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NER JUPITER-SATURN의 포스터)
하지만 외행성 정렬은 일어날 예정이고, 아직 탐사선이 토성까지 가기에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은가?
JPL의 엔지니어들은 이 우주선을 천왕성과 해왕성까지 갈 만큼 강인하게 만들기로 결심했다.
(1973년 발사된 매리너 10호)
예산 절약을 위해 매리너와 바이킹 호의 설계와 경험이 재활용되었다. 원자력 전지와 같은 신기술은 대부분 우주선의 수명을 연장하는 데 쓰였다.
강조되지는 않았지만, 토성 임무가 성공적이라면 천왕성으로 향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임무 계획에 명시되었다.
(1969년 12월 3일, 실험용 테스트 모델인 VG77-1의 조립 과정.)
물론 이런 의도를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금기였다. 나사의 상층부는 당시에도, 심지어 탐사선이 해왕성을 통과하기 직전에도 외행성 탐사를 반대했다.
그랜드 투어의 취소로 얻은 교훈은, 거대한 장기 프로젝트보단 부분적으로 프로젝트를 연장해 추가 예산을 받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이었다.
MJS의 진정한 목적은 토성을 통과한 이후에나 드러날 예정이었다.
(핵심 인원들이 선발된 나사 소속의 고다드 우주비행센터.)
이제 탐사선에 탑재할 장비 개발을 위해 과학자를 모집할 시간이었다.
조사 자원과 지원을 끌어모으기 좋은 대규모 기관 소속이 선호됐지만, 대학 소속 과학자들도 상당수 선발되었다.
나사-연구소-민간 기업-대학 간의 협력과 나사의 자금 지원은, 대학교 실험실과 같은 '소규모 과학'을 정부가 주도하는 '거대 과학'과 연동했다.
(1980년 촬영된 에드 스톤(Ed Stone) 박사의 모습.)
이런 '거대 과학'의 중심축을 맡은 사람은 프로젝트 과학자(Project Scientist)인 에드 스톤 박사였다.
프로젝트 과학자는 실험과 관측의 우선 순위를 정하는 최종 중재자이자, 나사와 학계, 대중, 언론 사이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였다.
스톤 박사는 매일 회의를 통해 기자 회견에서 어떤 소식을 발표할지 결정했다.
('누가 먼저 발견했는가'와 '누가 무슨 역할을 했는가'는 학자들 사이에서 목숨을 거는 문제이다.)
기자 회견을 통한 발표는 한 가지 문제를 야기했다. 새로운 발견이 나온다면 누가 그 명예를 가져갈 것인가?
스톤 박사와 팀은 과학의 발전을 위해 기존의 관행을 깨기로 했다.
발견한 데이터를 모든 과학자들이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모두의 이름으로 발표하기로 정한 것이다.
(탑재된 장비 중 가장 특이한 것은 책임 연구자가 없으며, 배정된 예산도 없는 한 작은 판이었다.)
프로젝트가 기존 매리너 탐사에 비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자,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나사는 공모전을 열어 1977년 3월 4일 새로운 이름을 발표했다.
보이저(Voyager)
위대한 항해자이자 여행자의 이름이 처음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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