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필요한 리더는 세종 같은 리더고, 그런 리더는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안 되고 노자에 나와요.
진정한 리더는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안 되고 통나무가 돼야 된다.
통나무를 쪼개서 동그랗고 네모난 그릇을 만들죠.
네모난 여기다가는 이제 못 담을 게 생겨요. 동그란 거에다가 또 네모를 못 담을 수도 있어요.
그죠? 다양한 그릇이 나오죠. 그 노자가 이 통나무(樸자), 이건 흩어질 散자, 쪼갤 散자, 樸과 散 얘기해요.
"樸이 道다." 그리고 천자는 樸과 같아야 된다.
각 장관들은 散과 같은 자기 분야만 잘하면 돼요. 이게 이걸 못하죠. 이 기능을 이 친구가 못해요.
애가 하는 기능을 얘가 못 해요. 즉 장관들은 그래도 돼요.
그니까 내가 그 무슨 농수산부 뭐 장관이다,
요즘 뭐 하도 부서가 잘 바뀌어서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무슨 뭐 지식경제부 장관이다, 그럼 그거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거 못 한다고 해서 흠이 안 돼요.
근데 천자는 어떤 의미에서 다 잘해야 된다. 되지만 어떤 의미에서요?
그 이렇게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
노자에 나오는 양심 경영, 무위의 경영, 그 양심의 전문가야.
양심의 전문가가 돼서 각 장관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그 부서에서 다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에요.
그래서 그들이 결코 양심이라는 그 길을 잃지 않도록 계속해서 자극 주는 존재예요.
양심을 잃어버리지 않게. 동양에서 원래 천자관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천자는 무위여야 된다는 게요.
하는 게 없어야 된다는 게 사심으로 하는 게 아니고,
천자는 각부 장관들이 자기 역할을 다 할 수 있게 리더가 돼서
양심의 화신이 돼서 계속해서 응원해 주는 그 태양 같은 존재가 돼서 빛을 대줘야 된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계속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주면 된다는 거,
그니까 무위라고 하는 거. 천자는 하는 게 없어야 된다는 게
어느 특정 부서에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이 양반은 그렇게 하는 게 없다는 게 이런 거예요.
그냥 하는 게 없는 게 아니죠. 사실은 온몸으로 양심을 구현하고 있어야 돼요.
어떤 특정 분야의 전문가일 필요가 없다는 얘긴 거죠.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태양이 여러분 빛을 때려 주죠. 그 지구는 어때요? 지구에 있는 태양열을 받아서 만약에 우리 지구 기계들이 돌아간다고 했을 때,
여러분, 돌아가는 기계는 다 다르죠.
태양 빛은 하나인데 받아서 쓰는 그 각 그릇들은 다양하잖아요.
그 빛을 가지고 누구는 보일러를 돌리고, 누구는 기계를 돌리고, 누구는 시계를 구동시키고,
이런 것처럼 이런 존재가 돼야 된다는 게 동양의 리더관이에요.
그래서 논어에도 임금은 북극성 같아야 된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주변을 다 움직이게 할 수 있어야 돼요.
북극성을 중심으로 별이 돌듯이.
그럼 그 사람이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요,
별이 그 사람 중심으로 일단 안 돌겠죠.
그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양심을 구현하고 있고,
그걸 통해서 아까 말씀드렸듯이 양심의 힘으로 백성들과 신하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야 해요.
신하들이 감히 그 사람 앞에서 사기를 못 치고,
어차피 깨질 게 분명하니까 양심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해요.
세종 때 그런 맛을 냈으니까 우리나라의 태평성대가 온 거예요.
그 당시 아주 완벽한 태평성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정부랑 비교해서 탁월했던 이유는요,
임금이 온몸으로 양심을 좋아하고 양심을 구현하고 있으면요,
신하들은 거기 맞추게 돼 있어요. 어쩔 수 없이.
지금 이재용 씨가 온몸으로 양심을 좋아하고 양심으로 경영을 즐긴다면
밑에 그런 참모들, 그런 직원들만 남게 된다니까요.
