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권력' 개념의 역설
ㅡ 두 장르가 주체에게 미치는 심리적 효용의 등가적 원리


푸코적 관점에서 모든 텍스트는 주체를 특정한 방식으로 호명하고 재구성하는 권력의 도구일 뿐인데스

라노벨은 '읽는 쾌락'을 통해, 문학은 '읽는 고통'을 통해 독자를 각자의 방식대로 주체화한다

 지적쾌락로서의 문학은 고통과 비탄을 주영양으로 삼아 낙천적 영혼의 고갈이라는 부영양화상태로, 결핍된 행복과 우울한 뇌상태를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상정한다 문학이 주는 뇌의 고통과 우울을 행복으로 자동변환하는 훈련을 통해 형성되는 후천적인 매저키즘의 예시인 것이다 

정형화된 클리셰와 플롯으로 안정감을 제공하는 라노벨은 캐릭터빨이 전부가 다라고 하여도 무방할 정도의 캐릭터의존적인 면모를 보이며 하루히 시리즈에서처럼 머리의 리본으로 매일같이 뭔 지랄을 해도 이쁜 하루히라는 캐릭터성이 주는 매력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이러한 라노벨이 제공하는 즉각적인 보상은 파편화된 씹덕들의 소외된 자아를 위로하는 강력한 심리적 통치술로 기능한다고 봐야한다

반면 문학의 난해함은 지적 우월감을 매개로 하여 니체가 말한 권력(힘)에 대한 의지를 충족시키며 이는 라노벨의 대리 만족과 본질적 층위에서 다르지 않다

결국 두 매체 모두 독자가 일상의 비루함에서 벗어나 허구적인 캐릭터에 이입하여 다른 존재가 되길 꿈꾸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비현실적인 이세계)'로의 탈출구인 것이다 이세계트럭을 타고 이세계로 향하은 이고깽이 범람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문학역사에서의 헤테로토피아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라노벨이 '진입장벽이 낮은 유토피아'라면, 문학은 '높은 문턱의 그것'일 뿐 자아의 활동범위를 헤테로토피아로 확장하려는 욕망의 크기는 동일하다 씹덕들의 라노벨에 대한 갈망과 문학도들의 문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맥도날드를 먹을까 맘스터치를 먹을까 아 씨발 배는 고픈데 오늘 무슨 햄버거 먹지?라는 실존적 고뇌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텍스트가 요구하는 에너지의 질과 개인의 역량은 다르지만, 그 결과로 얻는 '실존'과 '이세계에서 안도감'이라는 효용 면에서는 위계나 층위가 존재 불가

고ㅡ오급 문학을 통한 자아 성찰이나 라노벨을 통한 스트레스 해소나, 개인이 삶을 견디게 하는 '통치적 도구'로서의 가치는 동등

두 상이한 매체가 주는 권력의 강약 차이는 단지 전술적인 선택의 결과일 뿐이며 전략적 측면에서 두 장르 모두 인간의 결핍을 메우는 필수적인 심리의 기술(Techniques of the self)이라 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어떤 권력 장치에 자신을 노출시킬 것인가의 차이일 뿐 영혼 구제의 효율 효용 측면에서 문학을 향유하는 지적독자와 라노벨을 향유하는 무지성의 씹덕

 이 두 집단은 같은 인간성을 지닌채 스스로를 권력장치에 노출시킬 뿐이며 위계의 구분없이 모두 동일한 선상에 있다

 문학과 라노벨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마광수교수는 주장대로 '감정배설의 쾌감'인데 똥을 신문지 위에 싸든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싸든 싼다는 본질과 그 본질이 주는 쾌감을 계급화해서는 쾌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것에 가까우며 문학을 읽음으로서 얻는 카타르시스는 무지성의 씹덕들에겐 높은 수준의 지적능력과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더욱 효율이 낮은 카타르시스로 취급되어질 뿐이다 

 라노벨과 문학을 두루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다면 권위적인 자들의 권위적인 똥싸기는 라노벨보다 존중받아야하는 것인가'라는 실존의 문제에 버금가는 인류 최대의 난제에 이르러 당착하는 내면의 두 가지 울림을 느끼게 된다

 라노벨은 효율성의 문학인가 아니면 씹덕들의 저급한 문화인가



1줄요약 : 라노벨=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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