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펠리시엔느×아델 프랑스혁명 시대 배경 평행우주임
1.
"좀 빨리빨리 갈 수 없어, 아델? 진흙길에 구걸꾼들까지... 정말 지긋지긋하네!"
"올해도 흉년이라서 어쩔 수 없대. 적어도 베르사유에는 거의 도착했잖아... 삼부회 시작 전에는 도착할 거야"
부르봉 왕조의 위세가 황혼을 향해 달려가던 18세기말, 프랑스 전역은 억압과 모순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리의 오후는 평화로웠다. 적어도 펠리시엔느 바롱의 마차 안에서는 그랬다.
"그래 그래 아델, 그치만 늦으면 각오해야 할 거야. 자 아~ 해봐 마카롱 여기 있어."
펠리시엔느가 건넨 것은 내로라하는 귀족들 사이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는 왕실 마카롱이었다. 아델은 펠리시엔느가 주는 마카롱을 받아먹고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보는 펠리시엔느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오만하고 권태로워 보였다.
"고마워, 공녀님."
"운전이나 똑바로 해. 흘리지 말고 먹고. 그리고 몇 번을 말해? 공녀님말고 이름으로 부르라니까?"
"... 응, 펠리시엔느."
아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마카롱을 한입 베어 물었다. 달콤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설탕과 아몬드의 풍미.
하지만 아델의 주머니 속에는 그 달콤함과는 정반대인 물건이 들어 있었다.
펠리시엔느의 집무실에서 빼돌린 주요 보급창고 위치 정보였다.
아델의 접근 목적은 명확했다.
프랑스 귀족사회의 중추, 대명문가 바롱 공작가에 잠입하여 혁명에 필요한 정보를 빼내는 것.
지방의 남작가 영애들조차 '성격이 지랄맞다'며 혀를 내두르는 그녀의 시녀 겸 마차기사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다행히 펠리시엔느가 아델 특유의 싹싹함과 인내심을 높게 평가했는지 그녀의 곁에 머물 자격을 부여해주었다.
혁명 선배들은 말했다.
프랑스의 체제 모순에 수많은 민중이 앓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누군가는 화려한 무대 뒤편,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묵묵히 땀과 피를 흘려야 한다고.
아델은 극히 공감했다. 순전히 철없는 귀족 영애의 호기심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아델 스스로는 유서 깊은 타베르니에 가문 출신이었다. 대명문가 중에서도 으뜸, 왕가와도 통혼한 '바롱' 공가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먹고 살고 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아델은 보석사냥꾼으로 일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프랑스의 현실을 목격했다.
화려한 베르사유의 불빛 아래에서 썩어가는 파리의 빈민들을. 빵 한 조각을 위해 진흙탕을 구르는 아이들을.
보석을 찾는다고 해서 이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혁명에 투신했다. 배부른 귀족들이 아닌 만인을 위해.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혁명의 적인 펠리시엔느가 주는 마카롱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
2.
소득 없이 변변치 않은 정보들만 수집하는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밤, 예고 없이 기회가 찾아왔다.
"아델, 마카롱 가져와, <고등 마법의 교리와 의식> 서적이 집무실에 있는지 확인도 해줘."
서재의 소파에 길게 누워 독서를 즐기던 펠리시엔느가 나른하게 명령했다.
아델은 주방에서 갓 구운 마카롱을 챙겨 들고 집무실로 향했다. 익숙한 공간에서 펠리시엔느의 책을 찾는 것은 금방이었다.
"보자, 고등 마법 책 여기에 있는 거 맞네."
서적을 챙겨서 나가려던 찰나, 아델의 시선이 탁상 한구석에 머물렀다. 서류 더미 사이로 삐져나온 종이에 선명한 왕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불순분자 색출 및 긴급 체포 계획안』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제목이었다. '불순분자'. 그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이 자신과 혁명 동지들이라는 것은 자명했다.
아델은 침을 꼴깍 삼키며,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문서를 넘겼다.
펠리시엔느가 검토 중이었는지 곳곳에 붉은 잉크로 수정된 흔적이 있었고 몇몇 페이지는 누락되어 있었다. 다행히 '아델 타베르니에'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장을 넘긴 아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혁명 동지의 코드명, 심지어 몇몇은 본명까지 적나라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체포안이 집행되는 순간 조직은 와해될 것이 뻔했다.
