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마도학자 접견 일지
· 제 11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사막에 피는 꽃 · 제 10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티백은 어떻게 먹는 거야?
· 제 9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IDM 데이터 탈취 사건
· 제 8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 제 7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벚꽃 에일 (하편)
· 제 7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벚꽃 에일 (상편)
· 제 6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찰리와 보이저의 아리아
· 제 5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네크롤로지스트의 약속
· 재업)제 4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콘블룸의 목소리
· 제 3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크리스탈로의 눈물
· 소설) 제 2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과학과 철학
· 소설) 제 1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삼나무와 어린 장미
1. 오랜만! 쓰던 글 완결나서 오랜만에 돌아왔어. 설정은 안 맞을 수도 있으니 양해 부탁해!
2. 릾을 오래 한 유저들만 이해할 수 있는 요소가 있으니 주의해줬으면 하는 마음이야.
3. 재밌게 봐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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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회 마도학자 접견일지 - 엎질러진 물>
[4월 11일 / 19:33 / 여행 가방 안 / 머큐리아의 천막]
“그래, 버틴. 천천히 심호흡해. 이제 숨을 들이쉬어.”
숨을 들이쉬었다.
그저 숨일 뿐이다.
그러나 머큐리아의 말대로 의식하고 하려니 집중이 안됐다.
차라리 속에 들어온 향 냄새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두운 천막 내부, 머큐리아의 향로가 향을 피우고 있었으니.
“자, 다시 내쉬어. 그렇게 하면 에너지의 흐름이 안정될 거야.”
후.
“어때?”
눈을 떴다.
천막 안의 촛농이 낯설게 빛났다.
끝이 살짝 녹아, 하얀 기름이 되어 떨어졌고.
머큐리아의 눈은 나를 평온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고마워, 머큐리아. 한결 나아진 것 같아.”
“나는 널 도운 게 없어. 네가 숨을 고르면서 에너지의 흐름을 안정시켰을 뿐인 걸.”
여전히 내 목소리는 건조했고.
머큐리아의 목소리는 어딘가 딴 세상에 있는 것처럼 들렸다.
마지막 접견일로부터 긴 시간이 지났다.
일자로 그리 오래되진 않았으나.
체감은 400일은 넘은 것 같았다.
공백이 길었다면 길었으나 결국 그날은 왔다.
오늘은 12번째 접견일이다.
***
여행 가방의 황무지.
말만 황무지지 이젠 그렇지도 않다.
저 멀리 천막이 보이는가.
‘카프 펍’ 옆에 놓인 머큐리아의 천막.
어쩐지 키페리나가 좋아할 것 같은 줄무늬 우산 모양의 천막 말이다.
향 냄새가 옷에 밴 것 같다.
방금 전까지 저곳에 있었다.
지금은 다른 곳에 있다.
뉴바벨 씨의 향수 냄새가 짙게 나는 이곳.
나는 그녀와 함께 크리터 공장 위에 서 있다.
정확히는 전망대다.
“높네요, 뉴바벨 씨.”
미세먼지와 갈대밭만 가득하던 황무지도 이젠 예전 같지 않다.
처음엔 문라이트 산호초에 나른한 항구 카페 하나가 있었다.
그게 가장 큰 건물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도시가 들어섰고, 포장 도로가 깔렸다.
마도학으로 만든 복제품에 불과하지만 실상 한 도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나름 멋지지 않나요? 버틴 양.”
“글쎄요.”
실크햇을 벗어 가슴팍에 얹어두었다.
뉴바벨 씨의 말에 확답하진 못했다.
도시가 발전한 만큼, 자연 친화적인 마도학자들은 더 먼 곳으로 떠났으니까.
누군가에겐 진보지만 누군가에겐 박탈과도 같다.
오늘날의 황무지란 그런 곳이다.
“기분이 안 좋아보이네요. 무슨 일 있나요?”
그녀의 물음에 시선을 피했다.
오늘 이곳에 온 건 접견을 위해서다.
뉴바벨 씨가 대상은 아니다.
아까 만난 머큐리아도 그 대상이 아니다.
“로거헤드... 보신 적 있나요.”
레이섬 루프.
영사기가 본체인 의식 각성자.
그녀가 접견 대상이다.
일단은 레이섬의 위치 파악이 우선이었다.
황무지에서 가장 높은 공장 전망대를 온 건 그런 이유다.
“아, 로거헤드 양이요? 유감스럽지만 오늘은 본 적 없답니다. 평소라면 누아르 감독님이나 야간 순찰자 양이랑 같이 다니지 않던가요? 아, 안안 리 양과도….”
“아녜요. 못 보셨으면 괜찮습니다.”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끊었다.
핵심은 그녀가 이 근방에 없었단 얘기다.
중요한 건 한 가지 더 있다.
