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빼오는 지도자, 돈만 좇는 선수…한국 육상 앞이 안보여”
은퇴 앞둔 조남홍 배문고 육상부 감독의 한탄조남홍 서울 배문고 육상부 감독이 용산구 배문고 1층에 있는 트로피 진열대 앞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김세훈 기자

“지도자가 웃돈을 주고 선수를 빼 오는 것은 제 살 파먹기다. 기록에 도전하지 않고 돈만 좇으면 선수라 할 수 없다.”

40년 안팎 고등학교 육상 선수들을 가르친 뒤 은퇴를 앞둔 베테랑 지도자의 뼈 때리는 말이다. 서울 배문고 육상부 조남홍 감독(61)은 최근 본지와 인터뷰에서 한국 육상, 특히 중장거리가 약해진 이유와 각고의 생존법을 제시했다.

조 감독은 1984년부터 배문고 육상부를 지도하고 있다. 조 감독은 전은회, 유영훈, 박민호, 신용민 등 한국을 대표하는 전·현직 마라토너들을 배출했다. 조 감독은 “중학교 때에는 기록, 메달과 무관하게 무조건 기본기를 중심으로 지도해야 한다”며 “고교때도 무리하지 말고 중장거리를 꾸준하게 달려야 성인기에 마라톤 전향 및 기록 단축을 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배문고는 배문중학교와 함께 일관된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조 감독은 “배문중 선수들을 고등학교로 이어받는다”며 “외부에서 데려오는 선수들은 거의 없다”고 강조했다.

최근 고등부 상위권에는 배문고 선수들이 꾸준히 포진하고 있다. 체육고등학교 선수보다 좋은 성적을 내는 경우도 적잖다. 올해 고등부 5000m 랭킹 1위도 배문고 오준서다. 조 감독은 “나도 이전에는 악마, 독사라고 불리며 강하게 지도했다”며 “지금은 많이 대화하고 다독거리고 학생 스스로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동기유발에 힘쓴다”고 말했다. 조 감독은 “강제로 하면 효과가 바로 나오지만 성인기에 꽃을 피우지 못한다”며 “기록, 자기 자신과 스스로 싸우게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 육상은 대부분 내리막길이다. 중장거리 하향세는 훨씬 뚜렷하다. 파리올림픽에서는 한국 마라톤 선수가 한 명도 출전하지 못했다. 1984년 LA올림픽부터 도쿄 대회까지 10회 연속 마라톤 대표를 올림픽에 내보낸 게 끊겼다. 현재 국내에는 육상 실업팀은 80개 정도다. 그중 장거리 전문팀은 20개 안팎이며 팀당 2~4명에 불과하다. 조 감독은 “1등 하는 선수들은 계속 입상하는 등 대충해도 돈 벌고 살만해졌다”며 “지도자들도 잘하는 선수들을 웃돈을 주고 빼 오고 있으니 제 살 파먹기만 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조 감독은 “지금은 국내 모든 실업팀이 국제대회가 아니라 전국체전에 집중한다”며 “지도자도, 선수도 기록 단축에 관심이 별로 없는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국내 고교 육상팀은 90개 안팎이다. 중장거리 선수 숫자는 매년 급감한다. 조 감독은 “일본에는 팀당 30~40명씩 있는 고교 중장거리 육상부가 무려 4000개”라며 안타까워했다.

조 감독은 현재 18개 시도에 있는 체육고등학교를 질타했다. 체고 선수들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운동한다. 유망주가 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조 감독은 “그런데 체고가 뛰어난 선수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며 “체고 시스템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또 “중장거리 신입생 수를 줄이든, 체고 운영 종목을 바꾸든, 일반 학교 육상부를 살리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 감독은 “중장거리 대회, 구간을 쪼개 달리는 역전 마라톤 대회 등을 활성화해야 한다”며 “이런 대회들이 많아지면 더 많은 중장거리 선수들이 참여하고 예비 마라토너를 장기적으로 육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규정상 고교 선수들은 5000m, 10㎞만 뛸 수 있다. 고교 졸업 후 하프마라톤을 뛰다가 만 20세가 지나야 마라톤 풀코스에 나설 수 있다.

한국 남자 마라톤 최고 기록은 이봉주가 세운 2시간7분20초다. 무려 24년 전 기록이다. 조 감독은 “가까운 일본에도 2시간 6,7분대에 뛰는 선수들이 10명이 넘는다”며 “우리는 선수다운 선수는 없는데 연봉만 많이 받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조 감독은 “선수들은 콧대만 높아져 돈만 따라다닌다”며 “정상급 선수들이 기록은 내지 않고 1,2년 사이로 많은 계약금을 받고 자꾸 팀을 옮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아쉬워했다. 조 감독은 “엘리트 마라토너 50여명 중 상위 10명만 동호인보다 기록이 좋고 나머지 40명은 2시간 20분~30분대에 머문다”며 “엘리트 선수라고 보기에는 부끄러운 기록”이라고 말했다.

조 감독은 오는 2026년 초 지휘봉을 내려놓는다. 조 감독은 “내년이면 배문고 육상부 60년, 내 배문고 부임 40년이 된다”며 “코오롱 구간 마라톤 3연패, 대통령기 통일 구간 마라톤 시도대항전 우승 등을 다시 이뤄내고 싶다”고 말했다. 조 감독은 “마라톤은 내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면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종목”이라고 정의했다. 조 감독은 “고비를 넘지 못하면, 내 기록을 깨지 못하면, 자신과 싸움에서 지면 성과를 내기 힘들다”며 “하기 싫은 걸 열심히 하면서도 하고 싶은 건 절제해야만 잘 할 수 있는 게 마라톤”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