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리사를 가스라이팅으로 파멸시키는 로렌츠 보고싶다 (완)
***
5. 정당성
술기운 때문인지, 체온 때문인지.
라리사는 자신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창밖에는 새벽비가 조용히 유리창을 적시고 있었고, 어두운 실내에는 은은한 조명만이 남아 있었다.
그 희미한 빛 아래에서 마르그리트의 금빛 머리칼은 흐트러진 채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단정했던 흰 셔츠는 단추 몇 개가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드러난 목선은 지나치게 희고 매끄러웠다.
마르그리트의 손끝이 라리사의 뺨을, 목덜미를, 쇄골의 선을 따라 느리게 미끄러졌다.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오래 기다려 온 무언가를 비로소 손에 넣은 사람처럼, 한 순간 한 순간을 음미하는 손길이었다.
"마, 마르그리트... 빨리..."
다급하게 이름을 부르자, 마르그리트가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쉿..."
마르그리트는 방금까지 라리사의 입술을 스치던 그 손가락으로, 이번엔 라리사를 조용히 시켰다. 여전히 서두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안달이 난 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눈으로 날 보면서 이름 부르면 반칙인데.”
“…무슨 눈….”
"어머 아무도 경고 안 해줬어? 너가 사람 홀리는 눈으로 쳐다보는 거.
귓가에 내려앉는 낮은 속삭임에 라리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런 방면으로는 면역이 전혀 없어서, 말 한마디에도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끄러움 끝에는 안도가 따라왔다.
“예뻐.”
“그렇게 날 좋아하는 얼굴 하지 마.”
“계속 기대하게 되잖아.”
마르그리트가 흘리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이 비현실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야,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으니까.
흠잡을 데 없는 미모와 훤칠한 키, 화려한 경력의 상사가 갓 들어온 신입사원 하나를 좋아할 이유 같은 건 하등 없었으니까.
그리고 마르그리트는, 그 불안마저 처음부터 정확히 읽어내고 있었다.
라리사의 마음 밑바닥에 웅크린 의심을 진작 알고 있었다는 듯, 마르그리트는 그것을 하나하나 어루만져 녹여 없앴다. 달콤한 말로, 집요한 시선으로,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 다정함으로.
천박하다 싶은 말 한마디에서조차 위안을 길어 올리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그 우스움을 곱씹을 겨를도 없었다.
라리사의 인생에서 가장 아찔한, 그리고 가장 행복한 밤이었다.
***
6. 관계
"일어났어?"
쪽.
이마 위로 부드러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라리사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멍하니 숨을 삼켰다. 좋아하는 사람의 키스를 받으며 눈을 뜨는 아침. 그 비현실적인 상황이 아직도 꿈처럼 느껴졌다.
반쯤 잠긴 시야 너머로 마르그리트가 보였다. 침대 위에서 겨우 눈꺼풀을 밀어 올린 라리사와 달리, 마르그리트는 이미 흐트러짐 하나 없이 정돈된 모습이었다.
오늘은 검은 스트라이프 오버핏 블레이저 차림이었다. 넉넉하게 떨어지는 실루엣과 큰 키가 맞물리며, 차가울 정도로 세련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금발과 무심하게 걷어올린 소매 아래의 흰 손목까지도 지나치게 완벽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어젯밤에는 그렇게 요염하게 웃던 사람이, 아침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차분하고 우아한 연구원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간극이 오히려 더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마르그리트는 주말 아침에도 정장 입는 타입이야?”
라리사가 멍하니 묻자, 마르그리트가 작게 웃었다.
“학회 참석해야 해서.”
“오늘 토요일인데….”
“내일은 워크숍도 있어.”
새삼, 마르그리트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실감이 났다. 늘 바쁘고, 늘 높은 곳에 있고, 자신 같은 사람이 쉽게 붙잡을 수 없는 사람.
만약 어제 그녀가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면,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 생각이 들자 어젯밤의 모든 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아쉬웠다.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었다.
마르그리트는 그런 마음까지 읽은 듯 자연스럽게 말했다.
“집 데려다줄게. 같이 나가자.”
라리사는 순간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마르그리트는 늘 한발 빨랐다.
자신이 숨기지 못한 감정을, 그녀는 너무 쉽게 눈치챘다.
