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버스: 1999의 설정 및 대사를 각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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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군인의 아침은 새벽에 시작된다. 해가 떠올라 밤을 밝히듯 목숨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도 그러했다. 승리가 아직 지척에 떠돌고 있는 듯 어색하고도 무감각한 아침이었다. 몸의 감각을 깨우기 위해 이고르와 그의 딸 몰디르는 오트밀 죽을 입으로 밀어넣었다. 오트밀 죽의 따스한 기운이 느리게 군인의 몸을 깨워갔다. 그들이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햇살은 구름 사이를 비집고 돋아났다. 오트밀 죽을 담았던 빈 그릇에 또 다른 것이 채워졌다. 그들은 그릇에 비치는 햇살을 보며 비로소 새 아침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큰 전쟁이 끝나고 맞이하는 평화로운 아침은 긴장이 풀린, 나른한 찬사 같았다. 얼마 전, 크루토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았더라면 아침을 맞이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들이 이토록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버틴, 그녀의 덕분도 있었다. 전쟁을 마치고 이고르의 그리폰 군단이 재단의 눈을 피해 쉴 수 있는 곳은 버틴의 가방 안 밖에 없었다. 더 이상의 무의미한 희생을 막기 위해 버틴은 대규모 전송 술진으로 인해 쇠약해진 이고르와 적지 않은 희생을 치룬 그의 군대를 가방에 들였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함께 힘을 합쳐 크루토프를 저지했지만 그들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기에, 여전히 오해는 풀리지 않고 남아있었다. 이제 가족 간에 그어진 분단선을 지울 차례였다.


  로페라는 아직 그들과 마주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갑작스러운 배신에 혼자가 된 자신, 자신을 보호하고자 소속에 편입되려는 몸부림, 또다시 시작되는 낯선 이들과의 협력, 이러한 수순에는 이제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지만 지금 이런 협력은 그녀에게 전혀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로페라는 착잡한 심정을 갖고 아침을 맞이했다. 그들의 가족이었던 만큼 그녀는 몸에 밴 군인의 습관을 따라 아침 식사를 하러 주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주방에 그녀의 자리는 없었다. 이미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그녀는 발길을 돌렸다. 그녀는 간신히 묻어두었던 뒤틀렸던 심정이 파헤쳐지는 기분이었다. 몰디르는 벽 모퉁이를 도는 그녀의 오렌지 머리를 보았다. 아직 자리에는 자신의 아버지가 있었지만, 여기서 그녀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따라오지 마.”
  로페라는 자신의 언니였던 이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알았다.
  로페라의 단호한 목소리에 몰디르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페라...”
  한때, 가족이었던 이가 부르던 애칭이었다. 로페라는 몰디르가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줄수록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부르지 마!”
  로페라는 그녀의 심정을 알 수 없었다. 자신을 떠날 생각을 했으면서 매몰차지도 않은 그녀의 애매한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상파울루의 일을 떠올릴 때면 아직도 총에 맞은 자리가 욱신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언니와 종종 대련으로 서로의 실력을 겨루곤 했다. 대련이 끝나면 그 결과와 상관없이 툭툭 털고 일어나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그러나 그곳 상파울루에서는 달랐다. 언제나처럼의 연습이 아닌 실전이었다. 항상 그랬듯 언니는 동생을 제압했다. 웃음 따윈 없었다. 그녀의 언니는 그녀에게 총을 겨눴고 가족을 이어주던 위치추적기마저 부쉈다. 산산조각난 가족의 증표를 발견한 순간, 그녀는 총에 꿰뚫린 것 같은 격통을 느꼈다. 마취탄은 가족을 잃은 아픔을 중화시켜주지 못했다.

  모두가 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으면서. 로페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로페라의 슬픈 목소리에 몰디르는 무어라 말을 꺼내보려 했지만 그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몰디르는 그녀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몰디르는 답답한 마음을 안고 버틴을 찾았다. 그녀와 헤어진 이후, 그녀가 어떻게 지냈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저 아이가 어떻게 지냈나요?”
  몰디르는 최대한 침착하게 얘기하려 애썼지만 걱정스러운 기색은 감춰지지 않았다.
  “베테랑 레지던스에서 던컨 씨에게 많이 의지하더군요.”
  버틴은 그녀가 실수로 내비친 감정을 모른 체하며 넌지시 작은 힌트를 건넸다.
  상파울루, 가족은 아직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애꾸눈 형제의 말을 떠올렸다.
  ‘이 길은 끝까지 가든지, 아니면 우리 모두 아버지와 함께 형장으로 가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어.’
  정말 이게 최선일까? 한 번 등지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걸까. 몰디르는 씁쓸한 마음을 안고 아버지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이고르는 그녀를 기다린 듯,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로페라와 대화는 잘 나눴나?”
  그의 물음에 몰디르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베테랑 레지던스에서 던컨이라는 자가 보살펴준 모양입니다.”
  이고르는 햇살이 비치는 창밖을 바라봤다.
  “우리는 며칠 뒤, 방주로 돌아간다.”
  군인은 거처를 오래 비워두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그 말은 로페라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몰디르는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을 어떻게 써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



