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보다 차갑게, 파도보다 잔잔하게 (1)
남자는 검을 무겁게 모래바닥에 내리꽂았다. 철퍽, 파도에 젖은 모래가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피가 검날을 타고 질척하게 늘어졌고 땀과 침이 그 뒤를 이어 후두둑 떨어졌다. 터질듯한 숨을 내뱉으며 남자는 검에 기대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을 배운 첫날 가장 먼저 받은 가르침 중 하나가 함부로 날을 바닥에 꽂지 말라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서 있을 자신이 없었다. 주변을 시끄럽게 휘젓고 있는 하피들은 그가 고꾸라지는 순간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다. 방금 결투에서 적을 쓰러트린 남자의 힘을 보았기 때문에 망설이고 있을 뿐, 저항할 기운이 없다는 걸 확신하는 순간 그를 갈가리 찢으려 들 것이다. 아직은 주저앉을 수 없었다.
남자는 다리에 박힌 투창을 힘겹게 뽑아내고 장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섰다. 허벅지 근육이 끊어졌는지 다리를 제대로 들 수가 없어 한쪽 발이 질질 끌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쓰러트린 머포크는 집념이 강한 사내였고, 숨이 끊어져 가면서도 기어이 남자의 앞길을 방해할 마지막 일격을 쑤셔 넣었다. 죽은 자의 원한이 담긴 듯 창날은 그의 다리를 엉망으로 헤집어놓았다. 남자는 입술을 깨물며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아린 통증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다친 건 다리만이 아니었다. 발톱에 긁힌 목 뒤에서 아까부터 피가 줄줄 흘러내려 등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입안에도 끊임없이 피가 고였고, 갈증과 겹쳐서 목에 찐득한 불쾌감을 남겼다. 전사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칠 때 왼쪽 새끼손가락이 박살이 났다. 그놈이 되돌려준 창대에 맞아 투구와 눈썹뼈가 으스러졌다. 숨을 한번 내쉴 때마다 그 상처들이 전부 욱신거렸다.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고통 때문인지 열기 때문인지 눈앞이 흐렸다. 아지랑이로 가득한 바닷가는 전부 환상 같았다. 파도 소리도, 강렬한 햇빛도, 버석거리며 부서지는 모래사장도 하나같이 비현실적인 느낌을 풍겼다. 여기 있는 모든 것은 거짓이었다. 태양도 바다도 하늘도 존재할 수가 없는 곳인데. 이 아름다움은 분명 마법적인 속임수였다. 그는 모래바닥이 장난스럽게 춤을 추거나, 파도가 사람의 형상으로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이따금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도 상쾌함보다는 다친 곳을 쥐어뜯는 악의를 품고 있었다. 이 공간은 이질적이었고, 굳이 그것을 감추려 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뽐내듯, 비웃듯 마법적인 매력을 흘려댔다.
하피들은 끈질기게 남자를 쫓아왔다. 가끔은 괴성을 내지르며, 가끔은 멀찍이 내려앉아 그를 바라보며 곁을 맴돌았다. 허기진 그 눈빛은 살갗을 파고드는 태양의 열기보다도 따가웠다. 남자의 다리에서 바닥으로 흘러내린 핏자국을 핥아대며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는 녀석도 있었다. 팔이 닿는 몇 놈을 본보기로 베었지만, 무리는 달아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킥킥대는 웃음소리, 무어라 소곤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제 동료들이 죽어 나자빠지는데도 뭐가 좋은지 들뜬 목소리였다. 놈들에게도 언어가 있을까? 사람 얼굴을 하고는 있지만, 놈들이 제대로 대화를 하거나 짐승 이상의 지능적인 행동을 하는 걸 본 적은 없었다. 시체를 뒤질 때가 아니면 물찍한 똥을 갈기거나 발작적으로 푸드덕거릴 뿐이었다. 어쩌면 저 중얼거림은 인간을 꾀어내기 위한 조잡한 모방 행동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살점을 갈구하는 저 멍한 눈빛에는 절대 인간성이 담겨있지 않았다.
어찌 됐든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놈들이 언제까지 그에게 겁을 먹고 있을 것인가를 알 수 없다면 쓸데없는 의문이었다. 남자는 저 더러운 놈들의 축제가 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발을 옮겼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긴 시간을 걸어간 끝에 남자는 마침내 거대한 계단에 도달했다. 풍화되어 반쯤 부서진 석상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고, 이따금 얕은 파도가 밀려와 계단을 뒤덮었다. 계단이 푹 잠기는가 싶으면 부자연스럽게 물길이 계단 아래로 빨려 들어갔고, 검은 구멍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드러났다. 그는 벌써 이 해안가에서만 세 개째 계단을 발견했다. 이 비밀투성이인 바닷가에서도 가장 기이한 것이었다. 분명 위아래로 이어진 계단임에도 불구하고, 밑으로 내려가면 똑같이 아름다운 백사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가 위층에서 밟았던 땅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아래층에도 푸른 하늘이 빛나고 있었고, 걸어 내려온 계단은 돌아보면 폐허처럼 부자연스럽게 끊겨있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도 아니었고, 멍하니 계단을 밟고 다시 오르면 어느새 어두컴컴한 층계를 따라 위층에 도달해있었다. 이런 마법 계단은 그가 모험하고 있는 거대한 도시 전체에 놓여있었지만, 적어도 다른 곳에서는 뻔뻔하게 하늘이 드러나진 않았다.