동갑인데도. 자신은 어린애처럼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데, 마르그리트는 늘 여유롭고 다정하게 상대를 배려했다.
그 차이가 다시 한번 선명하게 느껴졌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사이, 어느새 차는 라리사의 아파트 앞에 도착해 있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바쁠 텐데 얼른 가봐.”
붙잡고 싶은 마음을 겨우 눌러 담으며 라리사가 말했다.
마르그리트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
“응?”
“잊은 거 없어?”
라리사가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인 순간.
쪽.
또 한 번의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이번엔 입술 끝이었다.
“오늘 같이 못 있어줘서 미안해.”
마르그리트가 낮게 웃었다.
“그래도 내 생각은 계속 해줘야 해?”
“응….”
“난 학회 가서도 라리사 생각할 거니까.”
그 다정한 속삭임에 라리사는 정말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차문을 열고 내린 뒤에도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끝나면 연락할게. 푹 쉬어.”
마르그리트의 백색 스포츠 세단과 함께 폭풍 같은 열기가 지나간 한참 뒤에야 문득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우리… 무슨 관계지?’
어젯밤과 오늘 아침. 수많은 입맞춤과 속삭임이 있었다.
연인처럼 서로를 바라봤고, 연인처럼 끌어안았고, 연인처럼 아쉬워했다.
그런데도 정작 단 한 번도.
‘사귀자’는 말은 없었다.
관계를 정의하는 대화도 없었다.
하지만 라리사는 차마 묻지 못했다.
마르그리트는 이미 충분할 만큼 애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다정한 시선과 상냥한 목소리를 의심하는 건,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배신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을지도 몰라.
사소한 불안만 외면하면, 이 꿈 같은 관계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라리사는 끝내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못했다.
***
7. 전조
라리사 씨, 마르그리트 수석님이 찾으세요.”
옆 팀의 레이첼 연구원이었다.
“저를요? 지금요?”
조금 뜻밖이었다.
사내 메신저로 미리 연락이 온 것도 아니었고, 마르그리트가 벌써 외근을 마치고 복귀했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게다가 굳이 다른 팀 연구원을 통해 자신을 부른다는 점도 어딘가 낯설었다.
“네, 지금요. 분석 결과 피드백을 요청드렸는데, 후속 작업은 라리사 씨한테 맡기는 게 좋겠다고 하셨거든요.”
“아하, 넵! 지금 바로 갈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라리사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리하던 서류도 제대로 치우지 못한 채였다. 제노의 비전투손실과 지역보건소들의 무연고 사망자에 대한 통계가 책상 위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마르그리트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제대로 된 업무를 맡기려 한다는 사실이, 이상할 만큼 기뻤다. 당당히 능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첫 기회였다.
너무 들뜬 나머지, 라리사는 레이첼에게서 마르그리트와 똑같은 향수 냄새가 난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똑똑.
“수석님, 저 찾으셨-”
마르그리트는 라리사가 말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라리사가 들어서자마자 손목을 낚아채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우월한 키 차이 때문에 라리사는 그대로 마르그리트의 품 안에 갇혀버렸다.
두 손 모두 마르그리트에게 붙들려 도망칠 틈조차 없었다. 애초에 도망칠 생각조차 없었지만.
마르그리트가 한 손으로 라리사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러지 않으면 입술이 닿지 않을 만큼, 두 사람의 키 차이는 분명했다.
라리사가 저도 모르게 발뒤꿈치를 들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없었다.
결국 마르그리트가 느긋하게 고개를 숙여 왔다. 위에서 천천히 내려앉는 입맞춤이었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 라리사의 숨은 이미 흐트러져 있었다.
“라리사.”
귓가 가까이 내려앉는 낮은 목소리.
“회사에서 이렇게 흐트러진 얼굴 하고 다니면 어떡해.”
마르그리트가 라리사의 입술에 묻은 흔적을 닦아 주며 장난스레 속삭였다.
“하아, 하아… 너 때문이잖아.”
“그래? 그럼 앞으로 하지 말까?”
“…아니.”
“라리사도 한결같다니까. 그래서 좋은 거지만.”
늘 이런 식이었다. 라리사는 도저히 마르그리트를 이길 재간이 없었다. 말장난이든, 입맞춤이든, 잠자리까지도.
라리사는 괜히 화제를 돌렸다.
“언제 복귀했어? 연락도 안 하고….”
