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라리사를 가스라이팅으로 파멸시키는 로렌츠 보고싶다
***
1. 첫만남
마르그리트를 처음 마주한 순간, 라리사는 유명 연예인을 실물로 본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속눈썹, 길다….’
우스울 정도로 단순한 감상이었지만, 그 이상의 표현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큼 설명이 필요 없는 유려한 미모였다.
저런 사람이 왜 홍보팀도 아니고 연구센터에 있을까.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마르그리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사수를 맡게 된 마르그리트예요. 편하게 수석님이라고 불러주세요.”
“아… 네! 시, 시신입사원 라리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긴장한 나머지 혀가 꼬였다.
첫인상만큼은 단정하게 남기고 싶었던 상대였기에, 라리사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다.
반면 마르그리트는 웃음을 터뜨리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입꼬리를 휘며, 귀여운 실수를 받아주듯 말했다.
“후후, 그럼 잘 부탁드려요. 시시신입사원 라리사 씨?”
나비가 날갯짓하는 듯 가벼운 웃음소리였다.
악수한 손은 놀라울 만큼 부드러웠다. 괜히 자신의 손이 거칠게 느껴질 정도로.
라리사는 그 순간 확신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본다고.
그때는 몰랐다. 저 천사 같은 얼굴이, 앞으로 자신의 인생을 얼마나 처참하게 흔들어놓을지.
그날 밤 라리사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그저 아름다운 사수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지나치게 들떠 있었으니까.
***
2. 회식
하지만 기대와 달리, 마르그리트와 함께 있을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신입 연수.
보안 교육.
각종 세미나와 사내 절차들.
라리사는 하루 종일 이곳저곳 끌려다니기 바빴고, 정작 자신의 자리에는 앉아 있는 시간이 더 적었다.
자신이 세미나를 듣는 입장이라면, 마르그리트는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입장인 일이 다반사였다.
그 미모가 아깝다는 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마르그리트가 천부적인 연구가라는 것쯤은, 갓 들어온 신입사원 라리사조차 알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더 멀게 느껴졌다.
어느 날은 정부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발표했고, 또 다른 날에는 교수들과 센터장급 인사 앞에서 결과를 시연했다고 했다.
운 좋게도, 오늘 자신이 들을 세미나의 연사가 바로 마르그리트였다.
이날의 주제는 폭풍우 시대, 불확실성하 자원 배분 최적화에 관한 내용이었다. 적어도 세미나 요약 요청에 대한 로렌츠GPT의 답변에 따르면 그랬다. 난해한 주제였다.
예리한 질문이라도 던져 사수님께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으나, 본문 첫 장부터 이해할 수 없는 내용투성이라 졸지 않고 가만히 듣는 것이 겨우 최선이었다.
‘진짜 멋있다….’
왜 사람들이 아이돌 콘서트에 다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또 하나의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신입 환영 회식.
라리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마르그리트님도 오세요?”
하지만 기대는 곧바로 무너졌다.
“아뇨. 수석연구원님은 외빈들하고 만찬 가셨어요.”
옆 팀 레이첼 연구원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애초에 수석님은 부서 회식 잘 안 오세요. 회사 사람이랑 둘이 밥 먹는 것도 거의 못 봤는데.”
“아… 그렇군요.”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마르그리트 같은 사람은 늘 바쁠 것이다. 찾는 사람도 많고, 중요한 일도 많겠지.
오갈 곳도 없었던 자신과는 다르게.
라리사는 씁쓸한 마음을 접어두고 회식 장소로 향했다.
그래도 공짜밥은 공짜밥이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그날, 라리사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술을 마셨다.
떠들썩한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설명할 곳 없는 서운함 때문인지는 몰랐다.
백주가 목을 타고 넘어갈 때마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중에는 자신이 얼마나 마셨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
3. 기대
이변은 다음 날 아침, 나비처럼 가벼운 사내 메신저 알림음으로 찾아왔다.
"으윽, 머리야… 다시는 술 안 마신다…"
띠링.
[마르그리트 수석연구원 : 어제 신입 환영 회식 있었다면서요? 참석 못해서 미안해요.]
