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3.2 IF 에필로그 (해피엔딩?)
폭풍우가 휩쓸고 간 파리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의 햇살이 들었다.
"좀 빨리빨리 올 수 없어, 펠리시엔느? 교통 체증에 파업까지...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늦는다구."
파리에서의 일상답게 교통 혼잡, 지하철 악취, 파업도 여전했다.
소소한 차이점이라면 이제는 환경단체 시위가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네가 두고 온 지갑 찾아서 지금 내려가고 있거든? 재촉하지 마!"
"헤헤, 미안해. 라뒤레 본점에서 좋은 자리 선점하고 두쫀쿠 마카롱 주문하려고 마음이 급했어."
"알고 있어. 가자. 오늘 네가 선택한 데이트 코스는 나쁘지 않아. 간신히 안 늦겠네."
그 말은 데이트의 기획자에게 크나큰 원동력이 됐다. 그녀는 차 문을 닫은 후 양팔을 벌리며 의기양양하게 시동을 걸었다.
"파리 전체가 내 머리 속에 있다니까~"
운전으로 신난 아델과 그런 아델의 표정을 살피는 펠리시엔느.
이 둘의 관계는 평화로워 보였다.
***
라뒤레 본점의 테라스는 평온했다. 창가로 스며드는 오후의 볕은 나른했고, 공기 중에는 갓 우려낸 웨딩 임페리얼 홍차의 향기가 감돌았다. 겉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헌신적인 수행원과 고귀한 아가씨의 모습이었다.
"자, 아~ 해봐 펠리."
펠리시엔느는 마치 훈련받은 강아지처럼 반사적으로 입술을 벌렸다. 달콤한 맛이 혀끝을 감돌았지만, 그녀는 맛을 음미하기보단 아델의 표정을 살피기에 급급했다.
"맛있어? 이게 요즘 유행하는 두쫀쿠 마카롱이래."
단 것을 좋아하는 펠리시엔느였지만, 도를 넘은 달콤함이었다. 대체 왜 이런 게 유행이지. 마카롱에 대한 모욕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응. 맛있어, 아델."
"다행이네. 서민적인 맛이라 입에 안 맞을까 봐 걱정했는데."
아델은 펠리시엔느의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엄지로 다정하게 훔쳐내고는 입에 넣어 음미했다.
"다음은 무엇을 먹어볼래?"
"...아델이 골라줘. 아델이 잘 알잖아."
"그치? 그러면 마카롱이랑 밀푀유를 시켜볼까나."
펠리시엔느는 아델이 잘라주는 음식을 먹고, 아델이 골라준 옷을 입었으며, 아델이 허락한 범위 내에서만 숨을 쉬었다.
그녀의 콧대 높던 긍지는 이제 잘 길들여진 애완동물의 눈치로 변질되어 있었다.
위계와 부채감에 의해 형성된 기형적인 관계.
아델은 펠리시엔느에게 애정을 아낌없이 퍼부었으나 특별한 보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때때로 펠리시엔느가 성미를 못 참고 본래의 까탈스러운 말투로 내뱉어도, 아델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처음 만났을 때 보여주었던 능글맞은 표정으로 응대하였다.
그래서 펠리시엔느는 두려웠다.
이 대가를 알 수 없는 사랑이.
오히려 펠리시엔느가 자발적으로 아델이 원하는 바를 탐색하고자 했다.
처음으로 아델을 위해 요리도 시도하고,
하인들의 전유물이었던 청소도 가끔 하였다.
부끄럽지만 화려한 속옷을 입고 먼저 나서서 잠자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아델은 기쁘게 받아주었으나, 그럼에도 진정한 속마음은 노출하지 않는 듯했다.
아델을 이용해 먹으려고 했던 펠리시엔느를 사랑해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진짜 사랑하기는 하는지. 모두 미스터리였다.
펠리시엔느는 이 기묘하게 뒤틀린 관계에서 단 하나가 궁금했었다.
***
궁금증을 해결해줄 계기는 어느 날 아델의 집에서의 티타임 이후 찾아왔다.
"아델, 나... 심심해."
"잠깐만 기다려줘 펠리시엔느. 설거지만 끝내고 놀아줄게."
아델이 빈 찻잔을 들고 주방으로 사라지자, 펠리시엔느는 불안해졌다. 혼자 남겨지는 침묵이 견딜 수 없이 무거웠다.
'나도... 도움이 되어야 해.'