“방금.”
마르그리트가 태연하게 답했다.
“보고 싶어서 오자마자 부른 거야.”
그녀의 얼굴이 가까웠다. 정말 질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볼수록 더 위험해지는 종류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나저나.”
마르그리트가 천천히 몸을 떼며 책상 위 서류철을 들어 올렸다.
“나 대신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라리사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옛날 자료들 정리하고 수합해서 간단한 통계 분석만 하면 돼. 어렵진 않을 거야.”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궁금한 건 언제든 물어봐.”
그리고 웃었다.
“칭찬받고 싶으면 개인 톡으로 연락하고.”
라리사는 두꺼운 서류 뭉치를 받아 들었다.
『호박방 실험 자원 조달 계획』
『폭풍우 면역 구역 표본 추출 기록』
낯선 전문 용어들이 가득했지만, 이상하게 겁나지 않았다.
마르그리트가 자신에게 맡긴 일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들뜰 만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럼 첫 프로젝트, 기대할게요. 라리사 씨?”
“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수석님!”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마르그리트는 그런 라리사를 가만히 바라봤다. 한껏 들뜬 발걸음으로 연구실을 나가는 뒷모습까지.
“알아, 라리사. 너라면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란 걸.”
멀어지는 라리사를 보며, 마르그리트가 나직이 읊조렸다.
***
8. 균열
과제는 단순해 보였다.
낡은 자료들을 모아 정리하고, 간단한 통계를 내는 일. 마르그리트의 말대로라면 어려울 것 하나 없었다.
라리사는 며칠째 퇴근 시간을 넘겨가며 자료를 정리했다.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마르그리트가 자신에게 맡긴 첫 프로젝트였으니까. 그녀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정말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더 꼼꼼히 들여다본 게 화근이었다.
『호박방 실험 자원 조달 계획』
처음엔 '자원'이 장비나 예산을 말하는 줄 알았다.
오스트리아 빈 27개, 브라질 상파울루 120개. 하지만 자원들의 조달처와 숫자가 낯익었다.
라리사는 그 조건들을 멍하니 들여다보다, 어느 순간 숨이 멎었다.
이들의 표는 제노의 비전투손실과 지역보건소들의 무연고 사망자에 대한 통계와 일치했다.
대여섯 개가 아니었다. 수십 년치 기록이 퍼즐처럼 이어졌다. 첫 폭풍우가 시작된 이후부터 줄곧.
손끝이 떨렸다.
며칠 밤을 새워 정리한 그 깔끔한 표가, 갑자기 묘비명 목록처럼 보였다.
***
9. 마비
오늘은 드물게도 마르그리트가 먼저 퇴근해서 라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한걸음에 달려가 마르그리트 품에 안겼을 텐데, 오늘의 라리사는 그러지 못했다.
“…단순히 야근 때문에 피곤한 얼굴은 아닌데.”
그녀가 천천히 물었다.
“재단에서 무슨 일 있었어? 내가 준 프로젝트가 어려웠어?”
그 다정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라리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마르그리트….”
목소리가 떨렸다.
“나 어떻게 해야 해…?”
“음?”
“마르그리트는 … 알고 있었어?”
라리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호박방 실험에 대해 털어놓았다.
불법 실험. 무연고 희생자. 수십 년간 이어진 은폐. 말을 꺼낼수록 숨이 막혔다.
마르그리트는 끝까지 차분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라리사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 재단도 뒤에서 구린 일들을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 수석연구원의 위치에서는 좋든 싫든 여러 광경을 보게 되거든.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일은…”
마르그리트의 따스한 품이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마르그리트가 말 끝을 흐리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걸까..”
라리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도 다 상상해 본 일이잖아. 감히 입밖으로 꺼내지 못한 것일 뿐.”
공기가 일순 바뀌었다. 방금까지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고, 차갑고도 현혹적인 속삭임만이 귓가에 감겨 들었다.
라리사의 몸이 굳었다.
마르그리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평범한 마도학자일 뿐인데. 심지어 아이까지 있어.”
“네가 오늘 선택하지 않으면, 이들은 계획대로 실험실로 보내지겠지.”
“잘 생각해, 라리사. 정말 이대로 외면할 거야?.”
라리사의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무섭다. 하지만 외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때 마르그리트가 작게 웃었다.
