 해양 및 생물학 연구 기관들이 밀집해 있는 과학의 중심지였다.)



당시 우즈 홀에서는 미 국립과학원 우주과학위원회의 주도 아래 과학자들이 열렬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아폴로 계획 이후 나사의 방향성을 잡기 위해서였다.

과학자들은 나사가 달 다음은 화성과 금성에 집중할 차례라 조언했다. 목성과 토성과 같은 태양계 외행성 탐사에는 기술의 한계를 지적하며, 각각의 행성을 플라이 바이(근접 통과) 방식으로 정찰하거나 목성만을 집중적으로 탐사하자 제안했다.




(1966년 출간된 우즈 홀의 여름 연구를 정리한 보고서)



우즈 홀에서의 연구 결과는 외행성 탐사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줬다. 당시 우주비행 기술은 달과 같은 가까운 천체들을 여행하기에도 벅찼다. 외행성으로의 비행은 너무 큰 힘과 긴 시간을 요구했고, 나사의 역량 대부분은 이미 가까운 행성들을 탐사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인류에게 혁신이란 없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 나사 산하의 로켓 추진 연구소(Jet Propulsion Laboratory, 이하 JPL)의 몇몇 엔지니어들은 훨씬 더 원대한 계획을 꿈꾸고 있었다.




(개리 플랜드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개리 플랜드로(Gary Flandro)는 JPL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1969년 3월부터 상사인 엘리엇 조 커팅(Elliott "Joe" Cutting)의 지시로 외행성 탐사를 연구하는 중이었다.




(행성의 에너지를 뺏어 궤도를 수정하는 스윙 바이 또는 중력 도움 항법. 쉽게 비유하자면, 롤러 스케이트를 타고 있다가 지나가는 덤프트럭에 줄을 걸어 속도와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조 커팅은 금성의 중력 도움을 받아 우주선을 수성으로 보내는, 스윙 바이(Swing-by) 항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커팅은 외행성 탐사에도 비슷한 방식을 쓸 수 있을 거라 제안하면서, 플랜드로에게 외행성을 탐사할 현실적인 방안을 연구해 보라 지시했다.

중력 도움을 최대한 활용할 동선을 찾기 위해, 플랜드로는 태양계 외각 행성들의 위치를 그래프로 그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플랜드로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1980년대 중반에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4개의 행성이 태양계의 한쪽에 늘어서는 게 아니겠는가?

만약 1970년대 중반에 우주선 하나를 발사한다면 모든 주요 외행성을 한 번에 통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외행성 정렬 현상을 다시 보고 싶다면 무려 17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플랜드로는 자신의 안에서 경외감이 솟아 오르는 걸 느꼈다. 175년 동안 없을 기회가 10년의 제한시간을 남겨두고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보이저의 대사처럼, 이런 현상은 거의 운명적인 기회라 봐도 될 정도였다.)




(헬렌 링(Helen Ling)은 플랜드로의 계산을 도운 나사의 "인간 컴퓨터" 중 하나로, 중국에서 태어나 일본의 홍콩 폭격에서 살아남아 미국으로 이주했다. 묘하게 마담 z를 떠오르게 한다.)


플랜드로는 궤도 계산 프로그램을 통해 이런 말도 안되는 비행 경로가 가능한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슬프게도, JPL의 컴퓨터에 직접 접속할 권한이 없어 담당 프로그래머에게 매일 발사 데이터를 가져가 괴롭혀야만 했다. 

모든 연구소가 화성, 금성 탐사선과 달 착륙선에 집중할 동안, 플랜드로는 자신의 아이디어에 집념했다. 1969년 7월이 되자 8년부터 13년에 이르는 다양한 비행 시나리오가 구상되었고, 최적의 발사 날짜와 비행 시간이 잡히기 시작했다



(호머 존 스튜어트(Homer Joe Stewart) 박사. 언론과 외부 홍보 자료를 통해 적극적으로 그랜드 투어를 지지했다.) 