두 번째 접견 대상의 위치다.
“그러면 혹시 예니세이는 보셨나요.”
“예니세이 양이요? 흐음.”
뉴바벨 씨의 얇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럴 만도 하다.
내가 괜스레 쭈뼛거렸던 이유.
뉴바벨 씨에게 선뜻 예니세이의 행방을 묻지 못했던 건 며칠 전 있었단 소동 때문이다.
‘원더랜드 도도새 때문에 인근 강의 물을 끌어 쓴다고요? 말도 안돼요. 제아무리 버블볼을 만들기 위해서라지만 그건...’
뉴바벨 씨의 공장 직원 중, 가장 많은 분포를 차지하는 건 원더랜드 도도새다.
녀석들은 1시간마다 주기적으로 티타임을 가져줘야 한다.
평범한 영국인스러운 모습이지만 문제가 있었다.
마시는 만큼 나왔다.
그 말은 오수를 흘려보낼 강이 필요하단 뜻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재단의 승인을 받아서 인근 강으로 오수를 처리하도록 했지만...
‘강에는 그 강의 목소리가 있어요. 재단의 결정이라지만 저는 용납할 수 없어요.’
결과적으로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은 아니었다.
“세상은 거꾸로 흘러가고, 크리터와 마도학자들의 관계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죠, 버틴 양.”
뉴바벨 씨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말대로 폭풍우는 모든 것을 되돌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이 늘어날 수록 문제가 늘어나는 것 같아요. 뉴바벨 씨.”
인간과 마도학자.
그 범주를 묶으면 사람이다.
사람 사이에선 계속해서 어긋난 마찰이 발생한다.
맞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
레이섬를 찾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했다.
카메라 머리를 달고 다니는 의식 각성자.
외형만 놓고 보면 못찾는 게 어렵지 않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녀에겐 의도치 않은 방랑벽 같은 게 있다.
쉽게 말해서 필름이 없으면 기억을 잃는다.
그렇게 되면 심해 깊은 곳에서 빌라 씨가 건져 올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해괴한 곳에서 발견되곤 한다.
최근 발견된 곳이 리버티가 비행 연습을 ‘이륙 지점’이었으니.
솔직히 살아서 만나면 다행이란 심정이다.
아무튼 레이섬을 빨리 찾을 필요가 있다.
소네트라도 데려올 걸 그랬다.
머릿수가 있었으면 좀 나았을 텐데.
“버틴? 라인 강엔 무슨 일이야?”
구둣발이 조건 반사처럼 멈췄다.
고개를 돌렸다.
나무 박스 위에 금발의 소녀 한 명이 서 있다.
여전히 구속복을 입은 로렐라이.
그녀가 소라 나팔을 든 채, 나를 똘망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여긴...”
라인 강이 아니다.
그러나 로렐리아에겐 그것이 중요하진 않았다.
“사람을 찾고 있었어.”
레이섬의 이름을 물어도 모를 테니 외형으로 비유했다.
“카메라 머리를 한 의식 각성자인데, 혹시 본 적 있어?”
로렐라이가 나무 박스 아래로 내려왔다.
종종걸음으로 내게 오더니, 소라 나팔을 들이밀었다.
“버틴은 착한 아이구나? 엄마랑 아빠가 그랬어. 길을 잃어버린 사람을 찾고 있는 거지?”
그녀가 나팔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괜스레 이상한 공명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로렐라이에게 맞춰주지 않을 수는 없다.
그녀의 마도술에 당하면 길거리에서 잠들게 될 테니까.
“맞아. 카메라 머리를 한 사람을 찾고 있어. 길을 잃었거든.”
내 말에 그녀가 소라 나팔을 넓은 소매 안에 넣었다.
강가에 다가서더니, 까치발을 들고 강가를 바라보았다.
“요즈음 엄마 아빠의 목소리가 선명하지 않아. 예전엔 엄마가 긴 막대 얘기를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라인강에 대한 이야기를 해. 강에 배는 다니지만 사람들이 몸을 씻을 수는 없어. 깨끗하다기엔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처럼 자갈이 떠 다녀.”
그녀가 수수께끼처럼 말했다.
내게 있어서 로렐라이의 언어를 해독하는 능력은 없다.
제멜바이스 씨를 데려오면 뭔가 알아낼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황무지를 싫어한다.
세계의 거울 같다면서 말이다.
이곳에 올 사람이 아니다.
최대한 그녀의 말을 느낌으로 해석하자면...
“로렐라이 씨의 말은 관념주의적인 요소로 해석할 수 있어요. 예로 라인강은 우리 앞에 있는 도나우강을 뜻하고, 강에 떠다니는 자갈은 원더랜드 도도새의 굳어버린 용변으로 해석할 수 있죠.”
...
해석은 내가 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유령처럼 나타난 레콜레타 씨가 한 거다.