가만히 있는 인형은 언젠가 싫증 나기 마련이다. 펠리시엔느는 아델에게 자신의 쓸모라도 증명하고 싶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서재로 들어갔다.
먼지 쌓인 책장을 닦아내던 펠리시엔느의 손끝에 익숙한 서적 하나가 걸렸다.
<고등 마법의 교리와 의식>이었다.
펠리시엔느는 아델이 점술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장 이 책만 해도 아델이 '가문의 저주'와 관련된 단어만 찾아서 빨간 밑줄 그어둔 책이었다.
둘의 만남 초창기 때 기억이 떠오른 펠리시엔느는 추억을 되새길 겸 책을 펼쳐보았다. 익숙한 빨간 밑줄들에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하지만 노란색 밑줄들은 최근에 새겨진 필적이었다. 이들은 모두 죽은 자의 소생, 기사회생술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아델이 왜 기사회생술을...'
의문을 채 완성하기도 전에 사진 하나가 떨어졌다.
[생일 축하해 브륌므!
셀리아
1922.12.19]
사진 속에는 어린 아델과, 그녀의 어깨동무를 한 주근깨 투성이의 소녀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셀리아. 아델의 절친한 소꿉친구.
그리고 펠리시엔느가 살해한 기사회생술 과정의 희생자였다.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망각하고 있었던 악행의 기억이 펠리시엔느를 덮쳐왔다.
아델의 다정함 뒤에 숨겨진 그림자가, 언제든 자신을 삼킬 수 있는 명분이 이 종이 한 장에 담겨 있었다.
깨달음과 두려움이 동시에 척추를 타고 올랐다. 아델이 가끔 허공을 응시할 때마다 이 죽은 여자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닐까.
"펠리시엔느, 어디에 있나 했더니 서재에 있었던 거야? 청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는데."
애써 회피하던 진실을 마주할 순간이 다가왔음을 펠리시엔느는 직감했다.
***
찌이이익-
불길한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서재에 울려 퍼졌다. 아델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끼익 소리보다도 선명했다.
펠리시엔느를 찾아 서재로 들어온 아델은 펠리시엔느가 어떤 사진을 찢는 광경을 목격했다.
펠리시엔느의 뒷모습만으로는 실수인지 의도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 사진이 너무나도 소중한 셀리아와의 추억이 담긴 사진이었다는 사실이다.
"펠리시엔느.... 뭐야 왜 사진을 찢어...?"
"..."
"도대체 왜... 나에게 소중한 사진을..."
아델은 펠리시엔느를 똑바로 쳐다보며 해명을 요구했다. 설명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당혹감으로 쿵쾅거리는 심장에 아델은 차분히 생각할 수 없었다. 대체 펠리시엔느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
[선택 A]
"미, 미안해... 실수였어...."
"어? 뭐라고?"
펠리시엔느는 사색이 되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사진 조각을 허겁지겁 주워 모으는 손이 덜덜 떨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아델에게 유일하게 남은 추억을 제 손으로 망가뜨렸다. 자신이 죽을까봐 겁이 난 것이 아니었다. 아델이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것이 더 두려웠다.
"아, 아델... 아니야... 내가 그러려던 게 아니라..."
"......"
"실수야... 정말 미안해... 내가 감히..."
지금까지 펠리시엔느가 궁금한 것은 단 하나였다.
'내가 용서받을 수 있을까?'
자신은 악인이었다.
자신의 부활을 위해 아델을 이용하고 그녀의 육체를 강탈했으며, 그 과정에서 소중한 친구를 살해했다.
그런 그녀를 아델은 구해주고, 보살펴주고, 사랑해주었다.
과분한 사랑이었다.
아델 곁에서 오래 지내면서 깨달았다.
아델은 심성이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었고, 펠리시엔느는 그런 그녀에게 저지른 악행들이 부끄러웠다.
아델의 심성에 영향 받은 펠리시엔느는 자신도 베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셀리아의 사진을 보았을 때 그 희망이 얼마나 주제에 넘치는지 깨달았다.
자신은 모험가와 순진무구한 공주 사이에 난입한 악당에 불과했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사진 위를 적셨다. 펠리시엔느는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흐느꼈다. 아델이 자신을 경멸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 펠리시엔느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펠리."
움츠러든 어깨 위로 따스한 손길이 닿았다. 아델은 펠리시엔느의 손에서 구겨진 사진 조각을 부드럽게 빼냈다. 그리고 그것을 탁자 위에 엎어두었다.
"아델...?"
"괜찮아. 울지 마."