  다음 날, 이고르는 전쟁 후 부대 상황을 간략하게 정리하며 휴식을 취했다. 그는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는 것을 즐겼다. 카카오의 탄 향과 신문의 냄새는 시가 향과 꽤나 비슷했다. 창밖에서는 해맑게 뛰노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이고르는 창밖을 내다봤다.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웃음, 푸른 잔디와 녹음의 생동감, 이고르는 그 광경을 보며 자신이 거둔 아이들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수척한 얼굴, 분노, 슬픔, 또는 공허함을 담은 눈빛. 아이들은 제각기 다른 형태의 전쟁을 작은 몸에 담아내고 있었다. 같은 아이들이었지만 너무나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바깥세상도 이와 같다면 더 이상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생겨나지 않겠지. 그가 그런 상념에 빠져있을 때, 주황색 선글라스를 쓴 던컨은 호탕하게 웃으며 아이들에게 축구공을 건네주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정원을 가득 채웠다.


  이고르는 아이들과 한바탕 축구 경기를 하고 온 던컨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들이 자네를 참 좋아하는 모양이야.”
  던컨은 답이 없었다. 던컨은 이고르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늘 속에서도 그의 매와 같은 눈은 가릴 수가 없었다. 답이 돌아오지 않는 던컨을 보며 이고르가 말을 이었다.

  “로페라를 보살펴줬다더군.”


  “당신은 아주 지독한 아버지야.”
  이고르의 입에서 로페라의 이름이 나오자, 던컨이 치를 떨며 말했다. 이고르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예상한 반응이었음에도 예리한 칼날에 깊게 베인 것 같았다.

  “로페라의 방이 구멍투성이야. 과녁을 얼마나 명중시켰는지.”
  던컨은 로페라의 방을 떠올렸다. 구멍투성이인 그녀의 방은 마치 용암에 녹아내린 바위를 보는 것 같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신뢰받지 못한 그녀는 그 아픔을 주변인들에게 내색하지 않고 스스로 감내했다. 그녀의 방 안에서 총소리와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음에도 그저 문밖에서 그녀가 감정의 격류에 휩쓸려 자신을 잃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원망스러우면서도 당신과 그 가족들을 쏘지 않았지.
  반역자를 쏘던 그 냉철한 두 눈으로도 가족은 차마 쏠 수 없었던 거야.“
  던컨이 거세게 힐난했다. 던컨은 그녀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그녀가 느꼈던 고통을 조금이나마 대변하고 싶었다. 바위가 깎여 태산에 흙이 쌓이듯, 이고르는 묵묵히 그 말을 담아냈다.



*



  그날 밤, 로페라는 자신의 방문 밑에서 편지를 발견했다.

  로페라, 이 편지를 읽으면 9시 경에 정원으로 나와 줘. 대화를 나누고 싶어.
  이게 너와 나누는 마지막 대화가 될 지도 몰라.

  몰디르의 편지였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무겁고 또한 우스웠다. 마지막을 정하는 건 항상 그녀가 아니라 그들이었다. 로페라는 밀물과 썰물처럼 제멋대로 다가왔다가 제멋대로 떠나버리는 자신의 가족들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렇게나 간단한 용건이 담긴 짤막한 편지인데, 어째서 봉투의 무게는 무거운 걸까. 그녀는 봉투의 안쪽을 확인했다. 묵직한 편지 속에는 훈장이 들어있었다. ‘최고의 언니에게’, 자신의 언니였던 이에게 주었던 훈장이었다. 그 훈장은 손때는 탔더라도 녹슬지 않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동생의 것은 산산조각내버리고 자신은 가족의 증표를 간직하고 있다니, 로페라는 당최 언니의 생각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로페라는 그녀의 마지막 변명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편지에 적힌 시간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로페라는 자신의 언니였던 이를 맞이하기 위해 서둘러 정원으로 나섰다.