“아니… 너한테 중요한 건 지금 그게 아니구나.”
마르그리트는 라리사의 겁먹은 시선을 읽었다. 라리사는 이 순간에도, 행여 마르그리트에게 피해가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눈앞의 여자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도 모른 채. 마치 아름다운 독나비를 손 위에 올려둔 사람처럼.
마르그리트는 그런 라리사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괜찮아 라리사. 난 내 한 몸은 건사할 수 있어. 나한테 피해가 오지 않을 거야. 그러니 어떤 선택을 하든 널 응원할게.”
교묘한 화법이었다. 거대한 권력에 맞선 내부고발을 앞두고, 연인을 지원하기는커녕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러면서 도리어 상대가 안도하게 만든다. 마치 크나큰 호의라도 베푼 것처럼.
하지만 사랑과 정의감에 눈이 먼 라리사는, 그것을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라리사에게 남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의로운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마음과 사회에 기여한다는 도취감뿐이었다. 이성은, 이미 마비되어 있었다.
“네 말이 맞아. 이… 이건 다 내가 마주해야 할 일이야…”
마르그리트는 그 대답을 듣고 아주 만족스럽게 웃었다.
라리사가 가장 사랑했던 그 미소였다.
***
10.추락
라리사의 담대한 결심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날은 끝내 오지 않았다.
불과 며칠 뒤, 감사팀이 먼저 움직였기 때문이다.
“라리사, 당신을 기밀 서류에 무단으로 접근한 혐의로 구속합니다.”
체포당하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처음부터 각오한 대가였다. 정말 억울한 건, 행동에 나서 보기도 전에 저지당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세상은 라리사를 내부고발자가 아니라, 한낱 산업 스파이로 취급했다.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할 수단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서류들을 마르그리트에게서 받았다는 사실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피해가 갈 수 있으니까. 다행히, 메신저 내역도 공식적인 업무 지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고문에 가까운 심문, 열악한 유치장, 그리고 기약 없는 마르그리트. 모든 것이 라리사의 정신을 천천히 갉아먹었다.
결정타는, 옆 팀 레이첼 연구원의 증언이었다.
"라리사 사원이 제 서류를 훔쳐 갔습니다. 서류 일련번호를 확인해 보면 제 신분이 나올 거예요. 라리사 사원은 이상할 만큼 마르그리트 수석님께 집착했어요. 스토킹에 가까울 정도로요. 아마 제가 수석님과 면담한 뒤, 그 틈에 훔친 것 같습니다."
더는 버텨 봐야 소용없음을 깨달은 라리사는, 결국 서류에 동의했다. 모든 일을 불문에 부치고 재단을 퇴사한다는 내용이었다. 발설할 경우 막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는 조항과 함께.
말도 안 되는 서류에 서명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마르그리트가 보고 싶었다.
비록 모든 게 무위로 돌아갔지만,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단 한마디만이라도 듣고 싶었다.
***
11. 대답
걱정과 달리, 마르그리트는 잘 지내고 있었다.
마치 라리사가 풀려나자마자 자신을 찾아올 줄 알았다는 듯, 그녀는 제 집에서 느긋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을 나누던 공간이, 오늘은 도살장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야위였네. 저녁 내어줄까?”
출장갔다온 연인을 반기듯 마르그리트가 화답해주었다. 단지, 라리사는 출장이 아니라 심문실에 갇혀있었다는 소소한 차이점이 있었다.
마침내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질문을 참을 수 없었다.
“우리… 대체 무슨 사이야?”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줬으면서….”
울음을 삼키려 애썼지만, 붉어지는 눈가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정작 내가 가장 힘들 때는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데…?”
마르그리트는 그 광경을 더없이 만족스럽다는 듯 훑었다. 대답을 재촉하는 라리사의 눈빛만 아니었다면, 한 세월 더 구경했을지도 몰랐다.
“라리사, 넌 내가 배울 가치가 있는 대상이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너는 참 상냥해,”
“공감 능력이 지나쳐.”
“무척 헌신적이고,”
“상대의 관용을 구분하지 못하지.”
“늘 많은 걸 고려하는 사람이야,”
마르그리트는 조용히 웃었다.
“그래서 홀대받는 거란다.”
라리사의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무능한 상냥함의 끝은 어디로 항하는가 궁금했거든.”