마법적인 무언가로 두 공간이 연결된 모양인데, 평생 검만을 쥐고 살아온 남자로서는 어쨌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불안을 딛고 그저 나아갈 뿐. 남자는 그렇게 하는 게 익숙했다. 고뇌에 매달리기보다는 일단 받아들이고 움직이는 것. 그의 명줄을 지켜온 행동 원리였다. 이해하려 드는 동안 상대는 칼을 뽑는다. 결투는 짧은 찰나로 생사를 가르는 일이었고, 삶과 죽음은 종잇장 차이지만 극명하게 갈린다. 살아 있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아무리 깊은 상처를 입더라도 살아남는다면 회복하고 일어설 기회가 있다. 죽는다면 썩은 고기로 전락할 뿐이다. 남자가 뒤에 남기고 온 머포크 전사는 다시는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황동 창을 휘두를 수 없을 것이다. 신들이 그를 인도하시길. 그의 이야기는 영원히 무(無)로 사라졌고, 체이브리아도스의 사색 아래 퇴적될 것이다. 그 사이를 가른 것은 작은 차이, 심장을 꿰뚫은 검과 귓가로 스쳐 간 창날에 있다. 남자는 그 작은 차이를 붙잡기에도 버거웠다. 삶 전체와 끊임없이 투쟁하는 와중에 마법에 걸린 계단이나 하피들의 언어 따위로 고심할 여유는 없었다.
남자는 잠시 계단 입구에서 멈춰 양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이 강렬한 햇살에도 불구하고 아까부터 얼굴이 차가웠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헛구역질이 날 때마다 기절할 것처럼 몸이 뻣뻣해졌다. 흐린 시야는 마법이나 아지랑이 때문이 아니라 과다출혈 증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피를 흘렸는지 가늠해보려 했지만, 불편하게 말려 올라간 셔츠와 속옷에 배어든 게 피인지 땀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조각상에 몸을 기대었다. 그늘이 햇빛을 막아주었지만 시원하다는 느낌 대신 오한이 들었다. 회복 물약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상처를 지혈할 붕대도 없었다. 그런 걸 남겨두기엔 너무 벅찬 여행이었다. 지금이라도 셔츠를 찢어서 지혈해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 등 뒤에서 작게 끽끽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몽롱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피들은 어느새 남자에게 바짝 다가와 있었다. 놈들답지 않게 얌전한 자세로 날개를 접고, 원형으로 그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남자의 허리께까지 닿는 큼직한 놈들은 대담하게도 그의 엉덩이를 머리로 장난스럽게 떠밀었다. 저마다 환히 웃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군무라도 추듯 발을 맞추어 조금씩 가까워졌다. 기이할 정도로 밝고 미동 없는 미소였다. 놈들은 그가 몸을 일으키면 살짝 멀어졌다가, 휘청거리면 다시 원을 좁혀왔다. 조급하거나 긴장한 기색도 없는 우아한 몸짓이었다. 굳이 공격성을 드러낼 필요조차 없어졌다는 걸 안 것이다. 남자는 이 섬뜩한 발레단의 지휘자였고, 곧 뒤풀이 만찬이 될 예정이었다. 하피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놈들에겐 적어도 즐거움을 만끽할 지능은 있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다급히 검을 뽑으려다 이미 한참 전부터 뽑아놓은 채였다는 것, 그리고 아까 얼굴을 더듬으려 바닥에 떨어뜨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멍청한 놈. 검은 아직 그의 발치에 있었지만, 이제와서 주우려고 해봤자 몸을 웅크리는 순간 덮쳐질 것이다. 하피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맹수들이다. 몸을 숙이는 건 물어뜯기 쉽도록 목덜미를 대주는 꼴이었다.
남자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아이줄의 후회라고 하던가. 고향에서는 일을 그르쳐 놓고 뒤늦게 수습하려 드는 바보들을 그렇게 놀렸다. 대체 왜 검을 놓아버린 걸까. 왜 조금이나마 여력이 있을 때 하피들을 처리해두지 않았을까. 왜 미리 회복 수단을 구비해두지 않았을까. 아니, 애초에 왜 이런 곳까지 아득바득 기어들어왔을까. 온갖 후회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핑핑 맴돌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약간의 자신감을 되찾았다. 잡념이 오히려 그에게 뭘 해야 할지를 상기시켜준 것이다. 생각에 매달리는 것은 그의 신념이 아니었다. 그는 투쟁하는 자였고, 전사였고, 자기 삶을 이끄는 사령관이었다. 후회 따위에 매달리기보다는 작은 차이를 붙들기 위해 행동할 때였다.