자꾸 위로 올라오게 돼 있고 신기하죠.
그 자기는 안 움직였는데 알아서 전문가들이 붙어서 이게 돌아가요.
그 나라를 운영하는 것도 대통령이 모든 걸 다 꿰야 되는 게 아니고, 그래서 전문가를 따로 뒀어요.
근데 대통령은 뭘 책임져야 된다고요? 그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건 대통령 책임이에요.
사기 안 치고 양심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그 역할을 리더가 해줘야 돼요.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 가야 될 길이라는 걸 정확히 비전으로 제시해 줘야 돼요.
'이게 우리 미션이다'하고 또 구체적 비전으로 제시해 줄 수 있어야 돼요.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살아야 돼요.
그래서 중용에서도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방책을 얘기해 주는데,
신하나 백성 관리가 다 나오는데 첫째가 뭐죠? 수신.
리더가 양심적으로 사는 게 제일 먼저예요.
그러면 나머지가 돌아간다는 거죠. 뭘 특별히 안 해도 돌아간다는 거예요.
리더가 양심적으로 살고 있으면 이래라 저래라 안 해도 신하들이 변해서 움직여요.
부모님이 똑바로 살고 계시면 특별히 뭐라고 인성 교육 안 해도 자녀가 올바르게 돼 있다니까요.
왜냐하면 부모님의 삶이 그대로 자기 인생의 모델이 되기 때문이에요.
부모님이 사기를 치고 살면 자녀한테 어떻게 될까요? "
이럴 때 우리 어머니는, 우리 아버지는 뇌물을 그냥 받았는데..."라고 흔퀘히,
그게 자꾸 그걸 보고자 하면요, 받는 게 쉬워져요. 절대 안 받으신 걸 보고 자랐다고 생각해 보세요.
받기 힘들어요. 이 저항이 심합니다.
근데 리더가 절대 그런 짓을 안 하고 있어요.
그 밑에서 하기 힘들어요. 리더가 해요. "에이, 리더는 더한 것도 하는데 나는 이 정도야"하고 합니다.
이게요, 이게 지금 그 알 수 없는 작용이라는 거예요.
이 힘을 이용하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앞으로 많은 실험을 해보겠지만, 우리가 이걸 잘한다는 게 아니라
이래야 한다는 걸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양심 정치가 그냥 오는 게 아니고, 지금 일반인들은 양심 정치를 사실 이해 못 해요.
혜택을 입고 싶어 하긴 하는데 무슨 원리로 양심 정치가 돌아가는지,
왜 우리는 계속 이 모양으로 사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모르세요.
중용 한번 제가 그래서 읽어 드리려는 거예요.
이 부분부터 한번 읽어 드릴게요. 3장인데 제 책에서 3장입니다.
주자가 나눈 그 장하고 제가 다르게 나눴기 때문에 일단 제 중용 책 기준으로 말씀드릴게요.
같은 데도 있고 다르게 들리실 수 있으니까.
3장에 "중용은 균형 있는 앎과 실천에 달려 있다." 보세요.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중용은 참으로 지극하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 중용을 능히 할 수 없는 지가 오래되었다."
사람들이 중용을 못하게 된 지가 오래되었다는 거죠.
예전에 성인들이 다스리던 시대에는 그래도 흉내를 냈는데,
요즘은 아주 그냥 아무도 안 한다,
다 욕심만 부리고 산다는 얘기입니다.
"나는 도가 왜 행해지지 못하는 이유를 안다."
왜 사람들이 중용, 즉 가운데 '중'자를 우리나라에서 대충대충 적당히 주의로 아시면 안 됩니다.
중은 딱 한복판에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한 걸음만 더 나가도 과해져서 과하면 동양에서 악이에요. 조금 모자라면 부족이 되죠.
부족은 악이에요. 동양에서 중이라는 의미는 선이랑 같은 뜻이에요. 선하다, 선은 딱 맞는 게 선이에요.