“…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마터면 회사라는 것도 잊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숙취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라리사는 심호흡한 뒤 메신저를 다시 확인했다.
단체방도 아니었다. 분명 개인 채팅이었다. 그것도, 마르그리트가 먼저 보낸.
지웠다 입력했다를 반복한 끝에 겨우 답장을 보냈다.
[라리사 사원 : 괜찮습니다ㅎㅎ 다들 잘 챙겨주셔서 즐거웠어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답장을 보내고 나서 괜히 초 단위를 세기 시작했다.
5초.
30초.
1분.
외근 중이면 답장이 늦는 게 당연한데도, 이상하게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띠링.
라리사는 진심으로 오늘이 인생 최고의 날이라고 생각했다.
[마르그리트 수석연구원: 다행이네요. 그래도 사수로서 체면이 있으니, 저도 환영해 드리고 싶어요. 저랑 따로 2차 환영회 어때요?]
오늘이 내 생일이었나? 그런 착각이 들 정도로 현실감각이 없었다.
[라리사 사원: 넵 좋습니다! 저는 언제든 상관없어요!]
느낌표를 세 개 이상 붙이지 않으려 애쓰는 게 고작이었다.
[마르그리트 수석연구원: 좋아요. 다만 제가 일정 때문에 오늘 아니면 한동안 어려운데, 괜찮을까요? 어제 술 많이 마셨다면서요.]
[라리사 사원: 그 정도로 많이 마시지 않았어요. 오늘 저녁 가능해요!]
아, 어제 술 적당히 마실걸. 음주는 늘 후회되는 선택이었지만, 오늘처럼 절실하게 후회한 적은 처음이었다.
[마르그리트 수석연구원: 네, 그러면 저녁 때 뵈어요. 가고 싶은 식당은 메신저로 알려 줘요. 환영회니까 꼭 근사한 곳으로 골라야 해요. 제 개인 카드로 결제할 테니, 최소 인당 10만 원인 곳으로요.]
단둘이 저녁을 먹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비현실적인데, 이제는 당당하게 개인 메신저로 연락할 명분까지 생겼다.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마르그리트는 라리사 같은 평범한 사원과는 너무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능력도, 외모도, 존재감도.
컨퍼런스에서 발표하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같은 부서 사람이라는 사실조차 실감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TV 속 유명인을 우연히 가까이서 마주한 기분에 가까웠다.
아마 사수와 신입이라는 관계가 아니었다면, 평생 제대로 말을 섞어볼 기회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은 라리사에게 거의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 다가가고 싶었다.
마르그리트가 자신을 ‘그냥 신입 한 명’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후배이자 동료로 기억해주길 바랐다.
저 우아함의 한 귀퉁이라도 곁에서 들여다보고 싶었고, 나비처럼 가벼운 그 웃음소리를 한 번 더 듣고 싶었다.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었다. 동경이란 원래 손이 닿지 않는 곳을 향할 때 가장 선명해지는 법이니까.
그러다 문득, 새삼스러운 감사가 밀려왔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건 마르그리트가 자신의 '사수'이기 때문에 주어진 기회였다. 부서 회식조차 나오지 않고, 회사 사람과 둘이 밥 먹는 일도 거의 없다는 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단둘이 저녁을 청해 준 것이다.
사수라는 명목이 아니었다면 평생 닿지 못했을 자리였다. 그 명목을, 그 인연을 만들어 준 회사에 고마운 마음마저 들 지경이었다.
단둘이 저녁을 먹을 예정인 것뿐만 아니라, 당당히 개인 메신저로 연락할 명분까지 얻었다. 아무리 볼을 꼬집어도 깨어나지 않는 걸 보니 현실임이 분명했다.
시끌벅적하지는 않되, 너무 오묘한 분위기는 아닌 곳으로.
라리사는 오후 내내 근처 레스토랑을 조사하는 데에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다. 입사 자기소개서를 쓸 때보다도 오늘 식사 장소를 정하는 일이 더 어려운 고민이었다.