  그녀는 자신의 언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했다.
  언니는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자신을 데려가려 할까.
  그러한 걱정 속에서 바닥에 깔린 돌길은 자신의 가족에게로 안내할 뿐이었다.
  돌길의 끝에 다다르자, 로페라는 고개를 들었다.
  서있는 이는, 자신의 언니가 아니었다.

  검은 대지를 품은 태산에 눈이 쌓인 듯한 모습,
  씁쓸하면서도 그을린 가죽의 향,
  아버지, 로페라의 입이 달싹였다. 몇 번이나 속으로 삼켰던 그 단어를 입밖에 내보낼 뻔했다.

  “로페라, 못 본 사이에 많이 성장했구나.”
  그리움도 잠시, 정적을 깬 그의 목소리에 로페라는 이성을 되찾았다.


  “저희가 한가하게 인사나 나눌 때인가요?”
  로페라는 이고르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고르는 이제 자신의 허리춤에 오는 당돌한 오렌지빛 머리를 보았다. 여느 군인과는 달리 생기 넘치는 오렌지빛 머리였다.


  “네게 설명할 것이 많구나.”
  이고르는 로페라에게 손을 뻗었다.

  “저를 딸이라고 생각하긴 하셨나요?”
  정의, 신념, 그런 건 위태로운 한 가족 앞에선 중요한 질문이 아니었다. 이 순간, 로페라는 꽉 쥔 유리조각을 놓아버리듯 자신을 제일 고통스럽게 하던 질문을 던졌다.

  “로페라.”

  “제가 제일 슬펐던 부분이 뭐였는 줄 아세요?
  제가 '이고르의 가족' 안에서조차 신뢰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이고르가 그것이 아니라는 듯 자신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는 재빨리 말을 끊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아픔을, 원망을 전부 쏟아내야 했다. 로페라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태산 같은 인영이 흐려졌다.

  “진정한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건 나밖에 없었어.”
  맺혔던 눈물은 기어코 형체를 드러냈다. 이고르의 얼굴에 괴로움이 스쳐갔다.
  그녀는 눈물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지만, 한 번 흘러넘친 눈물은 주체할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이고르는 그녀가 슬픔을 충분히 털어낼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녀가 이토록 눈물을 흘린 것은 처음이었다.

  “난 네가 배신과 배신 사이에서 고뇌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의 흐느낌이 잦아들 때 즈음, 그는 다친 짐승을 어루만지듯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너에게는 스스로의 신념이 있지. 내가 선택한 길은 우리가 믿던 명예를 버리는 반역자의 길. 너에게 내 신념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설명해주실 수 있었잖아요!
  단 한 마디라도! 한 마디라도 해주시는 게 그렇게 어려우셨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절규와도 가까웠다. 그녀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는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과도 같았다. 이고르는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일순간 눈을 찌푸렸다.

  “너에게 이 사실을 미리 알린다면, 넌 동료의 안위와 가족의 안온 사이에서 저울질하며 고뇌하게 되겠지. 내 자신이 명예를 더럽히고 배신할지언정, 네가 배신자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가족의 배신을 더 견딜 수 없었다면요?”
  떨리는 목소리로 로페라가 말했다.

  “널 믿었다. 넌 아이들 중에서 가장 당차고 강한 아이니까. 반드시 살아남아 네 신념을 내게 보여줄 거라고 믿었다.”
  믿는다. 어쩌면 가장 자신이 듣고 싶던 말이었지만 그녀는 이런 식으로 인정받고 싶지 않았다. 신념이란 건 목숨을 걸어야 증명할 수 있는 것일까. 창문 너머로 이를 지켜보고 있는 던컨이 보였다.

  “내가 너를 떠났을 때, 너를 지켜주고 돌봐준 이가 있더군.
  네가 원한다면 그의 밑에서 계속 지내도 된다.”
  로페라는 그의 말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대체 가족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로페라가 버럭 소리쳤다.

  “가족이잖아요. 맘에 안 든다고 그렇게 쉽게 갈아치울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서로 이해가 안 돼서 싸우더라도 맞춰가면서 함께 붙어있는 게 가족이잖아요.
  가족은 원래 그런 거잖아요...“
  로페라는 목이 매여 말을 흐렸다.

