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네트가 증인으로 서기 전까지의 이야기












물이 끓는 소리.


버틴은 귓가에 맴도는 소리에 조심스레 깨어났다.


눈을 뜨지 않아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소더비가 제조하는 용액이 끓고있는 소리였다.


요즘 소더비는 쌓여있는 욕망을 해방하듯이 끊임없이 포션을 만들었다.


어느 날은 정수리가 따끔하여 뒤를 돌아보니 버틴의 머리카락을 몇가닥 뽑아 희희낙락하고 있는 것이었다.


소더비의 포션이 여정이 적잖은 도움을 주고 있지만 최근 들어 너무나 많은 사고를 저질렀다.


버틴은 소더비가 또 다시 기상천외한 일들을 저지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럴 수 없는 요인이 있었다.


그녀는 기나긴 꿈 세계에서 빠져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꽤나 야위어 있었다.



마법도 제대로 부리지 못하는 모습에 일행은 요양이 필요하다며 침대에서 벗어나는 것을 한치도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영양 부족으로 기인한 저혈압이 오전에 활동하는 것을 힘들게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버틴은 얌전히 이불을 덮는 쪽을 선택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끓는 소리는 멈췄다.


"똑똑."


"들어와."


"이상하네. '똑똑'한 타임 키퍼가 '똑똑'한 소더비의 농담을 모를리가 없을텐데. 다시 할게!"


버틴은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으나 저혈당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똑똑. (Knock, Knock.)


"...누구세요."


"오렌지! (Orange!)"


단 한 마디였으나 버틴은 상당히 불쾌해졌다. 순진한 아가씨에게 그런 티를 낼 수야 없었지만.


"오렌지? (Orange who?)"


"안 들여보내줄 거야? (Aren't you Orange gonna let me in?)"


뭐라 대답할 겨를도 없이, 소더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 똑똑한 소더비가 식사를 가져왔어!"


"고마워."


아침 식사는 단순하지만 맛있어 보였다. 뼈를 고아서 만든 따뜻한 닭고기 스프, 부드러운 흰 빵, 그리고 샐러드.


"이 소더비님이 정성껏 준비했으니까 남기면 안돼. 오늘 음식은 더 맛있을거야!"


소더비가 음식을 만들었다는 얘기에 버틴은 조금 당황했지만, 아무리 소더비라도 음식에 장난을 쳤을 것 같진 않았다.


무엇보다 꾸밈없는 경쾌함과 태연자약한 행동에 수상함은 보이지 않았다.


"고마워. 잘 먹을게."


"아 참! 이걸 잊을 뻔 했어."


소더비가 품 안에서 '그것'을 꺼냈다.


버틴은 그것을 너무나 좋아했다. 그것을 잔뜩 받기 위해서라면 뺨도 내줄 수 있었다.


차라리 이것을 몰랐다면, 버틴은 비가역적인 영혼에 애도를 표했다.


"저번처럼 한 통을 다 먹어치우면 안 된다고 애플씨가 말했어. 그래서 한 개만 주는거야!"


소더비는 버틴이 그토록 좋아하는 사탕을 수프 그릇 옆에 내려놓았다. 시선이 꿋꿋하게 사탕을 따라가는 것을 본 소더비가 말했다.


"꼭 아침을 다 먹고 난 후에 먹어야해. 무아상 선생님이 알려준 식사 예절이야.


그럼 소더비는 지금부터 큰 소리로 일기를 낭독하러 갈거야. 나중에 다시 찾아올게!"








폭풍처럼 찾아온 소더비는 옷자락을 들어올린 채 총총, 하고 사라졌다.


눈을 비비고 버틴은 수저를 들었다. 닭고기 수프와 빵은 매우 맛있었다.


한 입, 두 입. 이상하게 버틴은 수저를 들어올릴 때마다 차츰 기시감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기시감이 아니었다. 자의식의 은밀한 이탈이었고, 사고력의 상실이었다.


음식을 그만 먹어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자아를 통제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른 아침에 끓이던 용액이 수프에 첨가된 것이 아닐까. 아무리 소더비라도 그런 짓을 저지르진 않을텐데...


의식이 점점 뚜렷하지 않았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현실도피적이며, 노출증에 가깝도록 자신을 발가벗겼던 곳.


재회한 가상 몽유의 세상은 달갑지 않았다.









"...그렇게 타첼부름에 대한 경고로 드루비스 씨가 위험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앞서 일러둔 생김새와 정확히 부합하는 생명체가 달려들었고 소더비는..."


"소더비씨, 여기 계셨네요."


글을 낭독하고 있는 소더비의 조제실에 소네트가 들어왔다.


"지금은 즐거운 시간이야. 하지만 서로 얘기를 나누는게 더 즐거울지도. 무슨 일이야?"