“오늘 대답이 되었어. 고마워.”
“수고했어. 그러니 이제 가봐도 돼.”
부하 직원에게 퇴근을 지시하듯 태연하게 말했다. 그 우아한 미소가 역겨울 정도로 가식적이었다.
라리사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 자신이 알던 마르그리트가 아니었다. 그 눈빛은 한 톨의 애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마치 초월자에 가까운 무언가의 손바닥 위에 놓인 미물이 된 기분이었다.
헉헉
눈 덮인 거리 위를 비틀거리며 달려가는 라리사의 뒤로, 마르그리트의 목소리가 조용히 따라붙었다.
“달려, 어서. 네 마음속 선의와 악의를 따라 여기 수렁으로 들어와…”
“우리 라리사, 훗날 다시 만났을 때 완전히 수렁에 빠진 네 모습을 기대할게.”
마르그리트는 눈 속에서 넘어질 듯 도망치는 라리사를, 가만히 관조했다.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
12. 도피
라리사가 끝내 도망쳐 닿은 곳은 재건의 손이었다.
재단을 피해 숨기 위해서는 재건의 손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기밀 유출 시도 전력. 재단 내부 구조에 대한 이해. 그리고 한때 수석연구원의 부사수였다는 경력. 그 모든 것이 높게 평가되어, 라리사는 재건의 손 외곽 지부 하나를 맡게 되었다.
배신당하고 상처받았지만, 수년이 지난 지금의 라리사는 무너지지 않았다. 재건도 재단도 아닌 제3의 길에서, 모두는 아니어도 적어도 제 주변만큼은 화합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언젠가 마르그리트 앞에서 밝혔던 그 포부처럼. 비록 자신의 롤모델은 허상에 불과했으나,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이 온다면, 마르그리트가 틀렸음을 그 아름다운 낯짝에 똑똑히 퍼부어 주고 싶었다.
물론 제3의 길에 고행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부 노선 투쟁, 도둑질, 현지 주민과의 갈등. 그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보살피던 아이가 제 발로 독립하거나, 병든 이를 간호해 줄 수 있었던 날이면, 라리사는 오랜만에 뿌듯함을 느꼈다. 차근차근, 조금씩은 나아질 거라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라리사는 길바닥에 쓰러진 어린아이 하나를 발견해 사무실로 데려왔다.
"탈수 증세가 왔던 것 같아. 이제 괜찮니?"
"…감사해요, 언니."
"언니?"
"네, 언니."
이 나이에 '언니' 소리를 듣는 게 새삼 쑥스러운 듯, 라리사는 자기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꼬마야, 이름이 뭐야?"
"이글이에요."
"복장을 보니 보이스카우트인 것 같은데… 혹시 길을 잃었니? 지역 본부에 연락 넣어 줄까?"
"아니요."
이글은 가슴팍에 달린 낡은 배지를 만지작거렸다.
"저는 정식 스카우트가 아니에요. 여자는 안 된대요. ……이건 아빠 거예요. 아빠는 훌륭한 군인이었는데, 전쟁에서 돌아가셨어요. 저도 아빠처럼 되고 싶어서요. 그래서 선생님이 따로 가르쳐 주고 계세요."
또래답지 않게 또박또박한 말투였다. 풀이 죽기는커녕, 제 갈 길을 스스로 정한 아이 특유의 단단함이 묻어났다.
"아, 미안해… 내가 착각했네. 그래도 그렇게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니 다행이구나."
"맞아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조금 이상한 점도 있지만, 그래도 좋은 선생님이라고 생각해요. 엄청 똑똑하고, 가끔은 무섭지만 늘 상냥하세요. 그리고 키가 엄청 크세요. 언니보다도요."
차별의 시대였다. 마도학자와 인간, 부자와 빈자, 재건의 손과 재단. 이런 시대에 여자아이의 꿈을 지켜 주는 선생님이라니. 라리사는 그 사람을 한번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선생님께 전화드리면 될까? 여기는 교통이 불편해서, 선생님이 직접 찾으러 오셔야 할 거야."
라리사는 이글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보호자에게 연락하라는 뜻이었다. 라리사는 총명한 아이가 그 짧은 찰나에 얼마나 많은 정보를 빼돌릴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날 밤 라리사의 지부는 재단의 습격을 받았다.