딱 그만큼만 해야지, 더해도 악이고 모자라도 악이에요.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도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쓸 때 거기서도 중용을 결국 강조해요.
철인은 결국 중용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된다. 그래서 보세요.
더 나가면 객기, 전쟁터의 군인이 오버하면 객기, 부족하면 비겁, 용기가 중입니다. 이해되세요? 이게 제일 쉬운 비유입니다.
딱 적절한 용기가 중이지, 객기를 부리는 게 아니에요. 객기를 부리면 그것은 악이에요. 과했기 때문에.
모자라서 비겁했다면 그것도 악이에요.
그러니까 최적의 상태를 말해요. 양심에 최선을 다했을 때, 조금만 과해도 찜찜해요. 부족해도 찜찜해요. 딱 이때만 자명합니다.
그래서 이게 자명함, 양심의 제일 자명한 걸 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중용은 적당하게 사는 게 아니에요.
불교 스님들 중에 "불교의 중도는 똑같은 건데, 유교의 중용은 대충 적당히 하는 거고 우리 불교의 중도는 아주 형이상학적인 거다" 하시는 분들은
중용이 뭔지도 모르는 분들이에요. 제 말 듣고 다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도가 왜 행해지지 않는지 난 안다.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머리 좋은 이들은 지나쳐서 악이 돼요. 그래서 중용이 안 돼요.
지혜로운 자는 너무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모자랍니다.
양심을 이해 못하면요, 양심을 넘어가 버려도 안 되고 이해를 못 해도 또 악이 돼요.
그래서 행해지지 않는 겁니다.
근데 이게 재밌죠. 실천의 문제를 갖고 얘기했어요.
공자가 "도가 왜 실천되지 않는지 난 안다. 머리가 너무 좋은 자들은 과하고 모자라는 자들은 이해를 못하기 때문이다." 근데 재밌죠.
실천 얘기를 하면서 인식의 얘기를 합니다. 아는 게 과해도, 아는 게 모자라도 실천으로 연결이 안 된다는 얘기죠.
그다음 보세요. 도가 왜 밝아지지 않는지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왜 사람들이 모르는지 내가 이유를 안다. 근데 실천의 얘기로 얘기합니다.
인식의 문제인데 왜 도를 인식 못하는지 난 안다.
그때는 또 실천을 갖고 와요.
현명한 자라는 것은 유교에서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에요.
현명한 자는 지나치고, 실천을 잘하는 사람은 지나치고, 불초자, 실천력이 딸리는 사람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어요? 좀 생각해 봐야 될 얘기예요. 도가 왜 실천이 안 될까요? 모르니까요.
머리가 좋은 사람은 너무 과해서 오버해 버려요. 그러니까 실천이 안 되죠.
인식이 잘못됐기 때문에 실천이 안 되는 거예요.
지적으로 모자라면, 어리석으면 도가 뭔지 정확히 모르니까 실천이 안 되죠.
그리고 또 왜 우리는 도에 대해서 모르는 걸까요?
실천력이 좋은 사람은 자기 실천에 만족해서 더 알려고 안 해요. 그래서 지나치다.
"나처럼만 하면 되지" 하고 도에 대해서 연구를 안 해요. 그러니까 몰라요.
반면에 불초자는 행이 딸려요.
"지금 내가 아는 것도 다 못 하는데 뭘 더 알아야 하나" 하고 이해를 안 해서 도를 몰라요.
재미있지 않나요? 이 말씀 안에
인식이 잘못되는 건 실천의 문제고, 실천이 잘못되는 건 인식이 잘못돼서 그렇답니다.
이래서 아는 것과 실천이 딱 균형을 이루는 게 제일 귀한 겁니다.
아는 거랑 실천이 일치하는 게, 제가 얘기하는 체험과 개념의 일치죠.
아는 거랑 실천을 일치시키는 게 중요해요.
여러분, 아는 게 너무 많으면 실천으로 연결이 안 되고,
아는 게 모자라도 실천이 안 되고,
실천력이 좋아도 또 알려고 안 하고, 실천력이 딸려도 또 알려고 안 하고...
