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은 '깨달은 중생'이다.
그는 늘 열반에 안주하기에 '깨달은 자'이며
늘 현상계에 머물기에 '중생'이다.
에고의 개체성이 없이는
온전한 '중생'이 될 수 없다.
온전한 중생이 되지 못하면
중생계에서 수작을 할 수 없다.
선에 복을 주고 악에 벌을 주는 것은
'인과법' 그 자체인 '법신불' 비로자나불의 목이나,
중생계 안에서 복 받을 선을 짓고
벌 받을 악을 짓지 않는 것은
오직 '깨달은 중생'의 몫이다.
보살은 비로자나불이 개체성을 입은 존재이다.
비로자나불은 에고를 초월한 부처이며
보살은 에고를 입은 부처이다.
본체가 부처이며
작용이 보살이다.
깨달은 중생인 보살이 없다면
중생이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사바세계는 어떻게 정토가 될 수 있겠는가?
이 현상세계의 혼탁한 카르마를 그 누가 정화할 수 있겠는가?
이 세계는 비로자나불이 없어서
혼탁해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중생인 보살이 없어서 혼탁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윤회를 떠나 열반에 안주하거나,
전지 전능한 비로자나불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
오직 '보살'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사명이다!
보살이야말로 이 시대에 필요한
인간의 모습을 한 부처이다.
우리 모두 철저히 중생으로 살아가되
깨달은 중생이 되며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화엄경이 10지 보살을
중생의 궁극의 경지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깨달은 중생'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현상계는 ‘카르마karma’로 굴러간다.
카르마의 결이 모두에게 이로울 때 ‘선善’을 이루며
모두에게 해로울 때 ‘악惡’을 이루게 된다.
통에서 벗어나야 통을 굴릴 수 있듯이
카르마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카르마를 경영할 수 있다.
우리를 보살로 인도하는 선禪은,
우리를 곧장 카르마를 초월한
참나(열반)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하며,
현상계의 카르마를 영원히 저버리지 않으면서
모두에게 이롭게 경영하도록 돕는 참선이어야 한다.
참나에서 온갖 공덕을 끌어내는 ‘선정’과
만법이 본래 청정함을 꿰뚫어 보는 ‘반야’,
진리를 기꺼이 수용하는 ‘인욕’과
남을 나처럼 사랑하고 돕는 ‘보시’,
남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는 ‘지계’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나아가는 ‘정진’,
이 6가지 덕목을 두루 갖춘 참선이 아니고는
우리가 늘 열반에 머물 수 없으며
카르마를 올바르게 경영할 수 없다.
봉황동래, 카르마 경영의 6가지 원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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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생사’에 머물면서도 오염된 행위를 하지 않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