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여기가 좋아?"

그 말을 한 건 보라색 머리를 한 여자였다.

"여기가 어디...?"

로붕이는 어리둥절했다. 아늑한 자기 방과 컴퓨터는 어디 가고 갑자기 어둑한 동굴 속에 들어와 있었다.

"어디긴 어디야. 네가 그렇게 오고싶어 하던 곳이지."

여자가 말했다. 그녀의 모습이 왠지 눈에 익었다. 보라색 머리에 트윈테일, 매니악한 취향의 가죽 옷...

"좀?!"

여자는 말 없이 웃기만 했다. 등골이 서늘한 웃음.
요즘 들어서 로갤에 자주 올리던 글이 문득 로붕이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로붕이 - 돌죽 클리어시 1룬에 1억 준다면 함?]
[내용: 대신 게임 속에서 죽으면 진짜로 죽음ㅋㅋ
나는 무조건 한다. 올룬클 쌉가능
(웹죽 승률 80% 정도가 나오는 짤)]
[ㅇㅇ: 그건쫌;]
[ㅇㅇ: 20%확률로 죽기 vs 80%확률로 15억 받기]
[ㅇㅇ: 김치죽이면 한다]
[ㅁㄴㅇㄹ: 여막이면 가능]
[ㅇㅇ: 아 승률 80퍼 실화냐고 ㅋㅋ]
[ㅇㅇ: 근데 너도 진짜로 하면 쫄려서 1층에서 죽을걸 ㅋㅋㅋ]
[ㅁㄴㅇㄹ:ㄴ ㄹㅇㅋㅋ]

물론 진짜로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승률 80% 넘긴 걸 자랑하려고 올린 것일 뿐.
그런데 저 마지막 댓글에 은근 자존심이 상해서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비슷한 글을 올렸다.

"저기, 그, 디씨 인사이드에 올린 글 때문에 이러시는 거에요?"
"응."
"돌죽 클리어하면 1룬에 1억 그 글이요?"
"ㅇㅇ"
"아 그거 농담인데."

좀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이거 뭐 몰래카메라 그런 거죠? 유튜버 아니에요 그쪽?"
"아닌데."
"그럼 방송사 PD?"
"아니라고."
"에이."
"..."
"저기요?"
"이 색기가 좀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겠네."

좀이 손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저기요?"

그녀의 손에는 어느 순간부터 거대한 생선이 들려 있었다.

"진짜 그걸로 때리려는 건... 아! 악! 왜 때려! 억! 왜! 악! 잘못했어요! 컥! 아 진짜! 얽! 앍! 진짜 잘못했... 아악! 끄윽..."

로붕이는 좀에게 생선으로 후드려 맞았다. 몹시 아팠다.
좀은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더니 손가락으로 지긋이 눌러 불을 붙였다.

"오브 갖고 오면 돌려보내준다. 룬 하나에 1억씩 붙여서."
"아니 근데 내가 말한 건 컴퓨터로 돌죽을..."

그 순간 좀이 무지갯빛 생선을 다시 한 번 들어올렸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처신 잘 하라고."

생선에 맞은 곳은 비늘이 박혀서 따갑고 쓰리고 서러웠다. 로붕이는 비늘을 하나씩 뽑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아픈 걸로 봐서는 꿈이 아니다.

지금 내가 있는 축축하고 좁은 동굴은 아무리 봐도 돌죽에 나오는 던전이랑 닮았다.

눈 앞에 있는 여자는 머리나 옷 차림새, 하는 말을 보면 아무래도 돌죽의 신인 좀XOM인 것 같다.

그리고 이 정신 나간 신이 내게 요구하는 건 이 던전 최하층에 있는 조트의 오브를 가지고 오라는 건데...
설정상 이 던전에는 드래곤이나 거인, 대악마 같은 끔찍한 괴물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나는 컴퓨터로나 이 게임을 해봤지 실제로는 싸움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다..

종합적으로, 나는 좆됐다.

"돈 준다는데 왜 그렇게 죽상이야?"
"하다 못해 게임에서는 초반 장비라도 주는데..."
"그런 적극적인 자세. 아주 좋아."

좀은 옆에 매고 있던 핸드백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팔뚝만한 나무 몽둥이를 하나 꺼내서 내밀었다.

"자. 이만하면 됐지?"

로붕이가 몽둥이를 받아들자 눈 앞에 설명 메시지가 떠올랐다.

[+6 좀의 딜ㄷ]

채 읽기도 전에 메시지가 사라지더니 다시 떠올랐다.

[+6 변덕의 몽둥이(혼돈)]
[무거운 나무토막. 비록 몽둥이가 원시적인 무기라고는 하나,  몽둥이로 누군가의 두개골을 내려치는 것은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인기 있는 수단이다.]
[당신은 이 무기를 던전 1층에서 최고 존엄신 좀에게 하사받았다.]

뭔가를 본 것 같은데.
로붕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몽둥이를 보고 있자니 좀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걸 눈치 챈 로붕이는 잽싸게 몽둥이를 움켜쥐고 휭휭 돌렸다.

"아, 좋네요. 길고 굵은 몽둥이. 이만하면 충분하죠. 뭐가 묻어있는 거 같기도 한데 그건 하나도 안 중요해요."

좀이 다시 생선을 들어올리려 하자 로붕이가 몸을 움츠리며 소리 질렀다.

"악! 때리지 마세요!"
"이 색기... 너 내가 지켜본다. 오브 안 가져오면 아주 그냥 뒤지는 거야. 알지?"
"그럼요. 암요. 저만 딱 믿고 계세요. 제가 돌죽을 얼마나... 어?"