“아무래도, 로렐라이와 함께 얘기를 나누다 보면 저의 소설 신집편에 대한 영감이 떠오를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문장은 어떨까요. ‘버틴이 도나우강을 바라보는데, 그 눈엔 마치 사라진 라인강에서 죽어간 잉어처럼 씁쓸한 비탄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어때요? 담담하고 좋은 문장 같지 않나요? 아닌가. 이 비유는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라인강에 잉어가 살았는지는 알 수 없으니까….”
“어... 그렇군요. 레콜레타 씨.”
말이 많은 사람이 하나 늘었다.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냥 접견 전에 피곤해질 뿐이다.
물론 피곤해지는 건 썩 좋은 일은 아니다.
실크햇을 살짝 낮춰, 그들에게 인사했다.
“저는 일이 있어서... 다음에 또 볼게요, 로렐라이, 레콜레타 씨.”
그러나 레콜레타 씨는 금방 만난 선객을 떠나보내기 아쉬웠는지 내 팔을 붙잡았다.
“잠시만요, 버틴! 요즘 문학 토론회에 소네트가 안 와서 그런데 혹시 연락처를 주실 수 있을까요? 아, 겨울 씨도... 아니지, 겨울 씨는 지금 겨울 바다의 황량한 파도를 보고 있을 테니 영감이 될 아이디어를 가져올지도...”
이대로 가다간 말이 길어지다 황무지의 해가 저물 것 같았다.
레콜레타 씨의 손을 최대한 부드럽게 떼어냈다.
떠나기 전, 그녀에게 마치 용건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별다른 기대 없이 물었다.
“레콜레타 씨, 혹시 로거... 아니, 카메라 머리를 한 의식 각성자를 본 적이 있나요?”
그녀와 레이섬의 행동 반경은 겹치지 않는다.
마주쳤을 리가 없다.
마무리 인삿말에 가까운 말을 꺼낸 거다.
‘다음에 밥 한번 먹자’와 비슷한 뉘앙스로.
그런데 레콜레타 씨가 들고 있던 만년필을 손가락 사이에서 돌리더니 그랬다.
“오, 그 기이하고도 종잡을 수 없는 카메라 씨라면 지금 호러피디아와 함께 있어요. 체스판을 옷감으로 만든 것 같은 독특한 분이었는데...”
“감사합니다, 레콜레타 씨. 소네트에게 연락해둘게요.”
일은 의외로 쉬워졌다.
호러피디아...
조슈아에겐 재단에서 나눠준 단말기가 있었으니까.
“버틴! 나중에 봐!”
로렐라이가 묶인 두 손을 부채처럼 흔들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
“음, 항상 말하지만 점프 스케어는 이미 한물 갔...”
“오랜만이야, 조슈아. 잘 지냈어?”
“이봐, 버틴! 그 이름은 이미 버렸다고. 내 이름은 호러피...”
“미안, 지금 시간이 많지 않아서.”
조슈아의 말을 모두 들어주기엔 시간이 없다.
닉시관 시계가 주홍빛 숫자를 띄웠다.
오후 9시 47분.
어쩌면 접견을 새벽에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좋아. 그래서 무슨 일이실까, 우리 위대한 버틴께선?”
주변을 둘러봤다.
재단의 소장품을 빼돌린 건지 연도가 쓰인 비디오 테이프와 CD.
아니지.
레이섬이 재단의 마도학 소장품 관리소에서 일하는 만큼 어찌 보면 당연한 거다.
두 사람이 모여 있는 이유를 알겠다.
“앗, 타임키퍼!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레이섬의 카메라 필름이 시끄럽게 울렸다.
여전히 웃는 모습이 반가웠다.
“조슈아, 잠깐 나 좀 볼 수 있어?”
“뭐? 나는 지금 레이섬과 2000년대 비디오 테이프의 시나리오 논의를….”
차갑게 바라봤다.
“좋아. 짧게 부탁할게. 휴게 시간인 건 알지?”
조슈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문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 섰다.
여유롭게 웃으면서도 조슈아의 눈썹은 팔자로 구겨졌다.
용건만 간단하게 말하라는 의미기도 했다.
본래라면 레이섬을 데려가겠다는 한 마디면 충분했다.
접견이 재단의 공식적인 업무인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용건이 하나 추가됐다.
“저 비디오 테이프들. 재단에서 공식적으로 허가 받고 반출된 물건들이야?”
조슈아가 안경테를 매만졌다.
딱히 답은 없었다.
그러나 답은 됐다.
“이번은 넘어갈게. Z 씨가 널 따로 부를 일은 없을 거야. 다만 접견 때문에 레이섬은 데려가야 할 것 같아.”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조슈아는 바보가 아니다.
어떤 상황인지는 충분히 이해했을 거다.
