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이렇게 수없이 오고 가는 중에, 그 작용은 ‘탄생’으로, ‘자람’으로, ‘수렴’으로, ‘저장’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나,

그러한 변화의 바탕이 되는 ‘텅 빈 하나’는 움직이는 법이 없다.

오직 불변하는 자만이 만변하는 만물을 굴릴 수 있는 법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을 살아가는 이 ‘하나’야말로,

항상 그대로인 우리의 본래 자리이자, 우주 만물의 뿌리가 되는 자리이다.


만변하는 ‘음양’의 뿌리는 불변하는 ‘하나’(태극)이며,

하나의 뿌리는 불변하는 ‘텅 빔’(무극)이다.

고로 만변하는 ‘음양’은 불변하는 ‘하나’와 ‘텅 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본심이 되는 ‘텅 빈 하나’는 무극·태극·황극이라는 3극의 원리를 모두 갖춘 하나이다.


15. 생각·감정·오감은 끊임없이 변화하나, 그러한 변화의 바탕이 되는 ‘본심’은 움직이는 법이 없다.

인간에 내재한 ‘텅 빈 하나’인 ‘본심’은 본래 ‘태양’의 광명함에 뿌리를 두고 있다. ‘태양’은 신의 모습을 상징한다.

신은 알⊙이니, 태양은 알의 중심이 되며, 태양의 빛이 미치는 범위는 알의 주변이 된다.


태양은 만물을 꿰뚫어 보는 광명한 ‘지혜’와, 만물을 살리는 ‘자비’, 만물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능력’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처럼 지혜롭고, 자비롭고, 강력한 능력을 지닌 태양과 같은 하느님이 우리 인간의 참 마음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본래 마음 또한 지혜롭고, 자비롭고, 강력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부동하는 ‘광명한 본심’에 뿌리를 두되, 만변하는 음양의 현상계에 ‘생각·감정·오감’으로 작용을 나타내니,

그 진화와 성장에는 다함이 없다.

한없이 궁극의 완성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16. 우리가 머릿골에 내려와 계신 ‘하느님’인 이 ‘본심’을 온전히 되찾고,

이 본심의 공덕을 생각·감정·오감 차원에서 온전히 구현하게 되면,

사람의 광명한 ‘하나’ 안에서 하늘과 땅은 ‘하나’로 합해지게 된다.

이는 억지가 아니요, 본래 ‘하나’였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본심’은 본래 ‘하늘’에 속하는 것이니,

본심이 회복될수록 우리 내부의 ‘하늘’은 점점 밝아지며,

우리의 ‘생각·감정·오감’은 본래 ‘땅’에 속하는 것이니,

공덕이 원만해질수록 우리 내부의 ‘땅’도 점점 밝아진다.

인간은 본래 하늘과 땅의 중심이 되니,

본성에 통하고 공덕을 원만하게 닦을수록,

인간 안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루며 작용하게 된다.


이렇게 이루어진 ‘하나’는 사실 ‘일곱’으로 묘하게 불어난 하나이며,

천지인이 각각 ‘셋’으로 극치에 이른 ‘아홉’으로 모든 변화의 극치를 이루는 하나이다.

하늘과 땅을 인간 안에서 하나로 합하여 ‘온전한 하나’를 이루게 되면,

불변하는 ‘하늘’과 하나로 합하게 되어, 영원히 변치 않는 ‘본심’을 온전히 되찾게 되며,

만변하는 ‘땅’과 하나로 합하여 변화하는 시공간 안에서 생각·감정·오감으로 ‘지혜·덕·능력’을 ‘때’와 ‘장소’와 ‘관계’에 맞게 부리게 된다.


하늘·땅과 하나 된 사람은, 자신을 닦고 남을 돕기 위해 만 번 오고 만 번 가면서도,

늘 오고 감이 없는 그 자리를 놓치는 법이 없다.

그리하여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서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늘·땅·사람·만물과 조화를 이루는,

가장 균형 잡힌 ‘최고의 선’을 실현하니, 이것이 하늘과 땅에 참으로 합하는 ‘인간의 길’이다.

