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의 날 - 하프마라톤(21.1km) 달리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제정신이었다면 당연히 달리기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 그러나 당시의 나는 너무나 무지했기에, 맘먹은 대로 꼭 하프마라톤 거리를 달리고자 하는 열망 말고 다른 걱정은 마음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정릉천 중간에서 러닝을 시작하였다. 아무도 밟지 않은 신선하고 하얀 눈 위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생각보다 미끄럽지 않았다. 그저 인생 최고의 장거리를 달리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차분한 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사실 가민 시계에서 제공하는 페이스프로로 미리 계획을 세워갔으나, 추운 겨울이라 그런지 계획보다 빨리 달리게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페이스 프로는 무시하고 그냥 적당히 달리기 시작하였다.


살곶이 공원을 지나 한강에 진입했을 무렵, 오른 무릎에 무언가 얇은 막이 낀 느낌이 났다. 통증은 아니고 뭔가 시원치 않은 느낌이랄까? 강한 느낌은 아니었으나 계속 지속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처음 하프마라톤 - 처음으로 마라톤이라는 신성한 이름이 들어가는 거리-를 뛰는 러닝 초보자 중 이 정도의 느낌으로 러닝을 포기할 수 있는 현명함과 감각을 지닌 자가 있을까? 물론 나도 평범하고 무지한 러닝 초보자였기에, 그냥 달렸다. 그리고 그 결정의 후과를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통증이라고 부르기에는 약한 느낌이었기에, 그 느낌을 참아가며  달렸다. 그리고 10km 지점에서 준비해온 아미노바이탈 에너지 젤을 하나 까서 입에 짜 넣었다. 솔직히 무슨 힘이 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보다 에너지 젤을 섭취하는, 조금 진지한 러너가 된 듯하여 기분이 좋을 뿐이었다.


반환점을 돌고 나서부터는 무념무상으로 달린 듯했다. 그러나 나의 심박은 꾸준히 오르고 있었다. 처음에 힘들지 않았던 페이스가 이제는 슬슬 무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2km쯤 남았을 무렵에는 이미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평화로운 수요일 아침. 이미 날은 밝아오기 시작하고 대부분 간단한 운동을 하거나 출근의 목적으로 천변을 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홀로 고군분투 하프마라톤 레이스를 펼치고 있었다.


저 앞의 출발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얼마 후, '뾰로롱'하며 시계의 알림음이 울리는 것을 들었다. 계획한 거리를 모두뛰었다는 신호였다. 거친 숨과 함께 왠지 모를 감정이 복받쳐 오르며 눈물이 찔끔 났다. 홀로 난간에서 숨을 고르고 보니, 사실 세상은 그대로고 나만 난리였다.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온척 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날도 평범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던 날이었다. 다만, 아직까지도 그날의 온도, 풍경, 피로를 잊을 수 없다. 물론 지금이야 21km 정도는 일주에 세 번씩 뛰는 훈련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인터넷 러닝 커뮤니티에 올린 하프마라톤 거리 완주 후기에 달린 댓글. 이 댓글대로 난 아직까지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긴 부상의 터널 


하프를 완주한 날은 괜찮았다. 가족과 함께 맛있는 삼겹살로 영양 보충도 하고 즐겁게 지냈다. 문제는 다음날부터. 완주 다음날 달리기는 쉴 생각이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으나, 옷을 갈아입고 집 앞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무언가 문제가 크게 생겼음을 깨달았다.


단순히 무릎에 무언가 끼어있는 것이 아니라, 디딜 때마다 심각한 통증이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통증이 있으면 병원에 가야 한다. 그것도 빨리. 그러나 부상에 대해서 무지한 나는 내게 필요한 조치를 제때 하지 않았다.


병원을 찾지 않게 된 첫 번째 이유는 부상에 대한 인정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왜인지 모르게 부상은 제대로 훈련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과학 욕심을 부려서 당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병원에서 심각한 부상임이 판명되면 나도 그중의 하나로 공식 인정받는 느낌이라 병원에 가는 것이 두려웠다. 무릎 통증이 갑작스럽게 발생한 만큼, 갑자기 내일 혹은 모레가 되면 갑작스럽게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바램을 가지고 나의 상황을 애써 인정하지 않았다.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자기치유력에 대한 과한 확신이었다. 어차피 정형외과를 가도 효과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물리치료만 해줄 것이며, 결국 소염'진통제'만 처방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럴 거면 그냥 무릎이 스스로 나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더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금 와서 보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지! 소염진통제라는 이름의 앞에 붙은 '소염', 즉 염증을 완화해 주는 작용이 부상 회복에 미치는 효과를 완전히 간과한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2021년의 마지막을 속절없이 부상의 늪에서 보내게 된다.


이것저것 알아보다 이때 처음으로 폼롤러를 사서 마사지를 시작하게 되었다. 러닝을 시작한 후 4개월이나 지나고서야 폼롤러를 시작하다니... 처음 폼롤러로 대퇴를 문질렀을 때 그 고통을 잊을 수 없다. 그만큼 내 다리 근육은 뭉치고 수축되어 있던 것이다.


닝 대신 수영을 하고, 가끔 달리고 가시지 않은 통증을 마주하며 한 달 반을 보냈다.


그리고 버티다 버티다 찾아간 정형외과. 러너스니라는 진단을 받고 소염진통제를 먹은 지 단 일주일 만에, 나의 부상은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