아델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알리지 않으면... 모두가 바스티유의 이슬로 사라질 거야.'
이 정보를 미리 전달하기만 한다면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아델은 품에 숨겨두었던 피리를 통해 특별 훈련된 전서구를 호출했다. 좁은 관에 급히 베껴 쓴 암호를 넣고 카타콤의 혁명 본부를 향해 날려 보냈다.
푸르르-
비둘기가 파리의 하늘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아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실수였는지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3.
평화로웠던 오후는 근위척탄병들의 군화 소리와 함께 깨졌다.
쾅-!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리고 척탄병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그 뒤로 서늘한 인상의 남자가 들어왔다. 악명 높은 경찰장관, 조지프 푸셰였다.
그 순간 아델은 깨달았다.
'아 자신의 임무는 끝났구나,'
'쾅 소리 단 하나와 함께,'
'흐느낄 틈조차 없이.'
건장한 척탄병들이 아델을 제압하고 밧줄로 묶기 시작했다.
"아델 타베르니에, 널 반역 혐의로 체포한다."
바닥에 얼굴이 짓눌린 채 아델은 자책했다. 안일했다. 펠리시엔느가 허술해 보인다고 해서 방심해서는 안 됐다.
'나를 시험한 거였어. 보기 좋게 걸려들었구나.'
애초에 펠리시엔느가 이리 안일하게 기밀 문건을 빙치할 리가 없었는데.
펠리시엔느 바롱,
바롱 공작가의 공녀. 번개의 사제, 루이 16세의 총신, 파리 사교계의 중심,
왕과 그의 최측근들로 구성된 "재건의 손" 기사단의 일원,
구체제의 상징 그 자체였다.
때때로 그녀가 보여준 친절에 홀랑 넘어가버린 것이 패착이었다.
아델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자신에 대한 체포를 순순히 받아들이려던 찰나였다.
"뭐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집무실을 갈랐다.
"괜찮으십니까 공녀님?"
"아니 안 괜찮은데?"
"역시 이 무뢰배가 펠리시엔느님에게 위해를 가하고 있었군요! 하지만 이제 체포했으니-"
"아니, 내 시녀말고 너 때문에 안 괜찮다고. 조지프 푸셰, 내 말 못 알아 듣겠어?"
"공녀님?"
펠리시엔느가 부채를 탁 접으며 척탄병들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눈빛에는 서슬 퍼런 살기가 감돌았다.
"당장 친애하는 내 아델에서 손 떼. 너 따위가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아니면 너랑 네 떨거지들 바로 전기로 지져버릴 테니까."
아델은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필리시엔느가 자신을 보호하는 거지?
혼란스러운 것은 경찰장관도 마찬가지였다.
"공녀님....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무슨 오해?"
"공녀님께 공유드린 보고서를 허가받지 않은 자가 건드린 것을 확인했습니다. 보안용으로 걸어둔 마도술에 따르면 그것이 아델 타베르니에의 흔적임을 확인했습니다. 실제로 관련 내용이 반동분자 세력들에게 흘러간 것을 확인했고요."
푸셰는 물러서지 않고 증거를 들이밀었다. 아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었다.
가만히 들어주던 펠리시엔느가 물었다.
"아델이 혁명측과 내통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있어?"
"아니요 없습니다만... 이 정도의 기밀 문서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펠리시엔느님의 시녀인 아델밖에 없습니다."
"그건 네 망상이고, 네가 무능해서 진짜 밀정을 못 찾는 거겠지."
자신에 대한 지적에 경찰장관은 발끈했다.
"하지만 기밀 문건을 건드린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거 내가 시킨 거야."
"?!?"
아델은 물론이고 푸셰마저 경악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네? 잘못 들었습니다만... ?"
"목욕하면서 서류를 보려는데 물에 젖으면 안 되니까 아델 보고 들어달라고 했어. 그리고말야 아델의 시간은 내가 샀어. 파리 어디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함께 가주는 게 바로 아델의 할 일이야. 그러니 반동분자 따위와 접촉할 시간 따위는 없어."
뻔뻔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펠리시엔느의 태도는 너무나도 당당해서, 마치 거짓말이 진실이 되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 사실이 맞나?"