조 커팅은 일련의 과정 동안 플랜드로를 계속해서 격려했고, 계획의 윤곽이 잡히자 JPL의 수석 과학자인 호머 존 스튜어트에게 플랜드로를 데려갔다. 스튜어트 박사는 이 계획에 그랜드 투어(Grand Tour)*라는 이름을 붙이고 여기저기 전파하기 시작한다.

*스튜어트가 떠올린 이 이름은 1950년대 이탈리아의 G. A. 크로코 박사가 지구-화성-금성 스윙바이 비행을 계획하면서 처음 만든 것이었다.



(아틀라스 로켓으로 발사되는 매리너 4호(Mariner 4) 화성 탐사선. 미국 최초로 화성 탐사에 성공한 이 탐사선은 데이터 전송 문제로 엔지니어들의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다.)



그랜드 투어는 곧바로 많은 내부적 반발을 불러왔다. 가장 큰 문제는 기계의 수명이었다. 대부분의 엔지니어들은 적어도 8년의 수명을 가진 우주선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생각했다.

또한 우주선을 제어하고 데이터를 받을 방법도 미지수였다. 당시 통신 엔지니어들은 가까운 화성에서도 심각한 전송 속도 문제를 겪고 있었다. 목성에서 데이터를 받기란 160배 더 어려운 것으로 계산되었다.



(호주 캔버라 심우주 통신 단지.)



하지만 그랜드 투어는 분명 기존의 외행성 탐사 방안보다 훨씬 효율적이었다. 해왕성에 스윙 바이 없이 직항으로 탐사선을 보낸다면 무려 30년을 요구했다.

또한 목성에서 해왕성까지 외행성 4개를 한번에 탐사하는 것은, 각각의 행성에 여러 탐사선을 보내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다. 추정 예산이 줄어든다면 프로젝트의 승인도 훨씬 쉬워질 게 아니겠는가?

그랜드 투어의 아이디어에 매료된 과학자들이 늘어갔고, 수많은 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목소리에 박차를 가했다. 심우주 통신망이 현실이 되고 있었고, JPL의 천재들은 새로운 저장 장치와 궤도 계산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매리너 계획을 통해 화성 탐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후, 좀 더 야심 찬 목표를 찾아가자는 학계의 분위기도 추력을 더했다.



(각각 1977년과 1979년 발사 예정이었던 목성-토성-명왕성, 목성-천왕성-해왕성 비행)



JPL은 점차 그랜드 투어를 자신들의 프로젝트로 만들고 싶어 언론에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나사는 구체적인 비행 계획을 세우기 위해 외행성 실무반(Outer Planets Working Group)을 만든다.


실무반은 하나의 긴 항해보다는 두 개의 항해로 나누자는 결론을 내렸다. 임무 기간을 13년에서 7년 반으로 줄여 예산을 줄이자는 생각이었다.

1969년 6월부터, 나사는 우주과학위원회와 연구를 통해 총 5개의 외행성 탐사 임무를 계획한다. 한 쌍의 그랜드 투어 임무, 나머지 3개에는 지난 1965년의 우즈 홀에서 고안했던 목성 집중 탐사가 교묘하게 끼어 있었다.




(폰 브라운 박사의 역작이자 당시 지구 최대의 발사체, 새턴 v 로켓.)


목표는 점점 원대해지고, 프로젝트의 규모는 늘어났다. 여러 대의 우주선을 발사하고 각 행성에 탐사선을 떨어트리는 웅장한 계획이 구상되었다. 이들 탐사선은 아폴로 계획에 쓰이는 세턴 V 로켓에 실릴 것이었다.

하지만 나사는 희망찬 비전과는 정반대로, 미국의 우주과학 분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1969년 1월 20일. 당선 기념 퍼레이드를 하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



바로 닉슨 행정부가 출범한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