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WHY DON'T WE JUST KILL THE KID IN THE OMELAS 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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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땅속 구멍을 털어 들어가 그 아이를 죽였고, 오멜라스의 모든 불이 꺼졌다: 딸깍, 딸깍, 딸깍. 그리고 배관이 터져 하수가 샌 데다, 뉴스 진행자들은 태풍이 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다른 “그들”, 이들은 책임지는 “그들”, 오멜라스의 좋은 집에 사는 “그들”이었다 [좋아, 오멜라스의 모든 집이 좋은 집이었지만, 이 집들은 아주 좋은 집들이었다])은 다른 아이를 하나 더 데려다 구멍에 넣었다.
그리고 뉴스 진행자들은 허리케인이 열대 폭풍으로 약해졌다고 말했고, 배관은 수리되었으며, 제대로 된 보호장비(PPE)를 갖춘 고임금 청소 노동자들이 하수 유출을 깨끗이 치웠다. 구멍 속 아이는 울고 또 울고 또 울었다. 아니면 그들(일반적인 “그들”, 즉 너와 나, 그리고 청소 노동자들과 뉴스 진행자들을 가리키는 “그들”)은 아이가 울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구멍은 방음 처리돼 있어서 아무도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었는데, 그렇다고 아이의 존재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방음은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긴 했으니까.
그래서 그들(첫 번째 “그들”)은 다시 아이를 죽였다. 그들은 구멍으로 들이닥쳐 아이를 빼내어, 공영 방송(오멜라스의 모든 TV는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었다)이 생중계하는 앞에서 아이의 목을 그었다. 그리고 말했다. “너희 아름다운 도시가 어떤 짓거리 위에 세워져 있는지 똑바로 보라!” 아이는 피를 흘리다 죽었고, 그 장면은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이후 재방송에서 검열될 정도였다. 그리고 무료 대중교통망의 선로 하나가 비틀려 빠져, 통근자들 여러 명이 괴이한 사고로 죽었고, 주식시장은 덜컥거리며 하락하기 시작했고, 오멜라스 남쪽의 어느 집 한 채가 무너졌다.
그래서 그들(“아주 좋은 집”에 사는 그들)은 세 번째 아이를 데려다가 구멍에 처넣었다. 그들은 기분이 좀 이상했지만, 자기들의 아주 좋은 집을 좋아하기도 했고, 또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오멜라스와 구멍 속 아이를 제외한 모든 시민들의 복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뉴스 진행자들은 두 번째로 죽은 아이에 관해 슬프게 말했다. 그리고 소셜 미디어 사용자들(오멜라스의 모든 시민은 소셜 미디어와 건강하고 규칙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고, 나쁘고 중독적인 관계는 아니었다)은 이런 비극은 정말 대단한 비극이라고 떠들어댔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구멍 속 아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구멍 속 아이가 세 배가 된 셈이니 더 슬프고, 게다가 보통은 구멍 속 아이를 우리가 죽이지는 않는데, 대개는 아이가 늙어 죽거나 영양실조로 죽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건, 현재 살아 있는 세 번째 구멍 속 아이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 아이는 구멍 경험을 전혀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세 번째 아이의 흐느낌을 듣지 못했다. 방음 처리 때문이기도 했고, 이제는 아무도 아이를 보러 갈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보안이 강화되어, 하중을 떠받치는 고통받는 아이가 죽지 않도록, 그리고 그 고통이 오래가도록. 그 말은 곧, 아이를 죽이려는 자들은 다음 시도를 진지하게 계획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모두가 하중을 떠받치는 고통받는 아이의 첫 두 번의 살해에서 벗어나 숨을 고를 시간이 생겼다는 뜻이었고, 또한 두 번째 매우 노골적인 살해 영상이 오멜라스 밖으로 퍼져나갔다는 뜻이기도 했다.