아델은 펠리시엔느를 일으켜 품에 꽉 안았다. 규칙적인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마도술로 복구하면 되잖아. 오직 진실만이 거짓을 정화하리라. 봐봐 감쪽같지?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됐어."
"하지만... 내가 셀리아를..."
"쉿. 과거는 흘려보내자."
아델은 펠리시엔느의 젖은 눈가를 엄지로 쓸어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우리는 미래를 개척해나갈 거잖아, 너와 내가 함께. 그거면 충분해."
"미안해 아델... 전부 내 잘못인데..."
"아니야 펠리시엔느, 나는 믿어. 네가 바뀔 수 있다고. 바뀌고 있다고."
펠리시엔느는 아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이 품 안에서라면 바롱 가문의 집착도, 죄책감도 모두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사랑해 아델..."
"응 나도야, 펠리시엔느."
폭풍우는 지나갔다. 두 사람은 비로소 서로의 온기 속에서 완전한 안식을 찾았다.
[흘러가는 축제 IF, Ending A.]
***
[선택 B]
"일부러 그랬어."
"....뭐?"
펠리시엔느는 뻔뻔하게 도발했다. 그녀는 짐짓 오만한 척 찢어진 사진을 꽉 쥐었다.
"셀리아는 돌아올 수 없어. 잊었어 아델? 너는 셀리아를 두고 나를 살리는 걸 선택했잖아."
아델이 천천히 다가왔다. 거친 손길이 펠리시엔느의 가녀린 손목을 낚아챘다. 억지로 손을 펴게 해 구겨진 사진 조각을 빼앗아 든 아델은, 망설임 없이 손을 휘둘렀다.
짝-!
마른 마찰음이 서재를 갈랐다.
고개가 돌아간 펠리시엔느는 비틀거리며 책장에 등을 부딪쳤다. 뺨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평생 경험해본 적 없는 폭력이었지만, 펠리시엔느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멍한 눈으로 아델을 올려다보았다.
아델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펠리시엔느의 턱을 거칠게 잡아 올렸다.
"주제 파악해, 펠리시엔느."
"으으윽..."
"내 추억을 건드릴 자격이 너한테 있다고 생각했어? 아직도 네가 대단한 바롱 가문의 고용주로 보여?"
펠리시엔느의 손목을 붙잡은 아델의 손아귀 힘이 강해졌다. 펠리시엔느의 하얀 볼에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시 말하지만, 넌 내가 살려두고 사랑해줘서 여기 있는 거야. 건방 떨지 마."
경멸과 소유욕이 뒤섞인 그 눈동자. 그 서슬 퍼런 살기 앞에서, 기이하게도 펠리시엔느의 심장은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지금까지 펠리시엔느가 궁금한 것은 단 하나였다.
'내가 버려지지는 않을까?'
자신은 아델의 전리품이었다.
아델의 흥미가 다하는 즉시 그 용도도 증발하는 것이다. 목적을 잃은 인형이 어떻게 될지는 뻔하다.
그러나 아델은 화를 내고 있다.
'아... 다행이다.'
분노한 이유는 자신에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실망은 아델이 펠리시엔느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다. 아직은.
그러니 죽은 셀리아 때문에 펠리시엔느를 내치거나 죽이지 않았다. 그저 '훈육'할 뿐이다.
펠리시엔느는 얼얼한 뺨을 제 손으로 감싸 쥐었다. 통증이 선명할수록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꼈다. 아델이 주는 이 고통이야말로 그녀가 아델의 소유물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명서였다.
"잘못했어... 아델."
펠리시엔느는 무너지듯 주저앉아 아델의 다리에 매달렸다. 그리고 비릿한 안도감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젖은 눈으로 아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버리지 마... 계속 나를 사랑해줘..."
결투 이후 아델에게 매달렸던 비굴한 순간이 떠오른다. 그날 아델의 고요한 품속에서 느꼈던 안도감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중독될 정도로 달콤한 감정이었다.
지극히 자기파괴적인 행태였다.
그러나 펠리시엔느는 알았다. 자신은 몇 번이고 아델의 사랑을 재확인할 것이다. 가장 잔인하고 미련한 방법으로.
아델은 발치에 엎드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폭풍우는 끝났지만, 펠리시엔느는 영원히 그 폭풍의 눈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목줄을 쥐고 아델의 손에 쥐어주었다.
[흘러가는 축제 IF, Ending B.]
아아아 너무 맛있어
오우
너무.......너무맛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