못마땅한 표정으로 경찰장관이 아델에게 물었다. 그러나 펠리시엔느는 답을 들을 틈조차 주지 않았다.
"너, 내가 너따위한테 거짓말까지 할 거 같아? 내가 우스워? 오늘 한번 바스티유로 쳐들어가서 다 뒤집어엎어줄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알아들었으면 썩 꺼져."
혁명가들의 도살자, 천하의 조지프 푸셰도 바롱 가문의 위세 앞에서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척탄병들이 물러가고 집무실에 어색한 고요함만이 남았다.
"하아, 멍청이들 때문에 피곤해졌어. 목욕이나 해야겠네."
"으, 응... 메이드들을 불러올게."
"아니 됐어. 대신 아델, 욕조로 따라와."
"...어?"
"욕조. 너도 같이."
***
4.
걱정(?)하던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펠리시엔느는 아델에게 등을 내밀며 씻겨달라고 했을 뿐이다.
따뜻한 물이 찰랑거리는 욕조 안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어후, 이제야 스트레스가 좀 풀리네."
"저기...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
"흥, 알면 됐어."
아델은 젖은 수건으로 펠리시엔느의 어깨를 닦으며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있잖아 펠리... 아까 경찰장관이 말한 거 전부 오해야... 내가 네 서류를 건드린 건 맞는데, 그건 정리하다가 실수로..."
변명을 해야 했다. 의심을 거두게 해야 했다. 하지만 펠리시엔느는 아델의 말을 자르듯 돌아보았다.
"맹세할 수 있어?"
".... 응 맹세할게. 타베르니에 가문의 이름을 걸고."
"그래? 알았어."
펠리시엔느는 손가락으로 욕조의 물을 툭 건드렸다.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아델의 어설픈 맹세를 덮었다.
너무나도 순순한 납득이었다. 의심도, 반문도 없는 그 목소리가 자욱한 수증기 사이로 힘없이 흩어졌다. 펠리시엔느는 아델의 거짓말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삼켜버리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보였다.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그 고요한 얼굴에 아델은 목이 메었다.
"펠리시엔느?"
"아델, 조심해."
펠리시엔느의 젖은 손이 아델의 뺨을 감쌌다. 그녀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깊고, 어딘가 슬퍼 보였다.
"네가 없으면 누가 내 마차를 몰아주니?"
그리고 입술이 닿았다.
마카롱보다 더 부드럽고, 녹아내릴 듯한 키스였다.
아델은 멍해진 머리로 생각했다.
이것은 경고일까, 아니면 용서일까.
***
5.
아델은 그날 키스의 의미가 궁금했으나.
낯부끄처워서 차마 묻지 못했다.
"아델, 빨리빨리 안 와?"
그리고 펠리시엔느도 평소와 같이 대하니, 혹시 그날의 기억이 자신의 착각은 아니었을지 의심되었다.
세찬 심창 박동과 목욕물의 열기로 인한 피곤함에 기억이 왜곡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아델은 그날의 키스를 그저 귀족 아가씨의 변덕이라 생각하기로 애써 마음먹었다.
***
6.
펠리시엔느의 보호로 혐의는 벗어났지만, 혁명은 계속되어야 했다.
여의치 않으면 바롱 가문에서의 공작은 종료하고, 안전한 시골로 대피하자는 동료들의 의견도 있었다.
아델은 고심 끝에 거절했다.
펠리시엔느의 어깨 넘어 엿볼 수 있는 정보들은 혁명 동지들의 안위와 혁명 성공에 너무나도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펠리시엔느는 이따금 중요한 기밀정보를 아무렇지도 않게 흘렸다. 마치 아델이 듣기 바라는 것처럼.
"아델, 한 입 먹어봐. 이게 자허 도르테 케이크야. 외무장관 탈레랑이 오스트리아에서 동맹 협상하고 가져왔다네."
"아델, 오를레앙 방문은 취소해줘. 다음주에 군부에서 소탕 작전을 할 거라 재미 없을 거야."
아델은 펠리시엔느가 흘려말하는 정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만 선별해서 혁명 동지들에게 전달했다.
그렇게 혁명동지들은 수사망과 토벌을 회피하고 역으로 정부측 조세선을 터는 등 물자를 보급할 수 있었다.