모두(나, 너, 좋은 PPE를 갖춘 청소 노동자들, 오멜라스 안팎의 아이들)는 그 영상에 대해 보여주기식 혐오를 드러냈다. 그래도 다들 끝내 봤다. 그 영상은, 스너프 필름이 바이럴을 타는 방식으로—혹은 킴 카다시안의 첫 번째 섹스 테이프가 바이럴을 타는 방식으로—바이럴을 탔다. 그리고 마치 하중을 떠받치는 고통받는 아이가 모든 이의 집에 동시에 들어온 것처럼, 백만 개의 하중을 떠받치는 고통받는 아이들이 백만 개의 화면에서 너를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멜라스가 아닌 곳의 많은 사람들은 무척 심한 말을 했다(오멜라스 밖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와 건강하고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다). 오멜라스인들이 하중을 떠받치는 고통받는 아이의 존재를 용인한 건 괴물 같은 짓이며, 따라서 오멜라스에 관한 모든 것이 믿을 수 없게 망가졌고, 그 아이에 대해 알았다면 오멜라스의 아름다운 해변과 나이트클럽과 축제 같은 데는 절대로 놀러 가지 않았을 거라고. 왜냐하면 그 아이에 대한 지식이 너무 젠장 맞게 끔찍하고 모든 것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멜라스인들을 죽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고까지.
이 정서는 오멜라스인들을 좀 언짢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렇게 지적했다. 오멜라스는 적어도 그 아이가 이유가 있어서 고통받는다는 걸 안다는 점에서 다른 대부분의 곳보다 더 살기 좋은 곳이라고. 바깥에선 아이들이 닭 손질 공장에서 일하다 팔이 뜯겨 나가고, 아이들이 베이비박스에 버려지고, 아이들이 완벽하게 조용한 비참 속에 산다—한쪽 부모는 알코올중독자이고 다른 부모는 그 아이를 때리는 집에서. 오멜라스에서는 좋은 부모만 있고, 그 한 아이를 제외하면 어떤 아이도 고통받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자신의 아이들조차 도우려 하지 않으면서 어찌 우리 공정한 도시와 우리의 유일한 아이에 대해 더럽게 말할 수 있느냐고.
오멜라스인들이 입 밖에 내지 않은 두 번째 불만은, 아이 살해범들이 암묵적 규약을 깼기 때문이었다. 하중을 떠받치는 고통받는 아이에 대해 문제가 있다면, 오멜라스를 떠나 입 다물고 있어야 했다. 아이를 죽여서는 안 됐다. 십대가 되면, 너는 네 사회가 지속적이고 무의미한 잔혹 행위 한 건 위에 세워져 있다는 무지막지한 진실을 배워야 했고, 그다음에는 펑펑 울든가 분노하든가 해야 했지만, 어쨌든 너는 결국 그걸 극복하고, 국가가 전액 부담하는 교육 시스템과 축제와 합법 마리화나와 드루즈(drooz)를 향해 네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 아이는 우유 한 사발에 떨어진 피 한 방울이었고, 그 미묘한 씁쓸함이 나머지 오멜라스의 단맛을 더 진하게 만들었다. 구멍 속 아이가 없다면, 오멜라스는 그냥 낙원일 뿐이다. 하중을 떠받치는 고통받는 아이가 있기에, 오멜라스는 무언가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물론, 도시 전체가 문자 그대로—비유가 아니라 아주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방식으로—그 아이의 고통 위에서 돌아간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정전 없는 전력, 좋은 학교, 낮은 범죄율, 지역 공동체 중심의 정부, 안전한 보도, 잘 돌아가는 대중교통을 정말 좋아했다.
온라인은 정말로 독해졌다. 그리고 세 번째 아이가 죽었다.
이번에는 살해범이 누구였는지 말하기가 더 어려웠다. 왜냐하면 첫 번째 그들(살해자들)이 두 번째 그들(“아주 좋은 집”의 그들) 속으로 스며들었고, 동시에 세 번째 그들(좋은 PPE를 갖춘 청소 노동자들과 뉴스 진행자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정확히 모든 방호 조치와 방음, 그리고 진정총을 들고 있는 병사들(오멜라스에는 실탄 화기가 없었다)을 빠져나가, 구멍에서 아이를 빼내어, 아주 좋은 집에 사는 사람들이 정부를 논의하기 위해 모이는 회의실에서 그 아이를 죽였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메시지가 없었다. 테이블 위의 죽은 아이 그 자체가 메시지였다. 죽은 아이는 오멜라스의 다른 모든 아이처럼(편안하고, 가격 합리적이면서도 품질 좋은 옷, 귀여운 무늬) 옷을 입고 있었고, 구멍에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 구멍 속 아이들이 통상 겪는 정말 끔찍한 외양—엉덩이에 생겨 진물 나는 상처, 가냘픈 팔다리와 튀어나온 배, 전신에 밴 축 처진 기름기 같은 것—을 아직 갖추지 않았다. 그래서 이 세 번째 죽은 아이는 그냥 조금 말라 보이고, 때가 꼬질꼬질 묻었고, 잠든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서쪽에서 지진이 나서 금이 가고 싱크홀이 열렸고, 자동차 네 대가 이상 사고로 빨려 들어갔다. 뉴스에서는 회의실에 차려진 채 찍힌 죽은 아이의 사진과 함께 이 이야기를 다뤘다. 그리고 오멜라스인들은 모두 아주 좋은 교육을 받았기에, 상징의 문학적 의미를 배웠고, 예쁜 옷을 입은 죽은 아이가 구멍 속 아이 역시 오멜라스 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상징이라는 걸 알았다.