“좋아, 명령인데 하라면 해야지.”
그가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너무 세게 말했나.
어쨌든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방문 손잡이를 잡았고.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레이섬은 사람을 잘 믿는 편이다.
조슈아는 예전부터 사람들을 자주 이용하는 편이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추론의 영역이다.
명확히 밝혀진 건 아직 없다.
다만 ‘로거헤드’가 아니라면 모두가 한 방향으로 추론할 거다.
조슈아가 물품을 어떻게 빼온 건지 말이다.
내부로 들어갔다.
비디오 테이프의 퀴퀴한 먼지 향이 났다.
머큐리아의 향은 진작 수명을 다한 것 같았다.
“레이섬, 다시 왔어. 이따가 접견이 있을 예정인데 혹시 시간 괜찮아?”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비디오 테이프를 만지작거리더니 필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지금 필름이 다 떨어져서 그런데. 내가 까먹을 수도 있거든? 잠깐만? 내가 메모 좀 하고...”
필름이 떨어졌다라.
기껏 등잔 밑에 숨은 그녀를 찾아냈다.
더 찾아다니면 일정이 위험했다.
아무래도 소네트에게 부탁할 일이 하나 생긴 것 같다.
“여기 있어, 레이섬. 곧 누군가 필름을 가져다 줄 테니까.”
***
황무지의 일부가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다면.
남은 일부는 여전히 숲이었고 크리터가 출몰하는 평범한 땅이었다.
비록 가짜이지만 그럼에도 자연친화적인 마도학자들에겐 안식처와 가까웠다.
드루비스 씨나 갈기모래 씨가 그런 케이스다.
예니세이도 비슷한 부류였다.
평소에는 러시아 북부의 추운 지방을 찾아가는 그녀다.
그러나 황무지에만 오면 이상하게 따스한 숲을 찾는다.
다른 환경을 경험하고 싶었던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예니세이? 그 빨간 머리 친구? 그녀라면 황무지 북서쪽의 별빛 호수 인근에 있을 거야. 아, 꼬마 친구. 그러고 보니 내가 숲에 있을 때 그 얘기를 깜빡했는데...’
할 말이 많은 갈기모래 씨 덕분에 예니세이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황무지의 별빛 호수.
오래된 곳이지만 달과 별을 본뜬 조각상이 호수 위에 둥둥 떠 있는 곳.
예니세이는 얕은 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잔잔한 물이 발 끝에 닿았으니.”
그녀가 손에 쥔 작은 유리병에서 물이 떠올랐다.
그것이 허공에 불규칙한 문양을 만들더니 곧, 힘을 잃고 호수에 떨어졌다.
물과 물이 뒤섞였고, 예니세이는 손을 호수에 담갔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으려는 모습이었다.
호숫가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물에 들어가진 않았다.
멀찍이서 불렀다.
“예니세이. 오랜만이네.”
그러자 예니세이가 큰 소리를 들은 고양이처럼 화들짝 놀랐다.
내 쪽을 돌아보더니 부끄러운 듯 시선을 돌렸다.
“아, 안녕하세요 버틴 씨. 그게... 보셨나요.
“응.”
“언제부터 보신 걸까요.”
닉시관 손목 시계가 지난 시간을 알려줬다.
“전부.”
구체적인 숫자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 그러면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걸까요.”
예니세이가 헛기침을 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접견이 예정되어 있어.”
간단하게 말했다.
이 정도로도 어떤 마도학자든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예니세이는 아쉽다는 듯 손을 떨궜다.
애잔한 표정일 짓고 있었다.
“왜 그래?”
“그게...”
예니세이가 몸을 돌려, 호수를 바라봤다.
물결이 허벅지에 차오를 정도로 깊이 들어갔다.
여름에 빌라 씨, 마커스와 함께 샀다던 하얀 블라우스.
그것이 물에 젖어 투명해졌다.
“점점 점괘를 읽기 어려워져서요.”
허공에 떠오른 물이 힘없이 떨어진 것과 연관 있는 걸까.
“자세하게 얘기해 줄 수 있어? 특이 사항이라면 Z 씨에게 보고할 필요가 있어서.”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
예상은 됐다.
오수와 관련된 거겠지.
아니나 다를까.
예니세이가 보이지도 않는 크리터 공장 쪽을 쓸쓸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강과 호수의 오염은 제 마도술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쳐요.”
그녀가 품속에서 갈색 노트를 꺼냈다.
뭍으로 나오더니 그것을 내게 건넸다.
“이건...”
읽을 수 없었다.
그녀의 필기체는 러시아인의 정수 그 자체였다.
l자와 l자가 바코드처럼 이어진 글자.
예니세이는 그 중에서 한 줄을 가리키며 말했다.