"버틴이 포션을 마셨나요? 오늘 식사 당번이 소더비씨라서요."


소네트는 버틴이 없는 곳에서는 직급으로 부르지 않았다. 은근히 친밀함을 과시하고 싶은 것처럼.


"마셨을거야! 따로 마시면 귀찮으니까 수프에 섞어두었어."


"그런가요... 하지만 오늘 분량의 포션은 그대로 남아있던걸요."


소네트는 용량이 전혀 줄지 않은 포션을 왼손에 들고있었다. 그것을 본 소더비는 깜짝 놀랐다.


"어... 아? 이상해. 분명 넣었었는데.... 아, 어쩌면!"


잰걸음으로 캐비넷에 다가간 소더비는 빈 유리병을 하나 꺼냈다.


"아마 이게 식사에 섞여버린 것 같아! 괜찮겠지?"


"이게 뭐죠?"


"음... 몽유병을 체험하는 포션이야. 별로 위험하진 않아. 그런데 그것만 넣은게 아니네... 이것도 넣은 것 같아!"


"그건 또 뭐죠?"


"레시피 상으로는 정력제로 분류되어 있어! 재료를 3배 사용한. 근데 정력제가 뭐지?"


그 말을 들은 소네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지는 지탄받을 것이 아니지만 이 아가씨의 행동은 두려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비전문적이고 어설픈 병리학이 마침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소네트는 타임 키퍼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잠시 가방 바깥을 산책하기로 마음 먹었다.













가방의 출구 앞에서 버틴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버틴은 자다 깬 옷차림 그대로였다. 소네트는 그녀의 흐트러짐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버틴이 들고있는 것을 보자마자 위화감은 거세졌다.


버틴의 왼손에는 드루비스가 발효시킨 켈트 맥주가 따라진 유리잔이 느슨하게 쥐어져 있었고, 오른손에는 슈나이더의 의상이 들려있었다.


타임키퍼는 단 한 마디도 없이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냈다.


"괜찮아요?"


소네트의 말이 무색하게 버틴은 맥주를 살짝 홀짝이더니 소네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무기질적인 시선에 소네트가 버티기 힘들어질 쯤 버틴이 입을 열었다.


"곰곰히 생각해봤어."


"네...?"


"그런데 이제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 그래, 나는 왕이야."


당당하게 선포한 버틴은 시정 잡배처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드디어 십만점을 모았거든. 정말 고생 많았지. 룰렛을 얼마나 돌렸는지 몰라. 기나긴 고난의 끝에 손에 넣었어."


소네트는 버틴이 꿈 속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십만점이라고, 이게 무슨 뜻인 줄 알아? 나같이 대단한 사람은 온 천지를 다 뒤져보아도 없을거야. 그러니까 내가 왕 할래요. 아니, 할래."


버틴은 손가락을 까딱대며 자신의 발치를 가르켰다.


"왕으로써 첫 번째 명령이야. 내 앞에 무릎 꿇고 신하가 된다고 맹세해."


소네트가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표정이었다. 소네트는 어떻게 할까 조금 망설이다가 버틴의 얼굴을 보았다.


입가는 핏기를 잃어 창백했고 푹 패인 눈두덩에는 쇠약한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대로 계속 음주를 하며 활개치다간 신체에 상당한 부담을 주리라.


더군다나 강제로 버틴을 침대로 데려놓아도 문제였다. 잠든 와중에도 행패를 부리는 사람을 진정시킬 수단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침대에 묶어둘 수도 없는 노릇으로 어쩔 수 없이 소네트는 버틴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소네트는 살짝 무릎을 꿇으며 답했다.


"봉사할 기회를 얻어 한 없이 기쁠 따름입니다. 전하."


"좋아... 그럼 두 번째 명령이야. 밤새 땀을 많이 흘려서 불쾌하니 내게 이 드레스를 입히도록."


"그건..."


슈나이더의 옷이었다. 조금 망설여졌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양팔을 들어올리는 버틴에게 소네트가 다가섰다.


생소한 냄새가 났다. 햇빛에 말린 이불같기도 했고, 바짝 말린 히비스커스 향기같기도 했다.


버틴의 뒤에 엉거주춤 서버린 소네트는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지 막막했다.


먼저 어깨로 떨어지는 적당한 길이의 머리카락 가운데로는 희고 가는 목. 머리의 좌우로는 조그맣게 드러난 귀여운 귀가 있었다.


그렇다고 시선을 아래로 두면 꼬리뼈 끝에서 이어지는 동그란 둔덕이 있었다.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듯 발가락을 조금씩 꼼지락거렸다.


소네트는 스스로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듯한 자신의 망설임에 크게 실망을 했지만, 이 상황을 맞닥뜨린다면 누구나 그러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옷을 갈아입으면 침대에 누워주세요. 그러면 갈아입혀 드릴게요."