계속되는 문건 유출에도 아델이 무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경찰장관 조제프 푸셰의 실각이 있었다.
펠리시엔느가 무능을 이유로 경찰장관 조제프 푸셰를 사임시켰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관련 수뇌부 전부를 날려버렸다.
새삼 프랑스 귀족의 수장, 바롱 가문의 위세를 체감할 수 있었다.
혁명파를 철저하고 무자비하게 짗밟던 경찰 수뇌부가 마비되자 혁명의 불길는 겉잡을 수 없이 퍼졌다.
지방 널리 뿌리잡은 씨앗은 마침내 파리에 도달에서 발아했다.
1789년 7월 14일.
시민들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은 혁명의 봉화를 울렸다.
왕정은 무너졌고, 왕의 목이 떨어졌다.
그리고 왕가의 최측근이자 혁명의 적으로 지목된 펠리시엔느 바롱 역시 그 불길을 피할 수 없었다.
그녀는 구체제의 부역자로서 체포되어 바스티유 감옥 지하에 수감되었다.
***
7.
차가운 바스티유 지하 감옥.
습기와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그녀와는 털끝만큼도 어울리지 않는 불결한 공간이었다.
펠리시엔느는 차가운 돌벽에 힘없이 기대어 있었다. 한때 파리의 사교계를 주름잡던 화려한 드레스는 오물로 얼룩졌고, 생기 넘치던 볼은 야위어 있었다.
"혁명영웅 아델 타베르니에께서 여기는 무슨 일이야?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올리며 말했다. 탈진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아델이 자주 보던 표정이었다. 익숙한 오만하고 당당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비아냥거림에도 아델은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짓이겨지는 듯 아팠다.
"왜 그랬어..."
아델은 차가운 철창을 꽉 움켜쥐며 물었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왜 그랬냐고...!"
혁명 7일차, 펠리시엔느를 압송하고 바롱 공작가가 약탈당한 날, 아델은 문서고에서 하나의 문건을 발견했다.
『코드명 브룸, 불순분자 주요 인사 중 하나로 특기는 첩보 및 정보 획득. 정황상 아벨 타베르니에로 추정됨.』
펠리시엔느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첩자라는 것도, 혁명을 위해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도.
그녀는 알면서도 속아주었고, 이용당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했다. 펠리시엔느의 침묵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감옥에 갇혀 있을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아델 자신이었을 것이다.
아델은 펠리시엔느의 입으로 직접 답을 듣고 싶었다.
"안 알려주면, 고문이라도 하려고? 혁명군들은 그런 걸 좋아한다며."
단순하고 질 나쁜 농담이었으나, 아델은 죄책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말아 줘."
"싱겁기는."
펠리시엔느는 권태롭다는 듯, 힘빠진 웃음을 흘렸다.
무거운 침묵이 좁은 감옥을 맴돌았다. 마침내 펠리시엔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그랬냐고 물었지...?"
"......"
"네가 떠날까 봐."
"...그게 무슨 뜻이야?"
"나한테서 정보를 얻지 못하면, 너는 더 쓸모 있거나... 입 싸고 쉬운 계집애들한테 가버릴 거잖아."
펠리시엔느의 시선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게 싫었어. 네가 다른 멍청한 년들에게 살갑게 구는 게. 나를 두고 떠나는 게... 죽기보다 싫었어."
아둔하게도 아델은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의 변덕, 이유 없는 마카롱 선물, 거짓말해준 알리바이, 그리고 욕조에서의 키스까지.
"지루하기 짝이없는 내 인생에서 유일한 의미는 너와 친구를 한 거였어."
펠리시엔느는 자신의 방식대로, 온 마음을 다해 아델을 사랑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문이 무너지고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순간까지도, 그녀에게 중요한 건 오직 아델의 곁에 머무는 것뿐이었다.
"아델... 소원이 있어.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이제 나한테 이용 가치도 없다는 것도."
아델은 자신의 미련함에 끝내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신 역시 펠리시엔느를 사랑하고 있었다. 혁명이라는 대의명분에 눈이 멀었을 뿐, 그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러니 많이 바라지도 않을게. 오늘 밤... 딱 하루만 나랑 같이 있어 줘."