나머지 세계는, 공교육의 질이 들쭉날쭉하고 언어 예술(국어·영어) 교사들이 과로에 시달리는 곳이라, 소셜 미디어에서 난리가 났다. 그 정서를 한마디로 줄이면 이랬다. “오멜라스가 완벽한 도시이고, 정말 좋은 사회복지 시스템이 있고, 피임 접근성이 높고, 자궁을 가진 사람이 자신이 임신해 낳은 영아를 원래 부모가 아니더라도 원해주는 사람에게 쉽게 맡길 수 있는 방법이 있고, 그래서 오멜라스에서는 모든 아이가 원해지고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는다면, 그러면 도대체 오멜라스인들은 하중을 떠받치는 고통받는 아이를 어디서 구하는가?”
그리고 뒤이은 또 다른 난리: “세상에, 그들이 우리 아이들을 훔치고 있는 게 틀림없어.”
물론, 이런 난리가 실질적으로 오멜라스에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오멜라스는 언덕 위에 빛나는 도시였고, 하중을 떠받치는 고통받는 아이가 없을 때만 상처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은 아이는 즉시 대체되었으므로, 오멜라스는 외국의 침공을 받지도 않았고, 무역 제재도 받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여전히 그 해변으로 놀러 갔다. 그렇지만 미디어 대응은 좀 필요했다. 그래서 아주 좋은 집 경험자들(=그 집들에 사는 사람들)이 TV에 나가, 하중을 떠받치는 고통받는 아이는 윤리적으로 조달되었으며, 누구의 아들도 아니고, 확실히 오멜라스인이라고 안심시켰다. 그러는 동안 아주 좋은 집 경험자들 중 일부는 사적으로 서로 이런 대화를 나눴다.
“이봐, 우리 아예 구멍 속 아이를 없애자고 하면 안 되나?” 아주 좋은 집 경험자 한 명이 말했다. “애당초 구멍 속 아이라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거였을지도.”
“그럼 대안이 뭔데?” 두 번째 아주 좋은 집 경험자가 말했다.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한 명의 아이를 구멍에 넣고, 그 한 아이가 비참한 삶을 살도록 두는 대가로 우리의 모든 아이들이 좋은 삶을 누리는 것보다 더 나은 해결책이 있다고 말해봐.”
“네 아이가 들어가면?”
그리고 두 번째 아주 좋은 집 경험자는 거기에 답을 하지 못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녀는 자기 아이를 구멍에 넣느니 오멜라스에 사는 모든 사람을 다 저주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짓이겠지.” 대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그 아이를 죽인 당사자 아니라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 질문은 여러 방에서, 여러 회의에서 반복되었고, 소리 지르는 싸움으로 번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싸울 때가 아니야. 아이는 구멍에 있어. 아이가 구멍에 있다는 건, 우리가 이렇게 내분을 할 시간이 없다는 뜻이야. 아이가 구멍에 있는 이유가 뭔데, 우리가 제대로 뭉치지도 못한다면!”
그 말에는 낙원에서 불화가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많은 철학적 함의가 깃들어 있었지만, 현실에서 이 개소리는 결국 아주 좋은 집 사람들의 주의를 흐트러뜨렸고, 그 틈에 네 번째 아이는 손쉽게—그리고 별다른 소란 없이—죽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눈사태가 있었고,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동성애 혐오가 퍼졌고, 진정총으로 벌어진 도로 분노 사건이 발생해 네 명이 죽었다.
하지만 그들은 네 번째 아이를 죽인 특정한 남자를 잡아냈다. 새로 설치된 24시간 CCTV에 찍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싱크홀 근처에 있는 그의 집에서 그를 체포했다.
살인자는 순순히 투항했다. 그는 아주 평범해 보이는 남자였다. 그에게서 살인자나 반체제 인사의 모습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오멜라스의 많은 사회적 안전망의 혜택을 누리며 자랐고, 고통을 알지 못한 채 성장한 다른 모든 사람과 아주 똑같이 생겼다.