로렌츠GPT까지 동원해 심층 리서치를 돌린 끝에, 재단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미슐랭 일식집으로 결정했다.
첫째, 재단에서 출발하면 교통편이 조금 불편하지만, 수석님의 외근 근무지에서는 이동하기 편했다.
둘째, 예약 어플로 확인하니 오늘은 운 좋게도 딱 한 자리가 남아 있었다. 게다가 나란히 앉을 수 있는 바 자리였다.
셋째, 가장 저렴한 코스 요리가 10만 2천 원이라, 아슬아슬하게 수석님의 제약을 충족했다.
넷째, 술 종류도 맥주부터 와인, 위스키까지 다양해 마르그리트님의 취향이 어떻든 문제없을 터였다.
철저히 조사한 결과를 꾹꾹 눌러 요약해 개인 메신저로 보냈다.
[나: (링크)]
[나: 안녕하세요 수석님, 라리사예요. 오늘 회식 미리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위 식당 어때요? 재단과 수석님 외근 근무지 중간쯤에 위치해서 이동하기 편리해요. 대중교통도 잘 되어 있고요. 미슐랭 레스토랑이라 후기들이 다 칭찬 일색이더라고요. 아, 다행히 오늘 자리 아직 남아 있는 건 확인했어요. 바 자리인데, 혹시 불편하시다면 테이블 자리 있는지 물어볼까요? 그리고 여기 메뉴에… 전체보기▽]
아, 줄인다고 줄였건만 그래도 내용이 너무 많아 일부만 표시되고 말았다.
너무 호들갑을 떨었나 걱정하던 사이, 수석님의 답변이 도착했다. 영광스러운 첫 개인 톡이었다.
[사수님 : 훌륭하네요. 기대 이상이에요. 거기로 가죠.]
사수님의 칭찬에 방금의 우려는 깔끔히 증발했고, 그 자리는 오붓한 저녁 식사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비록 재단에서는 '사수'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접점이 적었지만, 오늘은 알코올의 힘을 빌려서라도 조금이나마 더 가까워질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후 도착한 메시지에, 라리사는 김이 샜다.
[나: 넵, 3번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될까요?]
[사수님 : 제가 차로 이동 중이라 식당 앞에서 바로 만날게요.]
‘아’
아무래도 사수님은 차로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운전을 해야 한다는 것은, 곧 술을 마실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알코올의 힘 없이 어색한 공기를 이겨 내고 사수님과 대화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힘이 쭉 빠졌다.
괜히 혼자만 설레발치며 기대한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래, 앞으로 차근차근 친해지면 되지. 알코올이라는 치트키에 의존하면 안 돼.'
스스로를 다독이며 식당 앞으로 걸어갔다.
그래서였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걷느라, 바로 옆 벤치에 앉아 있던 마르그리트를 한참 동안 발견하지 못한 건.
“나 여기 있는데 어디 가요, 라리사 씨?”
“히익—?!”
화들짝 놀란 라리사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하얀 정장을 입은 마르그리트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밤거리 조명 아래의 그녀는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수, 수석님? 차는요?”
“차요?”
“운전하고 오신다고 하셔서….”
마르그리트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작게 웃었다.
“뭐예요, 오늘 저랑 술 안 마실 생각이었어요?”
“…네?”
“후후, 저만 기대한 건 아니죠?”
장난스럽게 말하면서도, 시선은 묘하게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낮에 미팅했던 분이 차로 데려다줬어요. 그러니까 오늘은 마음 편하게 마실 수 있어요.”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우리 라리사 씨가 열심히 찾은 맛집… 기대해봐도 되죠?”
“아하…네!”
이런 쪽 경험이 많지 않은 라리사도 그제야 깨달았다. 오늘 기대감을 품은 사람이 자신 혼자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끝내 깨닫지 못했다. 그 미소가, 먹잇감을 관찰하는 포식자의 기대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
4. 호기심
식당은 근사했다.
은은한 조명.
낮은 재즈 선율.
조용히 잔을 부딪치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모든 분위기의 중심에는 마르그리트가 있었다.
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식당 안의 공기가 한 박자 멈췄다.