그렇게 말함으로써 소네트는 이상한 기분을 떨쳐내려고 했다. 사태를 수습한 이후에 인간으로 남기 위해서였다.


"알았어. 그럴게."


소네트는 버틴의 윗옷부터 손 대기로 했다. 중앙의 단추를 하나씩 톡, 톡, 끄를 때마다 이상한 환청이 들리는 듯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곧 환청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귀를 빨갛게 물들인 버틴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약한 비음을 흘리고 있었다.


'레시피 상으로는 정력제로 분류되어 있어! 재료를 3배 사용한.'


그 말이 귀에 생생하게 메아리친다. 소더비의 순수함은 당사자가 아닌 정작 생뚱맞은 사람을 시험하고 있었다.


마지막 단추가 기어코 반대쪽에서 떨어져 나갔다.


툭.


윗옷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버틴의 속살이 드러났다. 소네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유리창 안으로 쏟아지는 오전의 뽀얀 햇살이 버틴을 비추었다. 마치 자연이 악착같이 벼려낸 예술적 성과를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소네트는 어린 시절부터 길러온 예술적 식견과 경험이 산산조각나는 것을 느꼈다.


사람을 추하게 만드는 요소를 전부 떼어내고 나면 이런 모습일 거라고.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버틴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부분이 아름다움을 배덕적으로 재정의하고 있었다.


소네트는 뒤에서 손을 뻗어 버틴을 조심스럽게 안았다. 소네트의 손바닥이 맨가슴에 닿자 버틴이 몸을 떨었다.


서로 밀착하자 익은 귀가 입술 앞이다. 살짝 깨물자 읏,하고 물 오른 신음이 새어나온다.


왕에게 무례하다느니, 투덜거리곤 있었지만 거부하진 않았다.


소네트는 버틴에게 풍기는 냄새에 취해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가끔은, 제멋대로 굴고싶네요. 주의하지 않고..."


그렇게 말한 순간, 소네트에게 무서운 유혹이 덮쳐왔다.


버틴은 지금 꿈 속 세상을 헤매고 있다. 지금 이 대화와 감촉도 전부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추잡한 욕망들을 길게도 견뎌왔다. 매일 부딪히는 실생활에서 자신의 신념과 위배되는 마찰을 겪으면서.


더운 밤이 되지 않도록 매일 매일 이 악물고 억눌러왔던 상상이 많았다.


"버틴 그거 알아요?"


소네트는 검지로 가슴의 돌출된 부위를 살짝 문질렀다. 조금이나마 부풀어오르는 것이 귀여웠다


"저 정말 궁금한 것이 많았어요.



같이 이불 속에 있을 때의 체취, 손을 마주 잡았을 때 얼마나 빨리 따뜻해지는지, 입맞춤을 할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그리고... 속마음을 꺼냈을 때 저를 싫어하게 될지..."


귓볼을 깨물면서 속삭이던 소네트가 빈 손을 버틴의 하의에 조심스레 밀어넣었다.


버틴이 입술을 깨물면서 불규칙적으로 숨을 빨아들였다. 그 모습은 소네트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쾌락이 되었다.


다만 버틴의 몸이 상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소네트가 말했다.


"...하의는 제 방에서 갈아입혀 드릴게요. 더 예쁜 드레스가 많아요."


버틴은 눈이 살짝 커지는가 싶더니, 곧 예견했다는 듯이 살포시 소네트에게 몸을 얹었다.


소네트는 우는 것 같기도 했고, 어쩌면 웃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깨고 나면 전부 잊고 말겠지만... 제가 계속 기억할게요. 저는 잊지 않을게요."


소네트가 버틴을 일으켜 세웠다. 맥주잔은 마루에 놓인 채였다.


두 명이 방으로 걸어가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소네트는 자신도 모르게 기억 속의 짧은 구절을 낭송했다.


'When you came, you were like red wine and honey.

...And the taste of you burnt my mouth with its sweetness...'



두 소녀가 자취를 감추고 로비에는 때 아닌 정적이 찾아왔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버틴은 머리를 부여잡고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나셨네요."


옆에는 소네트가 앉아있었다. 창 밖을 보니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내가 왜 여기있지?"


"로비에서 쓰러지신 걸 봤어요."


주위를 둘러보자 소네트의 방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여기까지 옮겨준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이불보가 축축한 느낌이었다. 의아해하고 있자 소네트가 대답해주었다.


"열이 조금 있어서 수건을 물에 적시려다가..."


"고마워."


소네트도 실수할 때가 있구나.


그러나 이상한 기분이 계속 들었다. 무언가 꿈을 꾼 것 같은데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겠지.'


버틴은 기분 좋은 햇살 속에서 둘만의 침묵을 즐기기로 했다. 한가로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