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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갈망한다.




갈증이 나지도, 추위에 몸이 떨리는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잠이 오지 않았다. 어쩐지, 영영 그럴 수 있을 듯했다. 록산느는 특별히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영원을 사는 존재들은 누구도 잠에 들지 않았다. 하물며 그 반쪽짜리 신들조차도.


천천히 팔을 들어 보았다. 관절 부분을 덮은 살갗이 바스러지며 가루들이 흩날렸다. 청색의 입자들이 볕을 받아 반짝거렸다. 록산느는 비로소 실감이 났다. 천천히 몸이 굳어가고 있는 것이. 가슴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느리게 맥박치고 있었다. 곧 있으면 이마저도 완전히 멈춰버릴 것이다. 일순 두려웠으나 곧 의연해졌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렇게 돌아설 결심도 아니었다.


록산느는 아주 어린 시절의 일을 기억해 냈다. 지금껏 끔찍이 외면했지만, 지금이라면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들. 이제는 얼굴조차 희미해졌지만, 그때의 온기만은 아직 머릿속에 선연했다. 창살 사이로 비치는 눈발이 유달리 짙던 날, 벽난로 가에서, 양털과 비단으로 짜인 깔개위에 가족 모두가 둥그렇게 둘러앉아 웃고 떠들고 있었다.


머리를 곱게 땋은 어린 소녀가 무어라 말을 하자 어른들이 미소지었다. 질세라 동생들도 한껏 꾸며낸 작은 무용담들을 늘어놓으면, 아버지는 짐짓 놀란 체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도록 북돋아 줬다. "그래서 막 휘두르니까 그 길고 노란 괴물이 놀랐는지 얼른 흙 속으로 숨어버리더라니까". "저런, 그 녀석들도 우리 아들과 딸들이 만만치 않은 상대란 걸 안 모양이구나. 그럼, 우리 지고한 뱀 사냥꾼들에게는 합당한 보상이 필요하겠지?" 날렵한 새의 문장이 새겨진 작은 동전을 쥐어주며 아버지가 록산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의 공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우리 토벌대의 여대장님에게 대표로 마땅한 보상을 수여 하마. 어때? 마음에 드느냐?"


"응."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쉴 새 없이 재잘거리던 남동생들의 말소리도, 호탕하던 아버지의 웃음도, 발밑에 굴러떨어진 뒤로 두 번 다시 들리지 않았다. 희미한 말과 함께, 아버지가 동전을 넓적한 칼을 든 사내의 손에 쥐여준 뒤였다. 잘린 머리를 본 어머니의 모습이 이지러졌다. 어머니는 갑주를 두른 남자들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비명처럼 울부짖었다.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록산느는 손발이 묶인 채로 달구지에 실렸다. 어디로 가는지도, 어떻게 되는지도 아무것도 알 길이 없었다. 밤이 되자 록산느는 웅크린 채로 악몽을 꿨다. 가족들의 뒤편에 드리운 그림자들이 칼을 빼 들고 있었다. 일제히 내려치자 그 모습들이 뒤섞이고, 어그러지고, 끔찍하게 흘러내렸다. 마치 칼끝이 형체를 샅샅이 침범하는 듯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은 그것을 견뎌내지 못했다.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마디마다 옅게 베인 굳은살과 흉터들이 그간의 일들을 말해주고 있었다. 반역의 죄를 물려 노예로 팔려 갔던 시절 겪었던 조롱과 멸시, 실험체로 끌려가 학대받던 나날, 잠깐의 해방과 가혹했던 배움. 상처들은 록산느의 손뿐만 아니라 몸 곳곳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새겼다. 그러나 이번의 완전한 변화가 끝난 뒤에 손바닥을 쥐었다 펴면, 모든 흉터는 한 줌 모래로 흩어지고, 깨끗하게 세공된듯한 보석의 표면만이 남을 것이다. 그렇게 온몸에 새겨진 세월의 상흔들을 지우고 나면, 비로소 영원한 삶에 들게 될 것이다. 그녀가 결코 쉽게 흩어져 버릴, 연약한 목숨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듯이.


그러면 떠날 것이다. 세계의 끝을 향해.


언젠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지평선 너머, 세상의 끝에 대하여. 그곳에는 가장 위대한 마법사가 창조했다는 유적이 있다고 했다. 그 유적의 끝 모를 지하 속 가장 깊은 곳에는, 세상의 편린이 잠들어 있어 그것을 탐내고 지키는 수많은 괴물과 악마들이 도사리고 있다고 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신의 제단을 모아놓은 만신전이 있어, 한때는 번영했으나 이제는 형체도 없이 녹아내린 잊혀진 도시의 신부터, 현세를 지배하는 빛과 혼돈의 신들까지, 누구든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신도 섬기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록산느는 그곳에 갈 작정이었다. 그곳에서 영원을 보낸다면, 오랫동안 잊혀 질 일도, 무료함을 느낄 일도 적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무모하고 막연함을 알았지만, 혹여 운이 따른다면, 그래, 세상의 파편을 얻어 신이라도 될지 모를 일이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역겁의 세월을 보내기 전까지는.