이러다 보니까 결국 아무도 제대로 알고 행하지 못하게 됐어요.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마시지 않은 이가 없으나 맛을 아는 이가 드물다고 하죠.
제가 볼 땐 다들 양심대로 살고 있어요, 자기도 모르게.
그런데 그 중용을 사람들이 모르게 됐어요.
사실은 일반인들 다 알죠, 자명한지 찜찜한지 계속 느끼면서 살잖아요.
그러면서도 자명한 걸 자명하게 실천하지 못해요.
자명하게 알고 자명하게 실천하면 끝나는 일인데,
실천이 과해도 문제가 생기고 아는 게 과하거나 부족해도 문제가 생겨요.
불교도 마찬가지예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해요.
더 파고들어서 "뭔가 음모가 있을 거야" 하고 더 파고들어도 안 되고,
실상만 알아야 되는데 실상도 파악 못 하는 게 모자란 거고, 실상 파악이 되는 게 딱 중이에요.
더 나가서 "일루미나티가 있을 거야", "외계인들이 뭔가 했을 거야" 하면서
일반인들이 아는 데서 멈추지 못하고 더 나가는 것도 문제예요.
너무 멀리 가면 행이 안 나와요. 그 행이 엉망이 되는 거예요. 행이 엉망인 것은 아는 게 엉망인 거라는 거에요.
아는 게 엉망이면 행위도 엉망인 거고,
자기가 실천력이 좋다는 이유로 더 나아가려 하지 않는 것도 문제죠.
자기가 아는 것만을 전부라고 믿고 있는 거예요.
제가 이걸 실감하는 게, 여러분 여기 오셔서 지도할 때 아는 게 많은 분들은 참 지도하기 힘들어요.
아는 게 많은 머리가 복잡해서 실천이 안 되는 거죠.
또 이런 분들도 문제예요. 현명한 자.
진짜로요, 여러분. 인생에서 되게 잘 살아요. 이런 분들은 또 공부하려고 안 합니다.
양심을 알려고 안 해요. 이미 너무 잘 살고 있어요.
자기가 볼 때 자기가 너무 뿌듯해요.
내가 지금 자기 개발서도 써도 모자랄 판인데 양심을 공부하라고 안 해요. 신기하죠? 여기 딱 써 놨어요.
공자님이 "모자라는 사람들은 어차피 안 되는데, 과해도 안 된다"는 게 문제예요.
과한 분들이 더 힘들 수도 있다는 게 있어요. 모자라면 또 배우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양반들이 더 희망이 있어요.
근데 현명하거나 지혜로운 사람은 배울 의지가 없어요. "나만큼만 하라."
그래서 어제도 어떤 분이 양심에 일단 그런 말씀 들으면 무서워요.
제 페이스북에 연락해서 "제가 평생 양심의 길을 살았는데 맞는 것 같아요. 이렇게 뜻이 합하는 것 같아요."
그럼 제가 부담스럽죠.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그니까 이게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오판하고 계시면 안 되는데,
주변 분들한테 물어보면 분명 다른 말이 나올 것 같은데... 아무튼 이런 게 이해되시죠?
그래서 공자가 최종적으로 결론 내리길 "도가 행해지지 않는구나, 참 힘들겠구나." 일반인이 이렇게 힘들어요.
그 만약에 양심 얘기를 했을 때 이해가 안 되는 분은 어차피 힘들고,
이게 제 말이 이해가 안 돼서 힘든 분 있고, 그게 어리석은 사람이고요.
이 유형이 불초자예요. "아, 그거 알겠는데 잘 안 돼요." 그게 불초자예요.
근데 어떤 분은 현명한 자라고, "나? 몰라, 너무 잘돼요. 어, 원래 다 그렇게 사는 거 아닌가요?" 해서 말을 안 들어요.
"원래 뭐, '몰라 괜찮아'는 기본 아닌가요?" 하면서 보면 양심적이지 않아요.