펠리시엔느가 철창 사이로 앙상해진 손을 뻗어 아델의 옷깃을 잡았다. 바롱 공작가의 긍지 높은 공녀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구걸하듯 애원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목숨도 아닌, 고작 아델과의 하룻밤을 위해서.
아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등 뒤, 저 지상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이룩한 혁명이 있었지만,
정작 자신의 영혼을 바쳐 지키고 싶은 사랑은 차가운 철창 너머에 있었다.
혁명과 사랑. 두 개의 세계가 아델의 안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
[엔딩 A. 혁명]
혁명 만세 (Vive la Révolution)
아델은 펠리시엔느와 아침까지 함께 있었다.
처형장으로 향하는 호송 마차, 그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날 잊지 마, 아델."
펠리시엔느가 아델의 손에 쥐여준 것은 가문의 가보, '프렌치 블루' 다이아몬드였다.
그 차가운 보석의 감촉과 마지막 유언. 그것이 전부였다.
그 외의 기억은 거짓말처럼 하얗게 증발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지은 표정이 어땠더라.
그 짧은 밤 동안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나.
나는 울었던가, 아니면 웃어주었던가.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나 큰 고통은 기억조차 삼켜버리는 법이니까.
그렇기에 아델은 기억나지 않는 그날 밤을 평생도록 그리워했다.
그 이후, 아델 타베르니에는 혁명의 주역으로서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그녀가 사랑을 희생시키며 지킨 혁명은 불멸이 아니었다.
아델과 동료들이 피로 쓴 역사는 잉크보다 빨리 바랬다.
혁명은 공포 정치를 낳았고, 단두대의 피 냄새가 가시기도 전에 황제가 즉위했다. 왕정이 복고되었다가 다시 공화국이 들어서고, 또다시 보나파르트의 조카가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최초의 대통령이 최후의 황제가 되었다.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돌고 돌았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세상은 그렇게나 요란하게 변해가는데.
오직 펠리시엔느만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델은 화려한 집무실 창가에 앉아, 변해가는 파리의 거리를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나는 무엇을 바라
그녀도 없이 홀로 침전하고 있는 것일까.'
시대의 영웅이라 칭송받는 삶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려 보아도, 그녀 없는 아침은 진정한 아침이 아니었다.
정치와 세상에 환멸을 느낀 아델은 어느 순간부터 칩거하며 기사회생술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생각의 바다' 어딘가에 그녀가 남아있을 거라는 주장.
마도술로 그녀를 다시 불러올 수 있다는 헛된 믿음. 세간은 영웅이 미쳤다고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그 광기 어린 연구조차 없었다면, 아델은 펠리시엔느가 부재한 이 지옥 같은 세상 따위, 미련 없이 떠났을 것이다.
그녀는 여생을 그 실낱같은 희망 하나에 묶여 살았다.
언젠가는 생각의 바다에서 펠리시엔느를 건져 올리고, 새로 발명된 라뒤레 마카롱을 건네며 뒤늦은 사과를 하는 꿈.
하지만 그런 미래는 끝내 오지 않았다.
마침내 아델 타베르니에가 눈을 감던 날.
백발의 노인이 된 그녀가 남긴 유언은 단 세 단어였다.
"프랑스, 혁명, ...펠리시엔느."
그녀가 묻힌 페르 라셰즈 묘지의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아델 타베르니에 (1766 - 1862)
폭정으로부터 프랑스와 시민을 구했다.
그녀는 만인을 구원한 영웅으로 역사에 남았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자기 자신의 영혼은 구하지 못한 채 잠들었을 뿐이다.
***
[엔딩 B. 사랑]
사랑한다는 것은 사는 것이다 (Aimer, c'est vivre)
"무슨 생각해? 간수들 올 시간 다 됐어."
아델은 펠리시엔느의 손을 꽉 잡았다.
칭송, 명예, 세상을 바꿀 기회?
눈앞의 이 오만하고 도도한 여자가 없다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일어나, 펠리. 나가자."
"뭐? 지금 나가면 너도 반동세력으로..."
"상관없어. 어차피 나는 네 운전기사잖아. 네가 가는 곳은 어디든 같이 가야지."
아델은 간수에게 자신이 펠리시엔느를 이송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거잣말을 했다. 감옥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어둠을 틈타 바스티유의 하수구를 통해 탈출했다. 더럽고 냄새나는 길이었지만, 펠리시엔느는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아델의 손을 잡고 있었으니까.