시간이 흘러 정말로 세상의 끝에 도착한 록산느는 유적의 지하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신비롭지만 무료할 정도로 고요한 만신전과, 신화 속의 짐승, 금, 보물이 가득했던 요새들을 각각 거친 록산느는 마침내 어느 거대한 문 앞에 도착했다. 그녀의 키보다 족히 다섯 배는 될 법한 높이의 입구는 전부 흰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아치형의 천장에는 만신전에서 보았던 모든 신의 문양이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는 것이 보였다. 록산느는 조심스럽게 문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손끝이 닿자 즉시 그 뒤로 흐르는 강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찌나 거친지, 그 서슬에 온몸이 다 굳어버리는 듯했다.


우습게도,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그 무렵 그녀는 점차 몸이 굳어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록산느는 느린 한숨을 내쉬었다. 악마와 괴물들은 층을 내려갈수록 상대하기 버거울 정도로 강성해지고 있었다. 사파이어로 변하면서 매끄러워졌던 피부에 새로이 그어진 자상들은 쉽게 수복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영생은커녕 언젠가는 목숨을 내놓게 될 판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동안 어떻게 버텨온 세월인데, 그동안 어떻게 벌여온 일들인데, 여기서 끝낼 수는 없었다. 록산느는 마음을 다잡았다. 남아있는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생각해 두었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몇 개의 층계를 되돌아간 록산느는 지식의 신의 제단 앞에 무릎 꿇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속박했다는 그 존재의 제단 주위에는, 결코 흩어지는 법이 없는 산산이 비산한 파편이 부유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지고한 자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주겠노라고. 다만 단 하나만을 거두어 갈 것이라고. 그것은 바로 네 자유라고.


록산느는 기도를 시작했다. 모두가 실패라 여겼던 그 마법대로라면, 그녀는 곧 한 자리에 멈춰선 완벽한 조각상이 될 것이다. 영원을 사는 대신 무료함에 매몰되어 미쳐버린다는 바로 그것이. 그래서 다름 아닌 이곳에 선 것이다. 구속의 대가로 무한한 지식을 내리는 신을 섬긴다면, 그런 문제 따위야 완벽히 상쇄되는 것이 아닌가? 끝없는 지식의 숲속을 거닌다면 아마도 지루할 틈 없는 영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정 못 견디겠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지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신이 내건 제약도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몇 번을 돌이켜봐도 록산느는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거의 그랬다. 기도를 마친 뒤 유적의 심층부로 향하는 입구가 있는 층으로 되돌아온 록산느는 적당한 개활지에 터를 잡았다. 한 손에는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책을 펼쳐 든 채로, 마지막 걸음을 마친 록산느는,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덧없는 소멸을 걱정하지 않는 매일을 보낼 수 있었다. 신의 총애를 받아 무한한 지식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그녀는 사유 속에 침잠하는 것을 즐겼고, 사파이어로 된 육신은 주름지지 않았으며, 감히 대적하는 자들은 수정으로 빚어진 창에 꿰어졌다. 순조로운 나날은 그렇게 영영 이어질 듯했다.


그러나 변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무렵이었다. 록산느는 여느 때처럼 접근해온 모험가를 단번에 제압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유달리 격양된 감정을 느꼈다. 처음에는 우연인가 싶었으나 거듭될수록 쉽게 감정이 고조되고 가라앉는 것들이 반복됐다. 개중에서도 즐거움과 불쾌함만이 강렬했고, 다른 것들은 도리어 미미했다. 감정들 사이의 간극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졌다. 슬픔, 증오, 사랑과도 같은 복합적인 감정들이 갖던 느낌이 점차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중에는 아주 단순한 일에도 쉽게 기뻐하거나 짜증이 일게 돼서, 마치 스스로가 아이 때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오랜 삶을 거쳐 스스로가 무뎌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증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과거의 기억이 드문드문 끊어진다거나, 생각을 멈추고 멍하니 있는 시간이 생겨났다. 석상이 된 뒤로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던 터라, 어째서 그런 줄은 몰랐다.


문득, 두려움이 일었다.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것을 멈춰본 적이 언제였을까? 잠에 들지 않게 된 이후부터 생각이란 것은 늘 파도처럼 끊임없이 솟아나고 밀려들어 오는 것이었을 텐데. 갑작스러운 단절이 이토록 두려울 수가 없었다. 더는 지켜볼 수 없겠다고 판단한 록산느는 신께 기원했다.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비천한 존재가 분에 넘치는 은혜를 받아 무탈히 영원을 살아온다 한들, 다만 어찌하여 갑자기 정신이 쇠락하는지 알 길이 없나이다. 바라옵건대 마땅한 베풂을 내려주소서.'