남자는 조각상에 다시 등을 기대었다. 이번에는 지쳐서가 아니라, 필요해서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전투를 유리한 쪽으로 이끌 요소들을 찾았다. 조각상은 부서지긴 했지만 그의 배후를 가려줄 수 있을 정도로 컸고, 남아있는 부분만큼은 튼튼해 보였다. 하피들은 검을 멀찍이 치워버릴 만큼 영리하진 않은 것 같았다. 놈들의 관심은 온통 그에게만 쏠려있었다. 잘만하면 검을 다시 주워들 틈이 있을지도 몰랐다. 허벅지에 매달아둔 단검도 있었고, 마법의 두루마리도 있었다.
‘신이시여, 도와주소서.’
마음을 다잡아서인지 그의 신이 기운을 북돋아 주어서인지, 조금이나마 몸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남자는 하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아주 천천히 자세를 비틀며 허리춤으로 손을 옮겼다. 다행히도 그늘 덕분에 그의 움직임이 눈에 덜 띄는 것 같았다. 손에 빳빳한 종이가 만져졌다. 급할 때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둔 표식 덕분에 무슨 두루마리인지는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본인도 놀랄 만큼 큰 소리로 주문을 외우며 두루마리를 뽑아 들었다. 두루마리가 번쩍이며 눈부신 빛을 뿜더니 저절로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강력한 힘의 파동이 밀려 나와 하피들이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내 두루마리 조각들은 형형색색으로 반짝거리다 사방으로 검은 안개를 뿌렸다. 하피들은 갑작스럽게 시야가 어두워지자 당황해서 꽥꽥 소리를 질러댔지만, 남자는 주저 없이 미리 점 찍어둔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딱 적당한 덩치를 가진 놈이었다. 앞이 거의 보이지 않음에도 그는 능숙하게 주먹으로 놈의 턱을 갈긴 뒤, 머리채를 움켜쥐고 냅다 들어 올렸다. 다른 놈들은 아직도 안개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었다. 움켜쥔 하피를 망치 삼아 남자는 제일 가까운 놈부터 하나씩 후려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셋이 나가떨어졌고, 난리통에 자기들끼리 상처를 입히는 놈들도 있었다. 두루마리 조각들은 폭죽처럼 이리저리 튀어 오르며 놈들의 혼을 빼놓았다.
다섯 번째 하피의 머리통을 밟아 부수는 시점부터 안개가 옅어지고 이내 하나둘씩 상황을 파악한 놈들이 여기저기서 달려들기 시작했지만, 남자는 조각상을 바리케이드 삼아 필사적으로 맞섰다. 붙들린 하피는 처음엔 미친 듯이 날개를 퍼드덕대며 저항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축 늘어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팔이 점점 무거워진다고 느껴질 때쯤 놈을 던져버리고, 단검으로 무기를 바꿔 들었다. 빽빽한 깃털 때문에 짧은 단검으로는 날이 잘 박히지 않았지만, 남자는 거친 깃털에 팔뚝이 쓸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억지로 쑤셔 넣었다. 목을 찔린 하피가 진저리를 치며 발톱으로 갑옷을 긁어댔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나 남자가 발악하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이미 지쳤던 몸은 얼마 못 가 힘이 빠졌고, 뒤엉켜 싸우다 보니 장검 쪽으로는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뒤통수에 묵직한 충격을 느끼며 남자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등을 마구 짓밟는 발톱과, 팔뚝을 물어뜯는 이빨이 느껴졌다. 혐오스럽게도 놈들의 이빨은 육식동물이 아닌 인간의 치열과 유사한 형태였다. 납작한 이빨은 살을 제대로 찢지 못하고 짓뭉갰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 감각은 너무나 역겨웠다.
비명 같은 환호성을 들으며 남자는 점차 의식을 잃어갔다. 고통은 점차 자신의 것이 아닌 듯이 희미해져 갔다. 죽어가는 남자의 몸으로 파도가 밀려와 그의 얼굴을 휩쓸었다. 입안 가득히 차오르는 짠물을 느끼며, 남자는 피와 바다의 공통점을 떠올렸다. 둘 다 지독한 비린내를 품고 있다. 그리고 그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고동이 들려온다. 이 거짓 같은 바다에도 근원이 있을까. 남자는 의문을 품은 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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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다음 장 가면 깔끔하겠지만 더 쓰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이어보려고 함
바람이 뿜어져나왓는데 어째서 나비가 아니라 안개인것이지
똑바로 서라 핫산
그.....그냥 마법이 발동되는 힘이라고 합시다 - dc App
사실 원래 나비 스크롤로 썼다 바꿔서 그럼ㅋㅋㅋ - dc App
좋네
나가체이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