그 침공을 알린 것은, 사무실에서 자는 척하고 있던 이글의 첫 사격음이었다. 그 아이의 총은 화려한 나비를 닮아 있었다.
***
13. 재회
또각. 또각.
피가 번진 복도 위로 하이힐 소리가 천천히 울렸다.
“오랜만이야, 라리사.”
라리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면 라리사 언니라고 불러줄까? 언니는 그 호칭 좋아하는 것 같던데.”
새하얀 정장.
흐트러짐 없는 금빛 머리칼.
몇 년이 지나도 마르그리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만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너.”
목소리가 떨렸다.
“네가… 이글의 선생님이야?”
“우리 조수, 귀엽지?”
마르그리트가 웃었다.
“너 처음 입사했을 때 생각나더라.”
“….”
“왜 그렇게 봐?”
그녀가 천천히 다가왔다.
“재단에서 도망쳐놓고 결국 재건의 손에 숨어든 게, 그렇게 정의로운 선택은 아니었던 모양인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 속을 후벼팠다.
“재단도, 재건의 손도 결국 똑같은 분쇄기야.”
또각.
“둘 다 사람을 갈아 넣어 굴러가는 조직인데.”
또각.
“넌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
마르그리트의 눈매가 느리게 휘어졌다.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으면서… 소꿉놀이? 실망인걸.”
전혀 실망한 안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뻐 보였다. 무너진 자신이, 그녀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자신이.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이 온다면 마르그리트에게 쏟아붓겠다고 다짐했던 말들이 있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토록 사랑하고 두려워하던 그녀를 막상 마주하니 모든 말이 무기력하게 흩어졌다.
“…나.”
라리사가 겨우 입을 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놀아난 거야.”
“처음부터.”
너무 즉답이라 오히려 숨이 막혔다.
마르그리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네 입사 지원서가 내 책상 위에 올라왔던 날부터.”
“…그딴 농담.”
“응, 농담이야.”
그녀가 요염하게 눈을 휘었다.
“나라고 어떻게 이 모든 걸 완벽하게 계산하겠어.”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었다. 이 잔인한 여자는, 자신을 망가뜨리려면 어디를 후벼파야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존엄 따위는 한 치도 지켜 줄 생각이 없었다. 마르그리트는 라리사의 신념뿐 아니라, 그녀의 과거와 추억마저 부정하고 짓밟으려 하고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마르그리트는 흥미로운 실험 결과를 관찰하듯 라리사를 바라봤고,
라리사는 그녀의 다음 말을 잠잠히 기다렸다.
마침내 마르그리트가 입을 열었다.
“라리사.”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재단이 무연고자들을 어떻게 처리되는지, 잘 기억하지?”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문건 하나가 자신의 인생을 끝장냈으니까.
“아무리 나라도 재건의 손 잔당을 변호해줄 순 없어.”
마르그리트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가 우아하게 휘어졌다.
“로렌츠 버터플라이의 약혼녀라면 무연고자는 아니잖아?”
라리사의 숨이 멎었다.
“나랑 결혼하자.”
달콤한 목소리였다.
너무나도 다정해서 오히려 끔찍할 정도로.
“나도 네가 죽는 건 싫거든.”
그녀다운 악질적인 농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신념도, 자신의 인생도 박살 낸 여자와 결혼하라니. 최악의 청혼이었다. 어쩌면 사형선고에 더 가까웠다.
"혹시 나 때문에 네가 손해라도 볼까 봐 망설이는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넌 재미있거든, 라리사."
배려심 넘치는 말투였다. 마치 자신이 크나큰 호의라도 베풀고 있다는 듯이.
선택이라는 이름표만 붙인 강요였다.
***
엔딩 1. 순응한다
라리사는 로렌츠의 손을 붙잡아, 그 손등에 입을 맞췄다. 마치 그 차갑고 우아한 손이 유일한 구원이라는 것처럼.
"나한테 선택지를 주는 건… 역시, 나를 사랑해서 그런 거지…?"
라리사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눈물이 맺힌 시선이 로렌츠를 향했다. 그러나 그녀 앞에 포식자는 있어도, 연인은 없었다.
"마음대로 생각해."
그 한마디만으로도 충분했다.
라리사는 결국 그녀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버려지기 싫어 매달리는 유기견처럼.
“착하네.”