절박함이 전해졌던 걸까? 드물게도 신은 즉답했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어느 학자가 집필한 책에나 쓰여있을 법한 구절이 순식간에 새어 들어왔다. 그런데 그 내용이란 것은 도무지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성숙한 개체는 더 이상 어릴 때처럼 세상을 탐험할 필요가 없다. 흘러가는 해류가 생존에 필요한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해주기 때문이다. 멍게의 삶은 완전히 수동적으로 변한다. 그러면 섬뜩하게도 그것은 자기 뇌를 먹는다. 생계를 유지할 자양분을 구할 필요가 없거나 탐험할 욕구가 없는 생명체는 자기 뇌의 신경절을 먹어 치운다......'


신의 전언을 듣고 난 뒤의 감상은 다름 아닌 당혹스러움이었다. 이게 다 무슨 뜻일까? 납득하지 못할 지식을 하사받은 것은 처음이라 더욱이 그런 듯했다. 아니, 사실 뜻 자체는 짐작이 됐지만 록산느는 스스로 이해한 내용이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설령 사실일지라도, 그런 일이 정말로 자신에게도 온전히 일어나게 될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위대한 존재 앞에서는 만물이 평등하다 한들, 어찌 바다의 밑바닥에나 존재하는 한낱 미물과 신실한 자신이 동일시될 수 있을까? 불쾌함이 치솟았지만 그뿐이었다. 원망도, 분노도, 배신감도, 슬픔도 이미 모두 닳아 없어져 버린 듯했다. 마치 상처하나 없이 미끈해진 그녀의 표면처럼, 어떠한 굴곡도 느껴지지 않았다.


록산느는 앞으로의 일을 상상했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어떻게 되어버리는 걸까? 정말로 움직이지 않는 미물들이 그러하듯, 서서히 사고의 기능을 상실해가는 걸까? 그렇다면 노망에 든 노인들처럼, 추하게 자신을 잃어가는 걸까? 그런데 노인들은 완연히 자아를 상실하기 이전에 육체가 소멸하는데, 영원토록 다하지 않는 몸을 지닌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혹시 쾌락을 추구하는 본능만이 남은 괴물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을 이어가던 록산느는 문득, 오래전에 주점에서 만났던 한 중년의 남자를 떠올렸다. 보리스라고 이름을 밝힌 잘생긴 사내는, 그녀보다도 더욱이 위대한 마법을 다룰 줄 알았다. 그는 스스로를 돌로 만드는 것을 넘어 죽음을 초월한 형상을 취할 수 있었음에도 영생에 들려 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결국 괴물이 되어버린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해가 가지 않은 록산느는 재차 되물었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냐고. 품에 안긴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보리스가 웃었다. 자줏빛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이 녀석을 두고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그렇게 살아간다 한들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록산느는 이제야 그가 한 말을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득, 살 내음이 났다. 피의 내음도. 얼마 전에 죽인, 누군지도 모를 모험가의 시신에서 나는 냄새였다. 생전에 그자는 탐욕스러웠고, 자비를 구걸했고, 마지막엔 분노했다. 당시엔 모두 하잘것없는 육신에서 나온 집착이라 여겼다. 한데 이상하게도, 갑자기 그립다는 느낌이 들었다. 날 것의 향. 내내 죽은 것의 냄새라고만 여겼지만 어쩌면, 선악을 떠나 스스로를 잃지 않은 것들만 그런 향기를 풍길 수 있는지도 몰랐다.


힘겹게 손끝을 움직여 책장을 첫 페이지까지 넘겼다. 그대로 살짝 기울이자 표지를 씌운 가죽의 틈새에서 작은 쇠붙이가 굴러 나와 종이 위에 얹혔다. 날렵한 매의 문양이 그려진 동전이었다. 록산느는 그것을 아주 오랫동안 들여다보면서, 지금의 냄새를 그때의 기억과 겹쳐 보았다. 감정이 무뎌져서인지, 시대를 아우를 정도로 긴 세월을 살아와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는 그 과거의 끔찍했던 일이, 자신의 오랜 삶 중에서 고작 동전 하나에 담길 정도로 아주 작은 부분처럼 느껴졌다.


생각이 바뀌었다.


구태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지는 않았다. 기억이 희석된다 한들, 그때의 절박함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때까지의 자신을 저버리는 일이기에. 다만 더는 과거에 얽매여 있을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내면마저 속박시키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 아쉔자리마저도.


록산느는 기다리기로 정했다. 더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때에는 이미 온전한 자신이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지금의 다짐마저 잊어버리고 노망난 늙은이들처럼 이상한 말을 지껄이고 있을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그녀는 영영 이곳에 묶여 있을 운명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닥쳐올……




죽음을 갈망한다.








이미지 출저  https://www.deviantart.com/herculanum/art/Eternite-397714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