뭐, 이게 현명한 사람,
지혜로운 자는 "아, 그거는..." 자기가 "나는 책도 썼다" 거기에 대해서 막 이러면서 넘어가는 거죠.
'몰라 괜찮아'만 하면 되는데, 이제 막 기법을 막 수백까지 만들어서 보면 본인은 '몰라 괜찮아'도 안 하고 살고 있고...
자, 이런 경우들이 이렇게 사람들이 공부하기 힘든 케이스로 나온 거예요.
중용이라는 게 별거 아닌데 딱 양심에 울림 그만큼 하는 건데, 그게 어려워요.
사실은 그렇죠? 이게 올바른 성인상입니다.
이런 존재가 있으면 성인이에요. 그냥 그래서 중용에서 성인을 얘기할 때 뭐라고 얘기해요?
고민 안 해도 답을 알고, 그니까 양심, 뭐가 옳은지 알고, 고민을 안 해도 딱 중이 뭔지 알고요,
노력을 안 해도 중을 할 수 있는 사람. 이해되시죠? 고민하지 않아도 이게 자명해요.
"이건 오바야" 이게 감각이 딱 있는 거예요.
찜찜찜찜, 자명... 빨리 알아내고 자명했으면 빨리 해버려요.
노력을 안 해도 한다는 거는 그냥 쉽게 그게 돼요.
근데 불초자는 어떻죠? 알아도 잘 안 돼요.
알아도 알아도 안 되는 경우가 있고,
일단 알기가 어렵고, 혹시 알아도 못하고... 문제가 있죠.
그래서 이런 말씀도 드리고 4장 한번 읽어볼게요.
이게 중용에서 구체적인 리더상을 정확히 기술해 준 게 이겁니다.
순임금이 동양에서 최고의 성인 군주요,
양심 리더로 최고 표본이에요.
공자께서 "순임금이야 말로 위대한 지혜를 지니셨던..." 그럼 순임금만큼 하면 돼요.
동양의 모든 군주들은...
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고 천박한 말들을 살피기를 좋아하셨어요.
순임금은 일반인 누구한테라도 물어요.
농부한테 묻고 다 물어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막 날리는 천박한 말들도 잘 살폈다.
거기에서도 혹시 선이 있나 살폈다는...
양심 있으면 해버릴게요.
이 우주에 있는 양심을 내가 다 알 수가 없어요.
한 개인이 다 그걸 알고 구현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 내면에 있는 양심으로부터 정보를 최대한 얻어내려는 거예요.
고수는 이래요. 하수는 자기 것에 도취되는데,
고수는 지금 지나가는 사람한테도 양심을 취하고 싶어요.
그럼 그 사람한테도 좋은 일이죠. 그 사람도 양심을 구현하게 되니까.
그니까 이 공부에는 이제 나와 남이 없어요. 이 경지 가면요,
내가 내 양심 구현하니 남도 그 사람의 양심을 구현하게 돼야 돼요.
천지가 다 양심을 구현해야 돼요. 그러니까 당연히 이렇게 돼 있습니다.
남의 말을 듣고 그 사람 말 중에 자명한 걸 취해 쓰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묻기를 좋아하고 천박한 말들을 살피셨으며,
그래서 들은 말 중에 악은 물러나게 하시고 악은 세상에 발현되지 않게 하시고 선은 드러나게 하셨다.
남이 한 말 중에도 선한 거는 꼭 현실화되게 도와주셨다.
이런 분이 리더가 되면 어떨까요? 국민들 안에 있는 양심까지 다 구현되는...
그래서 우리 그 홍익당에서도 이런 얘기를 드린 거예요. 국민들이 양심이 돼야 돼요.
https://www.youtube.com/watch?v=S6vgd2ISahQ

- 홍익학당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bohd)- 홍익학당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HongikHdpg)- 홍익학당 후원하기 국민은행 879601-01-245696 (흥여회)- 문의전화 02-322-2537본 동영상은 ...
www.youtube.com
1차... 계속 작업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