눈 깜박하는 사이에 좀은 사라져버렸다.
로붕이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장고를 거듭하던 그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승률 80%가 넘는 자칭 돌죽 마스터인 그에게 떠오르는 완벽한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던전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통로는 사람 두세 명이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너비였고, 광원이 어디있는지는 모르겠지만 15m 정도 앞까지는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밝았다.

로붕이는 찾고 있는 게 있었다. 그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멀지 않은 곳에... 그렇지!
그가 보고 신이 난 건 밝은 빛이 비치고 있는 모퉁이였다.
달려가서 모퉁이를 도니 보였다. 그가 찾던 것이.

던전의 출구.
출구 너머에서 햇빛이 쏟아져들어와 가까이 다가갈수록 주위가 밝아진다.

던전 1층에는 언제나 출구가 있었다.
던전 최심부에서 조트의 오브를 챙겨와서 이 출구로 나가는 것이 게임을 이기는 방법이었지만 그렇다고 나가는 게 패배인 건 아니었다.
살아남으면 언제나 승리할 기회는 있으니까.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고의 승리라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로붕이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던전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킬러비와 지그문트와 놀 든 할버드와 오크 사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이세계 하렘이 그의 눈 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렘의 꿈은 3초 만에 산산조각났다.

"악!"

로붕이가 뒤로 자빠져 코를 감싸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통로 너머로 손을 뻗으려 하자 투명한 벽이 만져졌다. 로붕이가 미친 듯이 투명벽을 더듬기 시작했다.

바닥부터 손이 닿는 제일 높은 곳까지 벽은 빈틈 없이 들어차 있었다.

코 앞인데. 이세계 하렘과 먼치킨의 운명이 코 앞에 있는데.
로붕이의 눈에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뒤늦게 메시지가 놀리듯이 일렁거리며 떠올랐다.

[응~ 못 나가~ 오브 갖고 와~ -XOM]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씨발... 씨바알.... 씨바아아아아아아알!!!!!!"

어두운 던전 속으로 그의 절규가 울려퍼졌다.


로붕이 the Gamer
Plaything of Xom *.....
AC: 1

EV: 9

Str: 8
Int: 8
Dex: 8

XL: 1
Place: Dungeon: 1

전투기술: 0.2
회피: 0.7
은신: 3.9

***

퍽, 퍽.

로붕이는 몽둥이로 무언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거름더미처럼 보이는 그것은 던전 여기저기서 찾은 마른 이끼며 죽은 덤불 따위를 모아둔 것이었다.

몽둥이를 두드릴 때마다 몽둥이는 녹색으로 반짝였다가, 보라색 연기를 피워올리며 덤불의 일부를 어비스로 날려보냈다가,
마침내 붉게 타오르며 덤불에 불을 붙였다. 로붕이는 서둘러 나무 쪼가리들을 덤불 위에 올렸다.
이윽고 그의 앞에 모닥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는 도마뱀 다리를 껍질 벗겨 꼬챙이에 꿰어둔 것들을 무른 바닥에 꽂아 불에 쬐었다.
지글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위장이 요동쳤다.
다리 하나가 그의 손목보다 굵으니 다리 네 짝이면 점심으로는 충분할 것 같았다.

던전에서의 기념적인 첫 식사였다. 로붕이가 거의 어린애 크기 만한 뉴트Newt를 때려잡은 위대한 과업을 달성한 것이다.

그가 막 첫 입을 뜯으려 하는 순간 통로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애옹.

어둠 속에서 윤곽을 드러낸 것은 한 마리의 고양이였다.
고양이! 로붕이는 바짝 긴장했다.

"인간. 저리 꺼져."

고양이가 말했다. 말하는 고양이! 펠리드가 틀림없었다.
이곳에 나타날 만한 말하는 고양이는 그가 알기로는 나타샤밖에 없었다.

"저기... 혹시 이름이 나타샤니?"

로붕이는 최대한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타샤? 그런 이름 몰라. 이름 없어."

이름이 없다고? 그러고보니 나타나자마자 매직 미사일을 쏜다든지 임프 소환을 한다든지 하지는 않은 걸 보면 나타샤는 아니었다.
네임드가 아닌 펠리드라면 그렇게 겁 먹을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그가 방금 때려 잡은 뉴트보다도 덩치가 작지 않은가.
로붕이는 (다의적인 의미에서)신의 지팡이라고 이름 붙인 몽둥이를 움켜잡았다.
써보고 느낀 거지만 +6 강화가 된 무기라면 그게 몽둥이일지라도 던전 저층부에서는 맛동산이라 불리는 가시 박힌 방망이도 부럽지 않았다.

"꺼져 인간. 두 번 말 안 한다."
"인간 안 꺼져. 좆냥이가 꺼진다."
"좆냥이?"

로붕이가 달려들며 대답했다.

"바로 너 말이다!"

고양이는 침착하게 뒤로 물러나며 주문을 외웠다.

"הפוך לפיתול עכביש."

순식간에 고양이의 형체가 변하기 시작했다.
다리가 매끈해지고 길어지더니 허리에서 다리가 여러 개 돋아났고 꼬리는 통통한 배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머리는 곤충을 닮은 그것으로 바뀌어 여덟개의 까만 눈이 새로 생겨났고, 튀어나온 엄니에서는 불길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변이/독 학파의 2단계 마법, 거미 변신이었다.

좆 됐다.
로붕이가 속으로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