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에게 향후 우주 개발 방안을 발표하는 Space Task Group (STG). 슬프게도 계획 대부분은 행정부의 칼질을 맞고 사라졌다.)
겉으로는 이 낭만 있는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제임스 밴 앨런과 폰 노이만과 같은 유명 학자들이 그랜드 투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나사는 적극적으로 홍보를 펼쳤다.
닉슨 대통령은 1970년 3월 7일 플로리다의 연설에서 그랜드 투어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린든 B.존슨 대통령은 1964년부터 복지, 교육, 인권 분야의 전면적 개혁을 위해 '위대한 사회' 계획을 실시했다.)
하지만 닉슨과 공화당은 재정 정책에 대해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또한 아폴로 계획을 케네디와 민주당의 정치적 업적이라 생각했다.
가뜩이나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과 베트남 전쟁으로 연방 예산이 부족하건만, 나사는 미국 연방정부 예산의 3~5퍼센트 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사의 연구소 중 유일하게 폐쇄된 전자 연구 센터. 케네디의 지역구 표를 위한 정책이라는 비판을 맞았다.)
대중들의 관심이 식은 것도 예산 삭감에 이유를 부여했다. 아폴로 계획으로 우주 경쟁의 종지부를 찍혔으니, 더 이상 우주 탐사는 소련과의 경쟁 도구가 아니었다.
닉슨 휘하의 예산국은 나사의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나사 전자 연구 센터를 폐쇄시킨다. 1969년 42억 달러에서 1971년 32억 달러로 감소한다.
(바이킹 화성 탐사선의 모형 옆에 서 있는 칼 세이건(Carl Sagan))
이미 나사는 바이킹 화성 탐사선의 개발 비용이 너무 늘어나 아폴로 계획 다음으로 많은 돈을 쓰고 있는 상태였다.
계속된 예산 삭감은 나사의 과학 임무에 전방위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
새턴 V 로켓의 생산은 중단되었고, 아폴로 계획은 축소되었으며 바이킹 발사는 1973년에서 1975년으로 연기되었다.
(아폴로 계획은 본래 20호까지 예정되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18호까지밖에 가지 못했다.)
내부 인재들도 자리를 떠나는 상황에서, 나사는 한정된 예산을 두고 내부 프로젝트들끼리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1970년 7월 26일부터 또다시 우즈 홀에서 연구가 열렸다. 이번에는 야심찬 비전이 아닌, 현실적인 돈계산을 위해서였다.
해군 연구소의 우주과학위원회 위원인 허버트 프리드먼이 이끄는 집행 위원회는 우선순위를 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리버스 1999에서는 유머스럽게 표현되었지만... 보통 이런 내부 평가는 정치와 알력 다툼의 영역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나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허블 우주 망원경은 예산을 두고 그랜드 투어와 경쟁한 주요 프로젝트였다.)
외행성 실무반은 그랜드 투어를 수호했지만, 프리드먼의 파벌은 목성만 집중적으로 조사하길 원했다.
이들은 그랜드 투어의 막대한 예산이 우주 망원경과 같은 다른 과학 임무를 막을까 우려했다. 또한 계획의 규모가 너무 크고 길다며 반대하는 과학자도 많았다.
당시 네 번의 발사 계획으로 조정된 그랜드 투어의 추정 예산은 총 10억 달러였다.
(NERVA 핵 추진 로켓. 앤더슨이 이끄는 미국 원자력 위원회와 나사의 공동 작품이었다.)
프리드먼의 보고서는 학계 여기저기서 논쟁을 불러왔고, 여기에 클린턴 P.앤더슨 상원의원까지 끼어들었다.
앤더슨은 미 상원 항공우주과학위원회와 원자력 위원회의 의장으로, NERVA라는 핵추진 로켓 엔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나사가 NERVA에서 그랜드 투어로 예산을 전환할 까 우려했다.
1971년 5월 12일, 클린턴이 이끄는 위원회는 NERVA의 예산을 증액하고 그랜드 투어의 예산을 삭감하기로 의결한다
나사는 백악관과 국회에 로비를 벌이고 과학계에 호소하여 외행성 탐사를 어떻게든 지켜내고자 했지만, 또 하나의 거대 프로젝트가 어지러운 판에 끼어들었다.
타임 키퍼라면 모두 알고 있을 미국의 상징. 우주 왕복선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알차다 알차
제발 과학에 정치가 끼어들지 마...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