사형 집행 전에, 그들(아주 좋은 집 사람들—뉴스 진행자의 대리—그리고 결국은 모두의 대리)은 그에게 왜 이런 짓을 했냐고 물었다. 살인자는 어깨를 으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케블라 구속복(외부에서 수입해 온)이 그를 꽁꽁 묶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모두 겁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짓을 했어.” 살인자가 말했다. “우리 모두는 고통받는 사람이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너무나 무섭기 때문에 그 망할 아이를 구멍에 처넣고, 그 아이는 영원히 고통받게 두지. 그리고 모두가 무언가 행동하기가 너무 무서워서, 우리가 고통 없이 더 나은 삶을 산다고 자기기만을 하지. 역겨워.”
그는, 고통을 오직 추상적으로, 그리고 하중을 떠받치는 고통받는 아이의 존재를 통해서만 알고 있던 전형적 오멜라스인의 도덕적 확신으로 말했다.
“당신은 뭘 해결하려 드는 겁니까?” 사형 집행자가 물었다. 방 안에는 그녀 혼자였지만, 그녀는 아주 좋은 집 경험자들의 질문—공개 설문을 통해 받은 질문을 추려 승인한 목록—을 대신 전하고 있었다. 결국 오멜라스의 모든 사람은 아주 좋은 집에서 살고 있다는 걸, 그들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우리가 아이들을 충분히 많이 죽이면, 너희는 결국 아이를 구멍에 넣는 걸 멈추게 될 거야.” 살인자가 말했다. “나는 가속주의자야.”
“네가 아이를 죽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어.”
“그건 미안해.” 살인자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진심처럼 들렸다. 그는 오멜라스 사람들의 안녕과, 괴이한 사고에 대한 그들의 취약함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것처럼 들렸다. 단지 그는 그 한 아이를, 조금 더 많이 염려했을 뿐.
“죽이는 기분은 어땠나?” 사형 집행자가 물었다. 이 질문은 목록에 없었다. 이 질문은 집행자 자신이 알고 싶어서 던진 것이었다.
“나빴어.” 그가 말했다. “하지만 평생 구멍에 갇혀 사는 것보다는 낫지.”
집행자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서 돌아서, 주사기와 약품을 준비했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살인자가 집행자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우리는 계속 구멍 속 아이를 죽일 거야. 너희는 우리가 구멍 속 아이들을 죽이는 걸 멈추기 전에 아이들을 바닥낼 거야. 네가 날 죽인다 해도, 이제 우리는 모두 하중을 떠받치는 고통받는 아이를 죽인다는 것을 알게 됐지. 너흰 나를 어떤 방식으로도—의미 있는 방식으로는—죽일 수 없어. 아이는 너희가 아이를 구멍에 넣는 일을 멈출 때까지, 다시 또다시 죽을 거야.”
그리고 그는 크고 하얀 미소를 지었다(오멜라스의 치과 진료는 매우 훌륭했고, 별도의 보험에 묶여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고통 없이 약물 주입으로 처형되었다. 그래서 오멜라스에서(하중을 떠받치는 고통받는 아이들을 제외하면) 국가로서의 오멜라스가 죽인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오멜라스는 약물 주입으로 사람을 죽이는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그건 괜찮았다. 왜냐하면 이 일은 아이가 구멍에 없던 기간에 일어난 우발이었으니까—태풍이 우발이었던 것처럼, 동성애 혐오가 우발이었던 것처럼, 오멜라스인들이 소셜 미디어에서 개떡같이 굴었던 것도 우발이었던 것처럼. 이건 오멜라스가 오멜라스가 아닐 때, 대신 다른 모든 도시처럼—하중을 떠받치는 고통받는 아이는 없고, 하중을 떠받치는 고통받는 어른들만 많은—그런 도시일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약물 주입 다음 날, 다섯 번째 아이가 구멍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 뒤, 사형 집행자는 오멜라스를 떠났다. 아무도 그녀의 떠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죽은 살인자는 오멜라스인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일은 한동안 순환적으로 계속되었다. 아이들은 연달아 여러 개의 구멍에 들어갔고,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 그 죽음들은 공영 방송에서 보도되었고, 소셜 미디어에서는 여러 각도에서 엉터리로 해부되었다.
예컨대: “이 아이는 제3세계와, 아이폰에 들어가는 희귀 금속을 캐는 노예 노동, 미성년인데 국경을 넘어 밭일하러 오는 소년들, 소아성애자에게 조혼으로 팔려가는 소녀들의 은유다.”