새벽의 칼레 항구.
영국으로 밀항하는 배편에 두 사람이 몸을 실었다. 최종 목적지는 신대륙, 퀘벡이었다.
대서양을 건너는 긴 항해의 밤, 갑판 위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쏟아지는 별빛 아래서 아델은 주머니 속의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게 뭐야?"
펠리시엔느가 퉁명스럽게 물었지만, 눈길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아델이 상자를 열자, 밤바다보다 깊고 푸른 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그것은 바롱 가문의 가보, '프렌치 블루'였다.
하지만 더 이상 하나의 거대한 원석이 아니었다. 정교하게 둘로 쪼개져, 서로 다른 두 개의 은반지 위에 박혀 있었다.
"너... 미쳤어?! 가문의 가보를 반 토막 낸 거야?"
펠리시엔느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아델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크면 도망 다닐 때 눈에 띄잖아. 그리고..."
아델은 반지 하나를 집어 펠리시엔느의 왼손 약지에 끼워주었다.
"이제 '바롱 공작가'는 없어. 그러니까 이 보석도 혼자 무거울 필요 없지. 반은 네가, 반은 내가. 이제 우리 운명처럼 공평하게 나누는 거야."
"...건방져, 아델 타베르니에."
펠리시엔느는 투덜거렸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약지에서 빛나는 푸른 보석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녀는 남은 반지를 집어 아델의 손에 거칠게 끼워주었다.
"영광으로 알라고. 감히 공녀님의 가보를 나눠 가진 도둑놈은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니까."
"네네, 명심하겠습니다. 나의 공녀님."
"공녀님은 무슨. 자유, 평등, 박애에 따르면 신분같은 건 없다며?"
"맞아. 덕분에 내가 감히 너를 평생 독점하겠다는 욕심을 부려도, 더 이상 반역죄는 아닐 테니까."
바닷바람이 펠리시엔느의 머리카락을 흩트려놓았다. 아델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눈을 맞췄다.
"주례도, 하객도 없지만... 이번에는 진심으로 맹세할게. 펠리."
아델은 펠리시엔느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항해의 끝이 어디든, 가난하든 병들든, 다시는 널 혼자 두지 않아. 네가 가는 곳이 곧 내 세상이야."
그것은 세상 그 어떤 성대한 결혼식보다 진실된 서약이었다.
펠리시엔느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훌쩍이며 아델의 멱살을 끌어당겼다.
"당연하지. 넌 내 운전기사고, 내 집사고, 내... 연인이니까. 죽을 때까지 나만 모시도록 해."
"기꺼이."
두 사람은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입술이 맞닿는 순간, 거친 파도 소리는 축복의 찬가처럼, 밤하늘의 별들은 하객처럼 두 사람의 앞날을 비추었다.
더 이상 혁명도, 신분도 없는 그곳에서, 두 사람은 비로소 온전한 하나가 되었다.
역사책에서 '아델 타베르니에'는 혁명 전야에 실종된 비운의 영웅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대서양 건너 퀘벡의 어느 작은 마을에는, 성질 고약한 아내에게 꼼짝 못 하면서도 매일 마카롱을 구워주는 빵집 주인의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
어흑...어흐흐흑...
정말 좋은 이야기야.,..
아델펠리는 본편에서부터 끝까지 해피/배드 엔딩 줄타기를 했었어 양쪽 모두 생각나고, 양쪽 모두 짜릿한 거 같아
역알못인데도 하나씩 찾아보면서 재미잇게 읽엇서 이거 맛잇네요
재미있었다니 다행이야, 나도 하니씩 찾아보면서 썼어ㅋㅋ 역사적 소재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몰입감, 모르는 사람에게는 시대적 분위기는 잘 느껴지면서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방해되지 않는 선이 목적이었어.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아델×펠리시엔느 영원하라~
글진짜잘쓰신다 겁나몰입하면서봄 ㄷㄷ 나중에 이걸로 그림그려서 여기 올려도 되나요?
!!!!! 재미있게 읽어준 것도 감사한데 그림까지 그려주면 너무 황송하죠 ㅠㅠㅠㅠㅠ
어지간한 소설들 다 봐왔지만, 이번건 꽤나 인-상 적이군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