“공장에서 흘러나온 오수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처음 공장이 가동되고 일주 뒤부터 마도술이 불안정해졌거든요.”
그런 내용이 담겨 있는 건가.
알아볼 순 없었지만 그녀가 노트를 들이밀고 거짓말을 할 것 같진 않았다.
책을 조심히 덮어 그녀에게 돌려줬다.
지금 시각은 밤 10시 20분.
“로비에 있는 접견실로 와줬으면 해. 이따가 11시까지.”
품속에서 소네트가 챙겨 준 마도학 디스크를 건넸다.
“주문을 외우면 로비로 이동하게 될 거야.”
예니세이는 디스크를 담담하게 받았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호수를 향하고 있었다.
***
밤 10시 59분.
아까 로비로 돌아온 뒤 세수를 끝마쳤다.
폭풍우의 진실을 밝히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
어머니를 찾는 것.
내게도 많은 목적들이 있다.
하지만...
“마커스. 간단하게 말하면 관념주의적인 표현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느낌을 줄 수 있는 표현으로...”
“레, 레콜레타 씨... 너무 어려운데 혹시 조금만... 그... 천천히... 마아앙...”
“마아앙이요? 그게 무슨 뜻이죠 마커스? 혹시 제가 모르는 20세기의 시대를 관통하는 문학적인...”
사람들이 늘고, 저마다 관계를 만들어나간다.
지금으로선 이러한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게 목적이 되었다.
이젠 여행 가방 안도 어엿한 사회니까.
어쩌면 Z 씨가 처음 접견을 제시했던 것도 그런 의미였을 테다.
그녀의 뜻을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내겐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똑똑’
그러나 사회에 긍정적인 면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언젠가 제멜바이스 씨가 말했듯, 사회엔 거울처럼 이면이 존재한다.
커다란 거울일 수록 그 이면은 확연히 드러난다.
“아, 버틴 씨. 오셨군요.”
“버틴! 기다리고 있었어!”
마도학자도 인간도 사람이고 칭할 수 있다.
사람들에겐 이기심이 존재한다.
설령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에겐 피해가 되어 돌아올 수 있다.
“미안해. 조금 늦었지.”
자리에 앉았다.
서류를 내려놓고, 두 사람을 마주봤다.
예니세이는 어딘가 힘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새 옷을 갈아입었는지 익숙한 울 망토를 입고 있었다.
반면 레이섬은 접견실 내부가 신기한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곳곳을 쳐다봤다.
영사기가 돌아가는 소리 덕분에 정적은 없었다.
“오늘은 열 두 번째 접견일이야. 접견 대상은 너희 둘이고.”
“그러니까... 이분은 마도학자인가요?”
예니세이가 레이섬을 보며 물었다.
그럴 만도 했다.
레이섬과 예니세이가 굳이 마주칠 일은 없었으니까.
“맞아. 소분류를 따지면 의식각성자로 분류되고 있어.”
“네 눈앞에 보이는 이 영사기가 바로 내 머리고 심장이야. 아, 심장은 엄밀히 말해 머리에 있는 건 아니지만...”
레이섬이 신난 아이처럼 예니세이에게 여러 이야기를 건넸다.
접견 자체는 걱정이 없었다.
과묵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문제가 되겠지만.
레이섬은 그것과는 정 반대의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서 예니세이는 거의 듣는 입장이었고.
나는 하얀 서류 위에 차근차근 메모했다.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
관계에 변화가 있었는지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내가 너를 촬영해도 괜찮을까? 너 정도로 신비로운 모습이라면 누아르 감독님의 영화에서 조력의 역할을 하는 예언자 캐릭터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레이섬의 그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메모를 멈췄다.
고개를 들었다.
예니세이의 얼굴을 봤다.
‘능력을 잃어가는 그녀가 영화에서 예언자 역할을 맡는다.’
이 상황을 예니세이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매사 침착한 그녀다.
하지만 그녀 또한 마도학자다.
“전... 영화에 등장하는 예언자가 될 수 없어요.”
예니세이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안 그래도 긴 앞머리가 눈을 전부 가렸고.
그늘이 져서 눈매는 보이지 않았다.
“어... 예니세이? 괜찮은 거야?”
레이섬이 당황하며 예니세이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나 붉은 머리 러시아인에겐 딱히 긍정적인 영향은 없었다.
오히려 예니세이는 주머니에서 유리병을 꺼내 응시했다.
샘물이 찰랑거렸고.
예니세이가 말했다.
“유리병 안의 물 만큼은 항상 맑고 깨끗한 것을 담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젠 그런 물조차 황무지에 남지 않은 것 같더군요.”
예니세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접견실에 난 작은 창문으로 향했다.
그곳엔 뉴바벨 씨의 크리터 공장이 늘 보이던 산을 가리고 있었다.
