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으로, 실존주의는 스크린을 논하는 철학이다. 스크린 안의 사람을 인정함에 따라 세계는 참여할 수 있는 것이 된다
하지만 특정한 장소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다른 장소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참여적 논제는 아이러니하게도 하나의 중심지가 거부되는 외부를 규정하는 통일적인 이론을 만든다
때문에 스크린 속의 우주는 언제나 어둡고 무거운 곳이 된다. 행성이라는 하나의 실존적 주체가 움직이지 않고 주저앉으면서 다른 모든 별의 물리적 상태를 확정한다. 지금 화면에 보이는 그 별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말 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그러하다고 이해된다
가상에 의존한 독선적인 주장은 현실적인 보복을 낳는다. 그것은 전자레인지의 파동이 연구소 시스템의 모든 결과값을 왜곡하는 것과 같다. 요컨대 스크린이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비추는 컴퓨터라는 기계가 있다는 뜻이다. 기계의 위치가 조금만 바뀌어도, 그 오차가 크지 않더라도 철학으로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제시한다
그러나 철학에서 벗어나면 컴퓨터는 평범하게 빛을 비춘다. 해결 불가능한 오차가 있는 것이 당연하기에 관측된 상을 모두 포괄하는, 일종의 법률이 해답이 된다. 그 모든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관측하는 기계를 늘리지 않고, 스크린에 있는 해답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러시아 눈밭을 비추는 하나의 카메라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때 그 지역은 눈이 내리는 지역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거기서 하나의 소녀가 살아서 움직인다면, 그 소녀는 모든 정의를 포함하는 압도적인 진실이 된다
보복의 무용함은 가장 추상적으로 잔혹한 보복을 상상해낸다. 그 소녀 또한 또다른 카메라일 뿐이기에, 기계가 기계를 움직였음을 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가정이 틀린다면 그동안의 스크린이 덤으로 잡히게 된다. 아무 변화가 없는 스크린이 '누군가'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이런 논리적 메리수는 언제나 이전의 압도적인 진실로 대체될 수 있다. 절대적인 것은 압도적인 것을 능가할 수 없다. 세상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인간은 거기에 참여할 수 없으며 단순히 보잘 것없는 관점하나만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소녀를 제외한 세상은 언제나 아름답게 포장된다. 세계에 참여한 신에 의해 모든 것이 진행되는 세상. 그 신은 모든 생명체들과 노래로 하나될 것이다
'하나의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로 교체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이 어떤 생명체로 변해 인간의 옆에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인간을 유혹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절대적인 것은 압도적인 것을 능가할 수 없다. 스스로를 거부하는 신의 움직임은 관측되어 변화하는 세계를 이끌어낸다. 그럴 때마다, 그제서야 인간은 그런 변동체를 이해하고 관계를 맺으려한다. 그런 둘이 어울리는 동안, 모든 것이 지나갈 것이다. 이것이 히사베스가 제시한 시간에 대한 해답이었다
보이저가 인격을 가지고있는 초월적 존재라 실존주의랑도 연결이 되긴 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