예컨대: “이 아이는 보살의 환생이며, 동포를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고 있으니 정말로—정말로—이 아이가 고통받는 건 완전히 괜찮다.”
예컨대: “왜 이 아이를 그렇게 신경 쓰지? 한 명일 뿐이잖아?”
예컨대: “그 아이는 하층민의 상징이고, 그들의 고통의 상징이다.”
예컨대: “아니 진짜, 그 아이는 어디서 오는 건데? 우리 엄마 말로는, 기차에서 아이 하나가 사라지는 걸 봤대. 대중교통에서 아이들을 납치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예컨대: “오멜라스 아이의 세포로 배양한 맥동하는 조직 덩어리를 만들어서, 그걸 감금실에 넣으면 같은 효과가 날까? 실험실 배양육이 기술적으로는 여전히 ‘고기’인 것처럼?”
이제 모두(뉴스 진행자들만 빼고)는 죽은 아이의 수를 세는 걸 멈췄고, 아무도 살인자들에게 더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죽은 살인자는 틀렸다. 그들은 아직 아이들이 바닥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살인자들도 아직 바닥나지 않았다.
요즘 오멜라스는, 완벽하다—완벽하지 않을 때를 제외하면. 그리고 가끔, 오멜라스에는 일련의 자연재해와 괴이한 사고가 닥치고, 모두가 자기 아이가 다음 구멍에 들어갈까 봐 조금씩 두려워한다. 다만 그건 아이가 죽고, 새로운 아이를 선정해야 할 때만.
우유 한 사발에 피 한 방울.
오멜라스는 이제 위키피디아 항목이 엄청 길다. 하중을 떠받치는 고통받는 아이에 대한 하위 문서가 따로 있고, 죽은 아이들에 대한 두 번째 하위 문서도 있다. 그들은 이제 아이들이 죽은 다음에야 아이들에 대해 알려준다. 이름이 무엇인지. 아이들은 윤리적으로 조달되었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출처 표기는 없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제 구멍 속에는 아이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구멍의 위치를 여러 번 옮겼고, 더 이상 위치를 공개하지 않는다. 방음도 추가했다.
대부분의 날, 오멜라스는 맑고 아름답고, 아무 일도 나쁘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다 흐리고 구름 낀 날이 오면, 그날에는 사람들이 서커스 사고와 일산화탄소 누출로 죽고, 트위터에서 괴롭힘 캠페인을 시작한다. 그리고 가끔 그날에는, 사람들이 약물 주입으로 죽기도 한다. 그래서 분명해진다. 어떤 때에는 아이가 살아 있고 고통받고 있으며, 어떤 때에는 아이가 죽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혹은 어쩌면 이제 아이는 아예 없고, 오멜라스는 다른 모든 곳과 똑같은지도 모른다. 운이 좋을 때까지는 괜찮다가, 아닌 순간이 오는—그런 곳.
가끔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오멜라스로 들어와, 아주 좋은 집의 발코니 중 하나에 서서, 혹은 오멜라스의 아름다운 해변 중 하나에 앉아서 영상을 찍는다. 그들은 오멜라스의 역사를—사람들이 중국의 위구르 상황, 제3제국의 수용소, 일본이 한국에서 끌어온 위안부, 벨기에령 콩고, 미 남부와 관련된 대서양 노예무역, 그리고 서유럽 연안에서 난파해 가라앉는 난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오멜라스를 찾는 이들)은 말한다. 다행히 우리 사회엔 그런 끔찍한 상처가 없다고. 다행히 저렇게 지독하게 상황이 나빠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곳이 어딘가에 있다고. 저건 구덩이라고. 저건 조까튼 작은 트롤리 문제라고. 저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라고. 다행히 우리가 그곳에 살지 않는다고. 다행히 그곳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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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오멜라스 패러디 소설 엄청 많더라
주제 자체가 워낙에 흥미로운지라 그런듯 - dc App
재밌게 읽었다 ㄱㅅㄱㅅ
나말고 미래의 아카일렉트에게 감사하시오 파딱 - dc App
오 우리의 르 귄 여사가 제시한 오멜라스 월드에 또 다른 버전이 추가되었군 제기하기는 쉽지만 답하기는 어려운 문제들 (아니 답이 있기는 한가)
답이… 애초에 문제 자체가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질텐데ㅜ있을리가…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