“제 마도술이 약해서 그렇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제 모든 걸 망치는 저곳을 두고 볼 수만은 없네요.”
레이섬의 렌즈가 반짝였다.
필름이 빠르게 돌아가더니,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 그래도 공장이 들어서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잖아? 공장에서 빈 디스크를 생산해서 마도술을 담고 보조 도구로 쓴다던가...”
하지만 예니세이에겐 그다지 큰 위로가 되진 못했던 것 같다.
“그 디스크들로 점괘를 볼 수 있는 건 아니죠.”
예니세이가 유리병을 열었다.
손가락 길이 정도의 물줄기가 떠올랐다.
이내 비틀거리는 사람처럼 휘청이다 바닥에 떨어졌다.
물은 마룻바닥에 스며들었고.
예니세이는 주워 담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겠죠. 근데 제겐 도움이 안됐네요. 이 힘을 사용할 수 없으면 저는 베스머트 씨를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
접견은 잠시 중단됐다.
예니세이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조용히 자스민 차를 마셨고.
‘타임키퍼, 잠깐 물어볼 게 있는데...’
레이섬이 소매 끝을 잡고 묻길래 나왔다.
복도에 섰다.
야밤의 여행 가방은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있잖아, 예니세이의 마도술은 물을 통해 점괘를 보는 것 같은데 맞아?”
레이섬이 영사기 필름을 거꾸로 돌리며 말했다.
“맞아.”
“깨끗한 물이 필요하단 것도 알겠어. 너무 나쁜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여행 가방 밖에도 깨끗한 물은 많지 않아?”
레이섬의 말이 맞다.
이 세상엔 수많은 수역이 있다.
그곳들 전부가 더러운 곳은 아니다.
다만 예니세이가 여행 가방의 환경 오염에 민감한 이유는 따로 있다.
그녀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물’ 중에서 가장 소통이 잘 통하는 곳은 밖이 아니었다.
여행 가방 내부의 깨끗한 물들이었다.
예니세이는 그 길로 마도술을 연마했고.
요즘은 마틸다보다 점괘를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내, 내가... 이 마틸다 님이... 마도술에서 밀린다고?’
마틸다 본인도 인정했으니 말 다한 거다.
그런데 물이 오염되면서 자신의 마도술이 약해지니, 씁쓸할 만도 하다.
예니세이는 어느 사람을 찾고 있었으니까.
“이런 이야기야.”
레이섬에게 예니세이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영사기가 툭 소리를 내더니 멈췄다.
괜찮은가 해서 머리를 두드려 봤다.
그러자 레이섬이 필름이 끊겼다 살아난 사람처럼 휘청거렸다.
“미안, 타임키퍼. 예니세이가 사람을 찾고 있을 줄은 몰랐어.”
“당연한 거야. 개개인의 사정을 모두 알진 못할 테니까.”
***
다시 접견실 안으로 들어왔다.
레이섬은 아까보다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고.
예니세이는 앞머리로 눈을 가려, 시선을 피했다.
다시 서류를 들어올렸다.
일단 아까 레이섬이 그녀에게 했던 말들이 모질게 들렸을 수도 있다.
‘그, 그래도 공장이 들어서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잖아? 공장에서 빈 디스크를 생산해서 마도술을 담고 보조 도구로 쓴다던가...’
이 부분이 예니세이에겐 적합한 말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크리터 공장의 물품은 예니세이에게 도움이 안 됐으니까.
그녀에게 필요한 말을 생각했다.
뭐가 좋을까.
타인에게 도움이 됐다는 말은 필요하지 않다.
언젠가 저 공장의 일이 그녀에게 도움이 될 거란 식으로 말해야 할까.
그걸 내가 장담할 수 있을까.
나는...
“예니세이, 나는 기억이 항상 필름 속에 존재하거든? 그래서 필름을 빼놓으면 누가 오더라도 제대로 된 기억을 할 수 없게 돼.”
갑자기 레이섬이 입을 열었다.
발을 굴렀고.
손을 꼼지락거리며 예니세이에게 그랬다.
“사실 오늘 호러피디아의 방에 있었단 말이야. 근데 어떻게 거기에 갔는지는 기억이 없어. 그 사람 말로는 내가 마도학 소장품 관리부에서 비디오 테이프를 공식으로 반출했고, 그의 방에 가져온 거라는데...”
예니세이는 그 말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레이섬이 아까 겪은 상황.
어쩌면 조슈아에게 이용당했을 지도 모른다는 그 생각이 예니세이에게도 닿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주먹을 꽉 쥐었다.
유리병을 쥔 손이 강물처럼 떨렸다.
“당신도 저처럼...”
“그런데 나는 내가 당한 건 화나지 않거든. 그런데 네가 당한 건 화가 나네?”
레이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의 크리터 공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과장된 몸짓으로 소리쳤다.
