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행 쫓느라 클래식을 멀리하는 바람에
겨울이 지나서야 노구치(農口) 할배술을 꺼냈다

정식 명칭은 노구치나오히코켄큐쇼(農口尚彦研究所)
아래는 쥰마이 무로카나마겐슈(無濾過生原酒)

노구치 할배술은 출고가가 비싼 편이라서
왠지 손이 잘 가지 않았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네

기본형인 쥰마이인데 
어째서 고쿠류(黒龍) 에토 보틀(干支ボトル)
뉘앙스가 풍기는 것이야
알고 보니 무로카나마겐슈를 
일부러 숙성 후에 출시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가격이 다른 양조장에 비해 비쌌네

에토 보틀의 특징이
쌀의 담백한 감칠맛을 진하게 우려낸 농후함과
신슈(新酒)임에도 부드럽고 매끈한 질감이라면
이것은 숙성이 더해져 더욱 짙고 부드럽다
자칫 무거울 수 있을텐데 뉴에이지 못지 않게
신맛을 잘 살려서 쌀맛이 가볍게 포근하게 나네
대신 약간의 나마히네카(生老香)가 더해졌지만
짙은 쌀맛과 좋은 어울림을 보여준다

에토 보틀 산다고 고생한 나를 혼내고 싶을 만큼
클래식의 매력을 요즘 트렌드에 맞춰 풀어낸
높은 완성도의 술이다
에토 보틀은 차게 마셔야 하는데
이것은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상온에서는 상온 대로
데우면 데운 대로 좋다

다음은 혼죠조 무로카나마겐슈(無濾過生原酒)

혼죠조 하면 주정 알콜이 들어간 술
그래서 알콜감이 강한 술
정도로만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텐데
알콜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근데 노구치 할배의 혼죠조는 또 완전히 다르네

일반적인 혼죠조에서 알콜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하나 유질감과 함께 매끈한 풀바디를 내고
둘 무미한 맛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셋 개운한 바탕을 이루면서 맛을 꾹 눌려준다 
마지막이 특히 인상적으로 
마치 누름초밥을 만들 듯이 
감칠맛을 꾹 눌러주면서 밀도감을 높여주네 

재미있는 것은 둘 다 도수가 19~20도인데
얼마나 잘 숨겼는지 알콜이 튀지를 않는다
양조를 잘 한 것도 있겠지만 숙성 덕분도 있겠네
그래서 도수 높은 줄 모르고 술술 마시는데
다 마시고 나면 술이 거나하게 올라오더라

고쿠류(黒龍)도 보이고
키쿠히메(菊姫)도 보이고
요로코비 가이진(悦凱陣)도 보인다
그런데 아주 세련되게 풀어냈네
90세를 넘기신 분께서
이렇게 힙하게 풀어내실 줄은 몰랐네
사케에서 깊이감이라는 것을 느껴보고 싶다면
일부러 구해서 마셔보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