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잘 살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내가 육바라밀을 해야겠다'라는 마음을 먹게 되는 그런 과정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결국 영성 지능이 계발돼서 그래요.
그 전에는 안 봐요.
고생한다고 보는 것은 아니에요.
고생하면 자살을 하지,
육바라밀을 하려고 생각 못 해요.
즉, 그 사람의 이게 불교적으로 말하면 선근이에요.
선근, 선근이 있어야 돼요. 선한 근기.
요것은 결국 육바라밀을 수행할 때 생겨요.
이것이 깊어져야 육바라밀을 잘하고,
즉 우리가 자기도 모르게 도를 닦아야 돼요.
즉, 고생을 할 때도 양심으로 문제를 풀려고 접근하는 것 자체가 바로 수행이에요.
그런 분한테 결국 참나가 이제 주어지죠.
선근이 개발되면서 두터워지면서.
그러니까 이 선택의 기로에서 육바라밀 선택을 안 해버리면
계속해서 영성지능이 계발될 수가 없고 사실 우리가 참나를 만날 수도 없죠.
그래서 그런 부분도
그럼 태어날 때부터 성이 다른 거예요?
다르죠. 그건 불교식으로 말하면 전생 공덕의 차이죠.
전생 공덕이, 그러니까 이 선근이 깊으면 어떤, 뭐랄까요?
그 더 적게 경험하고도... 어, 육바라밀 공식이나 진리를 더 선명히 빨리 파악하고요.
선근이 두텁지 못하면 체험을 아무리 해도,
고생을 아무리 해도 포착을 잘 못 해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가 안 보여요.
그러니까 예수님 같은 분은 31살의 도를 펴는데,
그럼 31살에 체험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어요?
근데 그 체험에서 뽑아내요.
'우주가 이렇게 굴러가는구나, 우주는 나에게 육바라밀을 하라고 얘기하는구나.'
요걸 포착해 내고. 영성 지능이 떨어진다,
즉 선근이 부족하다 그러면 이 포착이 잘 안 돼요.
주변 환경도 잘 안 도와주겠지만 본인의 지능도 떨어져요. 사실은
지능이에요. 모차르트가 다 뭐 몇 살 때, 다섯 살 때인지 악보를 그렸다. 그럼 이것은 못 따라가잖아요.
그 전에 해놓은 그 분야의 어떤 근기가 다른 거죠.
똑같아요. 이것은 본인이 지금부터 투자를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 그 음악은 투자 안 하셔도 되는데,
모차르트처럼 될 필요가 없는데, 사람인 이상 이건 닦아야 되거든요.
왜냐하면 사람인 이상 죽을 때까지 우리는 선택을 해야 돼요.
그 끝없는 선택이 우리 선근에 바탕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선택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음악은 안 할 수 있지만 안 살 수가 없잖아요.
산다는 건 끝없는 선택이고 선택은 결국 선악의 결과를 낳습니다.
즉 이왕이면 선의 과보를 지으려면 우리는 육바라밀 공부를 해야 되고,
예...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연구를 해야 되고, 선은 하고 악은 안 하는 그런 연구도 해야 돼요.
그러니까 저는 항상 이것은 우리가 무조건 해야 되는 거고,
사는 중에 자기도 모르고 육바라밀을 닦아요.
인욕도 하게 돼요. 참아, 참아야 될 것, 수용해야 될 것은 참아요.
어떤 때는 흔쾌히 참을 때도 있단 말이죠.
'끙' 하고 참을 때는 덜 육바라밀이지만...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우주적인 신성이 있기 때문에 가끔 이게 조건이 맞으면
흔쾌한 기분으로 할 때가 돼요.
그러니까 그때그때 조금씩 우리는 사실 영성을 닦고 있는 거죠.
자기도 모르게. 흔쾌하게 남한테 기분 좋아서 뭘 줬을 때 보시바라밀 하신 거예요. 자기도 모르게.
정확한 원리는 모르고 있지만 내 내면에 기뻐서 한 거니까 사실 양심의 인도를 한 거랑 똑같아요.
자기도 모르게 해요, 지계의 룰을 지켜요.
어떨 때, 그 진짜 갖고 싶긴 하지만 '아, 안 가져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즉 양심의 인도를 따르기만 하면 다 바라밀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가끔 양심의 소리를 선명히 들을 때 있죠?
그 때 선근이 쌓이는 거예요.
그러면서 여러분의 지능이 계발돼 있어요.
그 안목이 있어야 힘들 때도 올바른 선택을 하고, 내 안에 참나도 찾게 되고 이런 식으로 계발될 거라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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