직원들은 티 나지 않게 시선을 따라붙였고, 옆자리 커플은 대화를 멈춘 채 힐끗거렸다. 반대편 테이블의 어린아이조차 입안 가득 우동을 문 상태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정도였다.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감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 옆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현실 같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도 대부분 비슷했다.
‘저런 사람이 왜 저 여자랑 같이 있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읽을 수 있었다.
라리사는 괜히 어깨를 움츠렸다.
마르그리트와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그녀의 완벽한 풍경을 망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딜 봐요?”
상념을 깨운 것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아, 죄송해요. 어디까지 말씀하셨죠?”
“셰프 코스 두 명 주문했고, 술은 콩트 드 샹파뉴로 했어요. 샴페인 괜찮죠?”
“네…!”
“집중해요.”
마르그리트는 턱을 괸 채 웃었다.
“오늘은 저랑 데이트하는 날인데.”
“데, 데이트…?”
“후후, 그렇게 긴장하면 제가 강제로 회식 끌고 온 악덕 상사 같잖아요.”
라리사는 결국 샴페인 잔을 잘못 건드려 달그락 소리를 내고 말았다.
마르그리트는 그런 모습마저 재미있다는 듯 바라봤다.
“그리고 업무보고 하듯이 대답 안 해도 돼요.”
그녀는 첫인상처럼 차분한 사람이었다.
샴페인을 따르는 손끝은 느긋했고, 잔을 건네는 동작 하나에도 기품이 배어 있었다. 긴 손가락 끝이 크리스탈 잔에 스치는 모습조차 지나치게 우아해서, 라리사는 괜히 숨을 삼켰다.
하지만 의외인 점도 있었다.
멀리서 볼 때의 그녀는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마주 앉은 그녀는 의외로 상냥했다.
가벼운 농담을 던질 줄 알았고, 라리사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눈을 맞추며 귀를 기울여 주었다. 시선이 부딪힐 때마다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고, 그 다정함은 묘하게도 사람의 긴장을 풀어놓았다.
어느새 라리사는 처음의 위축됨조차 잊은 채, 평소라면 좀처럼 꺼내지 않았을 이야기까지 술술 풀어놓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을 마주한 것처럼.
그녀가 미리 깔아 둔 길 위를, 제 발로 걷고 있는 줄도 모르고.
초밥 몇 점이 지나간 뒤, 마르그리트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라리사 씨는 왜 재단에 들어왔어요? 실례 아니라면.”
“엄청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어요.”
라리사는 민망한 듯 웃었다.
“적당한 폭풍우 면역 구역 대학 나와서… 특출난 재능도 없고. 운 좋게 산학협력 인턴에 뽑혀서 입사까지 이어진 거라고 생각해요.”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덧붙였다.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셔서요. 그냥… 제 한 몸 먹여 살릴 수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군요.”
마르그리트는 라리사가 아니라 샴페인 잔을 보며 답했다. 잔 속에서 일렁이는 황금빛 물결을 구경하는 편이 더 흥미롭다는 듯, 건조한 목소리였다.
라리사는 순간 괜히 초라해진 기분이 들었다.
역시 자신 같은 평범한 이야기는 재미없겠지.
하지만 곧이어 마르그리트가 천천히 물었다.
“그런데?”
“…네?”
“아까는 ‘예전엔’이라는 표정이었는데.”
그녀가 빙긋 웃었다.
“지금은 아닌 것 같아서.”
라리사는 순간 숨이 막혔다.
정말 이상했다. 마르그리트는 늘 사람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치만… 요즘은 목표가 생겼어요.”
“오 그래요?”
“미약하게라도 평화와 공존에 기여하고 싶어요. 재단의 이념처럼….”
라리사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수석님처럼요.”
마르그리트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흥미롭다는 듯.
“저처럼요?”
“네…! 부족하지만, 수석님 부사수로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동경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라리사는, 마르그리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 곁에 서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마르그리트가 낮게 웃었다.
“근데 회사 밖인데도 계속 수석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네?”
“너무 딱딱하잖아.”
갑작스러운 변화구였다.