“크리터 공장! 예니세이를 괴롭히지 말란 말이야! 이 이기주의자들! 컨텐츠도 없으면서 동물 농장 노릇도 못하는...”
“레이섬.”
그녀를 노려봤다.
왠지 선을 넘을 것 같아서.
“어, 이 얘긴 하면 안되나?”
레이섬이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예니세이의 답답함을 레이섬이 대신 소리쳐 준 게 아닐까 싶었다.
어느새 붉은 머리 그녀는 앞머리를 넘겨 레이섬을 보았고.
“레이섬 씨는 자신에게 너무 관대한 거 아닌가요. 당신도 피해를 입은 건데요.”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나 레이섬은 팔짱을 낀 채 웃을 뿐이었다.
“그동안 내가 봐온 사람들은 저마다 성향이 달랐어. 난 그걸 필름으로 남기고 재미를 느끼지. 결과적으로 호러피디아의 방에서 있었던 일들은 재밌었어. 난 그거면 됐다고 생각해.”
“하지만 당신의 마도술을 이용하는….”
“예니세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 그래서 너 대신 화내주고 싶었어. 결국 너한텐 마도술 능력을 잃어가는 것이 중대 사항이었으니까!”
그녀의 이야기들이 특별한 이야기였던 건 아니다.
레이섬이 화를 낸 것도 임팩트가 있진 않았다.
오히려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예니세이에겐 꽤나 도움이 된 것 같았다.
“고마워요, 레이섬 씨.”
예니세이가 오랜만에 웃었다.
‘시대는 이성을 말하지만, 마도학자들에겐 여전히 감정적인 부분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보고서 마지막 줄에 사견을 추가했다.
[4월 12일 / 11:43 / 여행 가방 안 / 버틴의 집무실]
“뉴바벨 씨에겐 죄송하지만 크리터 공장의 오수 배출에 제약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버틴, 자네가 미움 받을지도 모르는데.”
“뉴바벨 씨가 그럴 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Z 씨.”
“인자한 사람이지. 하지만 동시에 탁월한 비즈니스맨이기도 해. 추후 자네 소대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네.”
“그런 거라면 제가 감수하겠습니다.”
통신기 너머로 Z 씨의 숨소리가 들렸다.
낮고 진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콧소리가 울리더니.
Z 씨의 웃음이 들렸다.
“Z 씨?”
“아, 미안하네 버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자네의 건의는 수용되지 않을 예정이야.”
웃음과 상반되는 결과가 들렸다.
“제 설득이 부족했던 건가요.”
되물었다.
그토록 감정적이지 않으려 했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다.
내게도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
예니세이 또한 그렇다.
그렇기에 더더욱 Z 씨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공장 가동과 관련된 것인 만큼, 법률적인 조치가 필요한 거니까.
그런데.
“버틴, 한 가지 알려주자면 뉴바벨 씨가 번 돈은 마도학자와 크리터 복지에 자선 사업의 일환으로 돌아가고 있어.”
“그 부분은 알고 있어요.”
“그렇지. 그런 사람이 마도학자들에게 불행을 끼치는 일을 두고만 보고 있진 않을 것 같네.”
“그 말씀은...”
“자네에게 라플라스 일원들이 갈 거야. 얘기해보는 게 좋을 것 같네.”
...
“알겠습니다.”
“보고서는 잘 받았네. 다음에 연락하지.”
‘똑똑’
Z 씨의 연락이 끝나자마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살폈다.
11시 45분.
점심 시간 전이다.
소네트인가?
“소네트?”
불렀지만 답이 없었다.
문 쪽으로 향했다.
손잡이를 당겼고.
틈 사이로 예니세이의 붉은 머리카락과 털모자가 들어왔다.
“아, 안녕하세요 버틴 씨. 그게...”
할 말이 있어 보였다.
평소라면 나를 찾아오지 않는 그녀다.
어쩐 일일까.
“지금 내줄 수 있는 건 없는데.”
다과가 놓여 있던 바구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들어있는 거라곤 탕약 캔디 뿐이다.
“아, 괜찮아요. 그냥 몇 가지 얘기를 하러 온 거라.”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우측 뒤편에 있어.”
“네.”
그녀가 접이식 의자를 가져왔다.
서로 마주보고 앉았고.
예니세이는 한참 동안 눈을 못 마주치다가 내게 그랬다.
“어제 Z 씨에게 연락을 받았어요.”
Z 씨가?
“얘기해줄 수 있어?”
“네. 뉴바벨 씨가 번 돈이 마도학자와 크리터들에게…. 기부금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요.”
방금 Z 씨가 전달한 내용 그대로였다.
예니세이에게도 전달된 건가.
“그래서?”
그녀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녀의 기부금 중 일부가 베스머트 씨를 찾는데 쓰인다는 걸 알게 됐어요.”
