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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나는 현직 번역가임


이런 커뮤니티 번역에도 예전부터 많이 참가해왔고,

아래 념글에서 누가 언급했던 타르코프 번역에도 초창기 시절에 참가해서 검수자 권한 받고 NDA 서명한 채로 베타 번역에도 참가했었음, 접은지는 꽤 됐지만


솔직히 요즘에는 본업이랑 일이 겹치다보니 번역을 많이는 못 하는데... 그래도 애정이 있는 게임 커뮤니티 번역에 들어가서 문장 검수해주고 오역 고치는 정도로는 간간히 활동하고 있음



암튼 그래서 새벽에 올린 글에 누가 욕을 신나게 박아놨던데, 대충 '번역기 돌린 건 검수 안 눌려졌으니 구분할 수 있다'랑 '다른 게임에서도 그렇게 했다'로 요약이 되는듯

근데 이게 왜 말이 안 되는 소리냐면, 우선 번역기 돌린 건 지금 당장에는 구분이 가능해도 프로젝트가 진행될수록 구분이 불가능해짐



우선 번역 사이트의 '검수' 시스템이라는 걸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음.

딱히 어려운 건 아님, 누군가가 translation을 적어놓고, 권한을 가진 사람이 그걸 검토한 다음 proofreading 단계에서 확인을 누르면 컨펌 상태가 되어서 번역이 완료되는 거거든


근데 문제는 번역이 완료되려면 이게 컨펌이 눌려져야 한다는 거임. 사용하는 캣툴마다 다르겠지만 컨펌이 되어야 번역이 된 걸로 간주되고, proofreading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쌩 번역만 있으면 그냥 밑그림마냥 무시하는 경우가 많거든

지금은 일단 번역기로라도 채워서 퍼센트를 올려놓자 하고 있지? 이제 좀 있으면 번역기 번역이라도 일단 한패로 만들어서 겜 하자라는 생각이 들건데, 그 유혹에 넘어가서 컨펌을 찍는 순간 애시당초 말했던 '검수 안 눌려졌으니 구분할 수 있다'라는 소리는 개소리가 됨.

거기서 더 큰 문제가 생김. 이런 온라인 캣툴들은 자체 TM으로 번역 효율을 높여주는 기능이 있는데, 컨펌이 찍히는 순간 이 시스템은 컨펌 찍힌 번역기 번역을 '올바른 번역'으로 인식해버리고 다른 스트링에도 TM으로 '야 이게 맞는 것 같은데?' 하면서 자꾸 번역기 번역을 제시해버린다는 거임.

즉, 올바른 번역들만 들어가서 번역 효율을 높여야 할 TM이 그냥 번역기 번역만 제시해버리는 번역기 하위호환이 됨. 방금 캣툴의 장점 하나를 직접 날려버린 거임 ㅇㅇ




그래도 뭐 히스토리 보면 유저 이름이 보이니까 그걸로 번역기 번역인지 유저 번역인지 구분할 수 있지 않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여기엔 또 두가지 문제가 있음


첫번째는 번역기 번역이 그래도 겉보기엔 때깔이 곱게 나온다는 거임. 간단한 문장이나 단어들은 번역기 번역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있고 그 경우에는 당연히 번역기 번역이라도 받아들여야 하겠는데, 그걸 검수하는 입장에선 이게 '옳은 번역'이라서 유지된건지 아니면 아직 누가 건드리지 않아서 남아있는 건지 구분하기가 어려움.

요즘 핫하다는 그 AI 그림이랑 비슷함, 대충 슬쩍 보는 입장에선 때깔이 괜찮으니까 오히려 이게 제대로 된 건지 아닌지 구분하려면 슬쩍 보는 정도로는 안 되고 자세히 봐야만 알 수 있다는 얘기임, 이는 즉 작업 효율이 저하된다는 소리고.

심지어는 맥락을 고려해서 직역이 아닌 의역으로 누가 바꿔놨는데, 다른 사람이 슬쩍 보고선 '뭐야 이 단어는 이 뜻인데 왜 누가 다른 단어로 써놨대?' 하고선 번역기가 제시한 직역, 즉 뜻은 맞을 수 있지만 인게임 맥락에서는 어색한 오역으로 다시 바꿔버리는 불상사가 생길수도 있음.


두번째는 계속해서 업데이트가 생기는 이런 게임의 특성상 번역 로그는 언제든 날라갈 수 있다는 거임. 나는 뭐 지금까지 번역만 했지 번역 툴을 뜯어보거나 파일을 뜯어본 적은 없어서 잘은 모르겠는데, 초창기에 번역했던 로그들은 나중에 보면 항상 사라져있더라. 물론 이 이 게임의 번역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왜 얘네는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지금 쓰는 transifex에서 패독겜 번역도 여러개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걔네도 초창기 로그 싹 날아갔을껄? 예전에 썼던 타르코프의 crowdin도 로그 사라지는 일은 수차례 있었고. 같은 사이트였는지는 기억 안 나는데, 스트링 눌러보면 TM에서 '누가 정성껏 손번역을 해서 올린 것이 분명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번역이 제시되기도 했음.




그리고 뭐 다른 댓글에선 '다른 게임에서도 번역기 잘만 돌려서 했다', '번역 작업에는 파파고와 구글번역이 필수다' 라는 소리도 하던데... 나랑 같이 일하는 번역자가 그 소리 했으면 당장 쫓아냈음.

파파고가 성능이 의외로 괜찮게 나오는 건 맞는데, 평소에 자주 사용되는 데이터가 많은 문장이나 그렇지 생소한 문장이나 독특한 맥락에 들어있는 문장일수록 번역이 이상해짐

그리고 뭐 그 문장이 얼마나 길다고 그걸 파파고로 돌려서 읽음? 내가 ㅅㅂ 꼰대같은 소리 하는 걸수도 있는데 원문도 안 읽고 파파고부터 읽을 거면 도대체 번역에는 왜 손을 대는거임?

번역 작업에서 필수인 건 번역기가 아니라 사전임, 딱 봤을 때 무난하게 읽히는 문장이라도 조금이라도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사전에 넣어보고서 혹시 다른 뜻이 있나, 이 단어에 대한 더 적절한 다른 번역어가 있나 찾아보는 게 정석임. 모니터 세개 띄워두고 하나는 캣툴, 하나는 사전, 하나는 구글 열어서 뭐 조금이라도 걸리는 거 있을때마다 자료 조사해가면서 퇴고하는 게 맞다는 소리임...




솔직히 이 겜은 텍스트 띄우는 방식 자체가 번역에 친화적이지는 않음, 어순이 같으면 그나마 나을텐데 어순이 다르니까 뭐 뭔 짓을 해도 왈도체가 보이는 건 피할 수가 없을거임


근데 그렇다고 해서 일단 번역기를 돌려서 한패를 완성하겠다는 건 진짜 바보같은 생각임, 사람이 잡고 번역을 하면 그나마 딱딱할지언정 많은 상황에서 범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단어들로 채울 수 있는데 번역기는 그런 계산을 절대 못 함. 결국엔 단어 하나하나 사람이 보고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서 번역기로 밀어버리는 건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