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가 1972년 발표한 우주 왕복선의 개념도)
우주왕복선은 당초 발표했던 나사의 미래 비전 중 닉슨 대통령이 유일하게 승인한 프로젝트였다.
한번에 엄청난 양의 화물을 궤도에 올릴 수 있는 재사용 발사체. 이를 여객기처럼 상업, 군사 분야에서 사용한다면 예산을 엄청나게 절약할 것으로 보였다.
(닉슨 대통령과 대면하고 있는 제임스 C.플레처(James C. Fletcher))
나사의 행정관이었던 제임스 플레처는 백악관의 관리들로부터 슬픈 소식을 전해들었다. 닉슨이 우주 왕복선과 그랜드 투어를 동시에 허용할 리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랜드 투어인가, 유인 우주선인가. 나사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아폴로 계획은 계속 진행되었지만, 달 착륙의 신비함은 사라져가고 있었다)
당시 나사의 경영진도 과학 탐사선보다는 유인 우주선을 선호했다. 우주왕복선은 아폴로 계획을 이어 유인 우주비행을 계속할 유일한 수단이었다.
대중들의 우주 탐사에 대한 관심은 점점 식어가고 있었고,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유인 우주선을 보존하자는 인식이 고위 인사들 사이에서 돌았다.
(1972년 1월 5일, 그랜드 투어의 종말과 우주 왕복선의 개발을 발표하는 닉슨 대통령)
결국 1971년 12월 16일, 나사의 1973년도 예산안 요청에서 그랜드 투어가 삭제되었다.
외행성 4개를 탐험하자는 초안은 완전히 폐기되었고, 기존 내행성 탐사 임무인 매리너 계획의 목성-토성 임무로 대체되었다.
초기 10억 달러로 측정되었던 예산은 이제 겨우 3억 6천만 달러였다.
(아틀라스 로켓에 실려 발사되는 매리너 9호)
그랜드 투어의 실패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었다. 정치적 상황으로 줄어드는 예산, 나사 내부에서의 경쟁. 그리고 학계와 연구소 간의 분열.
또한 엔지니어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나사 경영진들은 JPL의 매리너를 비롯한 무인 우주 탐사 임무가 대성공을 거두자 '사소한 질투심'을 가졌다고 한다.
(1972년 12월, JPL 앞에서 처음으로 집결한 보이저 계획 운영 그룹)
그렇게 일렬로 늘어선 행성을 항해한다는 낭만적인 아이디어는... 현실의 벽에 의해 좌절되는 것처럼 보였다.
나사는 토성 이상의 탐사를 금지했고, 매리너 목성-토성 탐사 위성조차 본부의 제대로 된 지원을 받기 힘들어 보였다.
위대한 항해의 꿈은 여기서 스라지는 것일까?
우린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라플라스의 괴짜들을 보면 알 수 있듯, 이과생에게서 낭만과 광기를 빼면 시체인 법.
탐구열에서 비롯된 학자들의 고집을 바꾸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이 이 175년만의 기회를 포기할 리가 없었고, 높으신 분들은 그걸 몰랐다.
다음 편에 계속...
참고로 당초 기대했던 우주왕복선의 경제적 절감 효과는 이런 저런 이유로 거의 성취하지 못했고
이는 우주왕복선 프로젝트가 중단되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된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빨리 다음편
빨리 다음편 제발...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