...
“물은 여행 가방 밖에도 많겠죠. 아직 제가 닿지 못한 강도 있을 거예요.”
그녀가 집무실 밖 테라스로 눈을 돌렸다.
소원의 샘이 물줄기를 내뿜고, 미세먼지 탑이 먼지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여행 가방 밖에서 새로운 강을 찾아볼까 해요.”
그녀가 서류를 하나 들이밀었다.
외근 신청서였다.
도장을 찍는 건 어렵지 않다.
Z 씨에게 보고하는 것도 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글자가...”
다만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녀는 일 처리에 있어선 능력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도 일단 알아보기가 어려우니 선뜻 넘길 수도 없었다.
“예니세이, 미안하지만 내가 소네트에게 부탁할 테니까 조금 더... 알아볼 수 있는 필기체로...”
서류를 반려하며 그녀에게 말하는 도중이었다.
노크 소리가 세 번 울렸다.
이번에야 말로 소네트일까 싶어서 말했다.
“들어와.”
그러나 문이 벌컥 열렸고.
들어온 건 히사베스와 메디슨 포켓이었다.
“어... 히사베스 씨?”
“안녕, 버틴! Z 씨에게 연락 받았을 거라 하더라고.”
“““버틴! 버틴이다!”””
히사베스 씨의 파란 머리카락에서 그녀의 가족들이 잔뜩 튀어나왔다.
“배, 뱀?”
예니세이가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가족들이 혓바닥을 낼름거릴 수록 더 그랬다.
메디슨 포켓은 팔짱을 낀 채, 문틀에 기대어 서 있었고.
히사베스 씨가 다가와서 두꺼운 보고서 뭉치를 내려놨다.
“대형 수질 정화 장치의 설계도와 보고서야. 뉴바벨 씨의 크리터 공장에 도입하기로 했는데 Z 씨가 네게 사본을 전해달라 하더라고.”
“수질 정화 장치?”
“그래! 오수 정화기 개발을 위해서 뉴바벨 씨가 라플라스에 거액을 후원했거든. 덕분에 연구소의 앞날이 아주 약간 밝아져서 다행이야. 안 그래? 메디슨 포켓.”
메디슨 포켓이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겠지. 덕분에 근무 시간이 일일 평균 3시간 18분 정도 늘어났더라고. 아주 좋아서 미쳐버리겠다니까.”
“좋다니 다행이네. 역시 진보를 위해 힘쓰는 훌륭한 동료들이라니까.”
“허.”
메디슨 포켓이 귀를 막고 문 너머로 사라졌다.
히사베스는 딱히 개의치 않고 예니세이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래서, 여기 계신 숙녀 분은 성함이...”
“예, 예니세이입니다.”
“아! 그 뉴바벨 씨가 미안해하던 친구가 너였구나?”
“뉴바벨 씨가요?”
“그래, 너 뿐만 아니라 그 자장가 부르는 친구나 인어 선생님께도 미안하다고 개발을 독촉했거든.”
“그런... 건가요.”
예니세이가 입술을 떨었다.
목소리가 흔들렸다.
품속에서 냅킨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아무래도 나갈 일이 생긴 것 같다.
재킷을 챙겨 입었다.
***
예니세이와 뉴바벨 씨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구체적으로 듣지 못했다.
두 사람은 어제 내가 서 있던 공장 옥상에 향했고.
나와 레이섬은 아래쪽 카페에서 홍차를 마시고 있었으니까.
“어젠 고마웠어. 덕분에 접견이 원활하게 이뤄진 것 같아.”
“고마울 게 뭐가 있어, 타임키퍼. 원래 돕고 사는 거지. 그래서 말인데... 혹시 마도학 소장품 관리부에 예산 좀 늘려줄 수 있어?”
“솔직해서 좋네.”
홍차를 마셨다.
씁쓸한 향이 났고.
홍차가 흔들리자 수면에 비치던 내 얼굴이 흐트러졌다.
“오! 타임키퍼. 저기 보여? 뉴바벨 씨가 예니세이를 쓰다듬어주고 있어.”
순간 레이섬이 신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덕분에 홍차가 허벅지에 쏟아졌다.
...
식어서 다행이었지만 옷은 빨아야 할 것 같다.
소네트에게 부탁해야겠네.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울 수 없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야. 누아르 감독님께 영화 소재로 써보라고 제안해봐야겠어.”
그래도 레이섬은 필름에 기억을 남기며 행복해 보였다.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지는 축축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사츠키, 여기 홍차 한 잔 더 줄래?”
“앗 소녀, 지금 만들겠습니다! 잠시만요!”
다음이 있으니까.
-Fin-
레이섬이 너무 좋다
개인스 안 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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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은 여유가 있어서 종종 올게! 1년 2개월 만인데 찾아와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