  “나는 아버지의 책임을 다 하지 못했다. 그 책임은 로페라, 네가 흘린 눈물만큼 깊지.”
  그의 책임 회피와도 같은 발언에 로페라는 반발하려 했다.

  “다만, 나는 네가 날 선택해줬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그의 말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명령이 아닌 부탁이었다. 그 무엇도 아쉬울 것이 없을 것 같던 그 이고르 장군이 그녀에게 부탁을 한 것이었다.

  “이제서야 제게 선택권을 주시는 건가요?”
  로페라는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마지막의 끝에서 그녀는 마침내 선택권을 갖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내몬 이들이 쥐여준 선택권이었다. 애초에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았더라면, 가정은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해묵은 갈등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했다. 닫힌 방문 속에서 수없이 고민해왔던 그 문제를, 끝끝내 자신은 가족을 쏘지 못할 것임을 상파울루에서 깨달았음에도.

  “미안하구나, 아이야.”
  '아버지'의 사과였다. 로페라는 그 순간, 마음 속 무언가가 사르륵 녹아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응어리진 감정들이 더 이상 숨을 막지 않았다. 게워내려 해도 작아지지 않고 한데 엉겨 붙어 단단해져만 갔던 그것, 로페라는 그것에게 겨눴던 총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비로소, 그녀는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반딧불이가 로페라의 주위를 맴돌았다.



*



  버틴의 가방 안에서 충분한 휴식을 한 이고르군은 재정비를 마치고 떠날 준비를 했다. 로페라는 버틴과 함께 그들을 배웅할 준비를 했다. 본격적인 복귀가 이루어지기 전, 몰디르는 로페라를 찾았다. 그녀는 쭈뼛대며 언니를 맞이했다. 자신의 작은 오렌지, 몰디르는 그런 그녀를 보며 웃어보였다.

  “편지를 봤어. 그날 밤, 왜 언니가 아니라 아버지가 계셨던 거야?”
  로페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몰디르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직접 너와 얘기하겠다고 하셨거든.”
  몰디르는 이고르의 결연한 표정을 떠올렸다. 로페라는 아버지가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편지에 담긴 내 마음은 진심이었어.”
  진심이 담긴 몰디르의 표정에 로페라는 주머니에서 자신이 하나뿐인 언니에게 주었던 훈장을 꺼냈다.


  “내가 줬던 훈장을 다시 주면 어떡해. 잃어버리지 말고 꼭 가지고 있어.”
  몰디르의 가슴에 또다시 로페라의 훈장이 달렸다.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게.”
  몰디르는 그 훈장을 두 손으로 꼭 잡으며 다짐했다.

  이고르가 부사관들을 이끌며 나왔다. 이제 로페라의 거처가 정해질 차례였다. 몰디르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버지, 저는 타임키퍼 소대에 남겠습니다.”
  그녀는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들이 쥐여준 선택권을 남김없이 사용했다. 그것은 가족과 동시에 자신의 신념을 선택하는 길이었다. 그녀는 증오의 연쇄를 끊고 자신을 증명해냈다. 가족 중 누구의 희생도 없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이것이 아버지가 제게 바란 것이었음을,

  “로페라...”
  몰디르는 아쉬운 듯 로페라를 바라봤다. 이고르가 그녀에게로 한 발 짝 다가갔다.

  “로페라, 네게 병력을 주마.”
  로페라와 몰디르는 아버지의 결정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가 타임키퍼 소대와의 협력 관계를 맡아주었으면 한다.”
  이고르가 버틴을 쳐다보며 말했다. 버틴은 그들의 결정에 당황했지만, 그들은 앞으로의 전투에서 큰 전력이 될 것임은 분명했다. 버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페라의 입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네, 제게 맡겨주세요.”
  그녀의 표정은 이곳에 온 어느 순간보다 밝고 당찼다. 그녀의 오렌지 머리가 더욱 생기를 받은 것 같이 빛났다. 이고르는 정원에서 봤던 아이들을 떠올리며 옅게 미소지었다.

  “종종 들를게, 로페라.”
  방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몰디르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동생을 품에 안았다. 그녀가 그리워하던, 가족의 냄새가 났다. 몰디르는 동생과의 짧은 만남을 못내 뒤로 한 채, 술진이 발동되기 전, 그 안으로 들어갔다. 로페라는 자신의 가족에게 경례인사를 보냈다. 뒤이어 칠흑 같은 어둠이 그들을 삼켰고 그들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고르의 반딧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