로렌츠의 손이 천천히 라리사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반려동물을 달래는 손길이었다.
"지금 그 표정 마음에 들어. 전보다 훨씬 낫네."
명백한 비아냥이었다. 라리사는 이제 예전처럼 사수에게 잘 보이려 화장을 하지도, 예쁜 액세서리를 걸치지도 않았다. 굳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눈물을 머금은 채 그 눈물을 애써 참아내는 표정뿐이었다.
굴욕적이었다.
비참했다.
하지만 동시에 버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안심됐다.
로렌츠는 그런 라리사의 눈물을 가만히 바라봤다.
"역시 넌, 우는 얼굴이 더 잘 어울려."
로렌츠는 가만히 라리사의 눈물을 탐식했다.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라리사의 결혼기념일은, 라리사가 완전히 망가진 날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완벽한 감옥에 갇힌 날이기도 했다.
도망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아름답고 새하얀 새장이었다.
***
엔딩 2. 반항한다
라리사는 한동안 마르그리트의 손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두 손으로 그 손을 감쌌다. 마르그리트의 입가가 희미하게 휘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라리사가 그대로 그녀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예상치 못한 힘에 마르그리트의 몸이 순간 휘청였다.
처음으로 두 사람의 시선 높이가 완전히 같아졌다. 라리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마르그리트의 뺨을 붙잡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
오랜 번데기 기간을 거쳐 마침내 날개를 편 나비처럼, 망설임이 없었다.
마르그리트의 입맞춤과 달리 낭만도, 기술도 없었다. 그러나 꾸밈 또한 없었다.
입술 사이로 길게 이어진 은빛 타액을 끊어내고서, 라리사는 마르그리트의 낯짝을 가만히 구경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통쾌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게 무슨 짓이야."
마르그리트가 추궁했다.
"네가 모르는 것도 있었네? 보면 몰라? 승낙의 표시잖아."
마르그리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나를 위한 결혼도, 너를 위한 결혼도 아니야."
"그게 무슨 궤변-"
"저 아이를 위해서야."
이번엔 처음으로, 라리사가 마르그리트의 말을 잘랐다. 세상에. 마르그리트와의 그 어떤 밤보다도 더 짜릿한 일이 있을 줄이야.
"어른으로서, 저 아이가 너처럼 글러먹은 인간으로 자라는 걸, 내가 막을 거야."
"…"
"그게 내게 남은 마지막 사명이고. 지금 내가 네 장난에 어울려 주는 이유야."
흔들림 없는 라리사의 시선이 마르그리트에게 고정되었다. 붉은 기가 도는 저 눈매에 눈물이 울망울망 맺히는 광경을 기대했었는데.
지금은, 마치 거울을 마주한 것 같았다.
라리사의 눈빛은 어느새 마르그리트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상대를 분석하고, 원하는 것과 약점을 통째로 삼켜 버리는 눈빛.
상정한 시나리오는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기대감이, 통제 실패에서 온 당혹감을 빠르게 집어삼켰다.
연약했던 여자가 자신을 닮아 간다. 마음과 이성 중, 무엇이 먼저 망가질까.
어떤 나비는 몇 개월의 번데기를 거쳐 비로소 날개를 편다. 그러고는 겨우 한 달을 채 살지 못한다.
다만 그 한 달 동안,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불태워 그 누구보다 강렬하게 빛난다.
늘 가면 같던 그 미소가, 그 순간 처음으로 진심이 되었다.
마르그리트는 라리사의 손목을 다정히 붙잡고는, 그 위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이 역시 수락의 표시였다. 다만 결혼이 아니라, 결투를 받아들이는 쪽에 가까웠지만.
마르그리트는 확신했다.
'라리사. 넌 내 최고의 걸작이야.'
엔딩 2개다 넘모 맛있고... 하아아아아.....
좌로비비고우로비비고지구를불태워라
반대가 존나 맛있네 ㅋㅋㅋㅋ
“라리사는 주말 아침에도 정장 입는 타입이야?”를 정장 입고 있는 로렌츠한테 라리사가 얘기하는 부분만 수정하면 될 거 같아
알려줘서 고마워! 나도 엔딩2를 보고 싶어서 중간에 전개들 꾸역꾸역 작성했어.....ㅋㅋㅋㅋ
@카잘린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야 ㅋㅋㅋㅋ
와 역전 개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