라리사가 눈을 깜빡이자 마르그리트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편하게 불러도 돼.”
“그, 그러면 뭐라고….”
“‘언니’는 어때?”
“…네?”
“나도 말 놓을게. 라리사.”
심장이 크게 흔들렸다.
“자, 따라해봐요.”
마르그리트가 웃으며 몸을 조금 기울였다.
“마르그리트 언니.”
“서, 선배님인데 어떻게….”
“사석인데 뭐 어때.”
라리사가 슬그머니 물러나려고 하자 그녀는 장난스럽게 라리사의 손목을 붙잡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손끝이었다.
하지만 닿은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언니라고 말할 때까지 안 놔줄 건데.”
“마, 마르그리트… 언니….”
끝내 강압에 못 이겨, 라리사는 감히 수석연구원을 '언니'라고 부르고 말았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두근거렸다. 갑작스러운 상황 탓인지, 붙잡힌 손목 탓인지, 가까이서 풍겨 오는 은은한 향수 탓인지, 무엇이 원인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좋아… 후”
마르그리트는 손목을 놓아주고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짓다가, 이내 뭐가 그리 우스운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왜, 왜요…?”
혹시 무슨 실수라도 했을까 싶어 라리사가 물었다.
“나이도 안 물어보고 무턱대고 언니라고 부르면 어떡해, '언니'?"
"어? 어어?"
"우리 동갑이야. 뭐, 생일로 따지면 오히려 라리사가 거의 1년 언니지만."
"동갑이라고? 너… 박사 학위도 있잖아."
라리사는 얼어붙었다.
성숙한 외모에 화려한 이력. 그런데 자신과 동갑이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입학을 열네 살에 했거든. 케임브리지로. 라플라스가 연구 독립성을 보장해주겠다면서 이례적으로 수석연구원 자리까지 내준 거고."
"열네 살에 케임브리지…"
"어때? 좀 달라 보여?"
"아니…"
"그래? 민망하네."
전혀 민망해 보이지 않는 얼굴로 마르그리트가 답했다.
"처음부터 대단해 보였어."
동경으로 그렁그렁 차오른 눈빛이 마르그리트를 향했다. 그 눈동자는 눈앞의 마르그리트를 온전히, 한 점도 남김없이 담고 있었다.
마르그리트는 그 시선을 가만히 받아냈다. 마치 유리 진열장 속에서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고르듯이.
"그래도… 역시나,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라리사가 감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마르그리트가 문득 물었다.
“라리사는?”
"응?"
"더 알고 싶은 거 없어?"
"어떤 걸…?"
"난 알고 싶은데. 라리사, 너를."
"나를?"
"응. 너 말이야."
"나, 나한테 무슨 재미있는 점이 있다고…"
"많지. 가령, 어제 세미나에서 나를 향하던 그 강렬한 시선은 대체 뭐였을까, 라든가."
라리사는 숨을 삼켰다.
“절대 학구적 호기심이라거나, 직장 동료를 보는 평범한 눈빛은 절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옭아매는 데가 있었다.
“그 수많은 청중 사이에서, 누구보다 뜨겁게 나를 응시하던 그 시선 말이야.”
라리사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귀 끝까지 열이 올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르그리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간이 늦었네.”
그녀의 입가가 느릿하게 휘어졌다.
“우리, 집으로 갈래? 손님방 넓어서 편할 거야. 안방 침대는 더 넓지만.”
요염하게 휘어진 눈매.
희고 긴 손가락이 턱을 괴는 모습.
숨결처럼 내려앉는 낮은 웃음.
라리사는 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은 애초부터 이 사람을 거절할 수 없었다는 걸.
라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촛불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의 날갯짓처럼.
라리사가 마르그리트에게 침몰하는 건, 이미 정해진 결말이었다.
***
5.
5부 이후는 로렌츠-이글 관계성 파악하고 완성할 예정이야.
읽다가 지하철 환승 놓쳤어!!!!! 후회는 없어!!!!!!!!
헉 조금만 더 늦게 올릴 걸....ㅋㅋㅋㅋ 재미있게 읽었다면 감사해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