우리가 이러한 인간의 길을 걸을 때, 시공을 초월하여 계시는 하느님의 진정한 화신인,

‘지금・여기·이렇게’의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17.하늘·땅·사람이 조화를 이루어 묘하게 불어난 ‘하나’(일곱)는 결국 본질상에서 ‘텅 빔’일 뿐이며,
‘텅 빔’은 다시 이 묘하게 불어난 ‘하나’로 자신을 표현해 낸다.
따라서 만물의 근본인 ‘하나’와 ‘텅 빔’도 모두 이 묘하게 불어난 ‘하나’인 ‘일곱’에서 온전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아홉’으로 대표되는 현상계의 모든 변화는 본래 ‘하나’이며, ‘하나’는 본래 ‘텅 빔’이다.
그러니 ‘열’을 궁극의 이상으로 삼고 ‘아홉’으로 무한하게 변화하는 현상계 또한, ‘하나’와 ‘텅 빔’처럼 영원한 것이다.
‘텅 빔’과 ‘하나’는 ‘아홉’의 변화를 낳고,
‘아홉’의 변화는 ‘텅 빔’과 ‘하나’의 무한한 변화와 다양성을 매 순간 현상계에 실현한다.

따라서 참된 ‘인간의 길’은 지금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텅 빔’과 ‘하나’와 그 표현이 되는 ‘일곱’을 조화롭게 다스려, ‘매 순간’ 성장해 가는 중에 이루어진다.

⋮ 우리는 한 편으로는 ‘텅 빈 하나’를 지키며
한 편으로는 ‘생각·감정· 오감’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시공간 안에 표현하는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7이 되어야 1은 온전해진다.

우리가 수련을 하는 목적은 ‘무극·태극의 자각’과 ‘황극의 성취’에 있다.
생각·감정·오감을 씀은 1이 부풀려진 7의 모습이며, 1의 완성이다.
그러니 1도 끝나기를 이 온전해진 1인 7에서 하는 것이며, 0도 끝나기를 온전해진 1인 7에서 하는 것이다.
‘성통공완’, ‘도덕합일’, ‘중용’을 이루어야 하니,
자신 안에 천지를 품어 하나로 합일시켜 큰 덕·큰 지혜·큰 능력을 지닌 생각·감정·오감의 성취를 이룬 이라야
진정한 하느님의 분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0은 ‘있음’이요, 1은 ‘내가 있음’으로 모든 현상계의 ‘다양한 있음’의 직접적인 뿌리가 된다.
고로 1은 창조자이다. 창조자는 창조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바,
1은 결코 그 창조 행위를 멈추는 법이 없다. 창조하지 않는 1은 이미 1이 아니다.
1이 존재하는 한 3은 자동으로 생겨나며, 5와 7로 불어나게 된다.
그리고 보다 더 온전해지기 위한 유형 만물의 생장수장(6·7·8·9)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이것이 지고의 신성한 하느님의 계획이다.
모든 존재의 뿌리이자 모든 존재를 그 안에 품고 있는 ‘텅 빔’(0)이 천지만물의 창조를 위해 ‘움직임’(1)에 그 품은 신성한 계획이
1차적으로 시공을 초월한 ‘무형의 원상’으로 표현되며,
이러한 원상을 바탕으로 최종적으로 시공 내에 유형의 사물로 표현된다(5→7).

0은 ‘존재하는 것’이 본성이요, 1은 ‘창조하는 것’이 본성이며, 5는 중심을 잡고 다스려 ‘경영하는 것’이 본성이다.
‘중심 잡음’·‘균형 잡음’이 상하사방전후의 입체를 이룰 때 온전한 1인 7이 나오며,
그 균형이 정밀해질 때 9가 이루어진다. 각각의 본성이 제대로 작동될 때 우주는 그 기능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다.
인간이 천지의 변화에 발맞추어 ‘황극’을 잡지 못하면 우주는 그 기능이 어그러지게 된다.
천지는 자리를 잃게 되고, 만물은 제대로 길러지지 못한다.
인간이 본심을 각성하여 천지를 품을 수 있게 되면, 천지는 제자리를 찾고, 만물은 조화롭게 길러지게 된다.

윤홍식의 용호비결 강의(개정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