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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등장한 모든 사건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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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여차저차해서 서건창은 히어로즈에 복귀했다. 

그것도 선수로. 


공교롭게도 그날은 박병호가 고척돔에서 코치 취임 기념 기자회견을 한 날이었다. 

사복을 입은 건창의 뒷모습을 병호는 한눈에 알아봤다.


“...서건창.”


이름을 부르자 건창이 돌아섰다. 

예전보다 조금 야위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히어로즈의 서건창’이었다. 

그는 병호를 보고 멋쩍게 웃었다.


“형. 나 왔어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병호가 건창을 껴안았다. 

힘 조절이 섬세해서, 단단하게 안아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텅 비어있던 가슴 한구석이 그제야 꽉 차는 기분이었다.

병호는 커다란 손으로 건창의 등을 마구 두드렸다.


“잘 왔다. 진짜 잘 왔어, 건창아.”

“...나이 먹고 왜 이래요. 쑥스럽게.”


건창은 투덜거리면서도 병호의 두툼한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여러 팀을 전전하며 묻어온 한이 병호의 품에서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이제 아무 데도 가지 마.”

“돈 많이 주면 갈 건데요?”

“죽을래?”


병호가 팔을 풀고 건창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얼른 유니폼 입은 거 보고 싶다. 건창이 너는 버건디가 잘 어울리잖아.”

“아직 번호도 안 정했는데요, 뭐.”

“안 정하긴. 14번 달 거지? 수종이가 양보해줄 거야.”

“그러겠죠? 형도 52번 그대로 단다면서요.”

“응, 구단에서 주겠다고 하시더라고…”

“그럴 줄 알았어요. 52번은 원래 결번이었잖아요.”


그 말에 병호가 움찔 했다. 

건창은 갑자기 굳어버린 그의 표정에서 이상을 감지했다.


“형, 무슨 고민 있어요?”

“어… 어떻게 알았어?”

‘모르면 바보지…’


이 형은 나이가 몇인데 왜 아직도 이렇게 투명한 건지.

건창은 속으로 혀를 찼다.


“사실은…”


병호는 구단으로부터 영구결번 제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건창에게 털어놓았다.


“축하해요, 형. 드디어 우리 팀에도 레전드가 생기네.”

“아니, 그게… 잘 생각해봤는데, 거절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예?”

“난 삼성에서 은퇴했잖아. 여기저기 옮겨 다녔고… 팀 우승을 이끌지도 못했어. 그런 선수가 영구결번이라니, 사람들이 우리 팀 보고 뭐라고 하겠어. 나도 팬들이 그런 말 듣게 하려고 돌아온 게 아닌데…”


박병호. 

그는 명실상부 히어로즈의 4번 타자였고, 히어로즈의 심장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못다 이룬 것이 아프게 남아 있었다.


애초에 그는 LG의 1차 지명 선수였다. 히어로즈에서 늦은 전성기를 보냈고, 본의 아니게 팀을 떠나 KT와 삼성까지 거쳤다. 끝내 반지는 손에 넣지 못했다. 


그런 자신이 과연 '구단 최초 영구결번'이라는 말에 어울릴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팬들은 이 소식을 듣고 뭐라고 할까. 

우승 반지 하나 없이 팀을 떠난 선수에게 영구결번이라는 상징을 내어주는 것에 동의할까. 

아니면 ‘거지 같은 구단이 이미지 세탁하려고 쇼를 하네’라며 비아냥댈까. 

설령 반겨주더라도, 남들이 비웃는 걸 보고 힘들어하지는 않을까.


금세 시무룩해진 병호를 보고, 건창이 그의 가슴팍을 툭 쳤다.


“형, 제발 정신 좀 차려요. 반지? 있으면 좋죠. 근데 그게 없으면 형 세월이 다 가짜가 되는 거예요?”

“아니… 그래도 영구결번은,”

“하여간 형은 너무 착해서 탈이에요. 이런 팀이 조롱 좀 당하면 어때요. 애초에 프런트가 형 안 버렸으면 이런 걸로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건창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 사람들이 형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잊었어요? 여론 수습하려고 형이랑 나 이용하는 거, 솔직히 형도 알잖아요. 이럴 땐 그냥 조용히 있어요. 괜히 사양하지 말고.”

“건창아…”


그는 대답 대신 건창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14년 전, 꿈 많던 시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손. 

병호는 그 손을 잡고 작게 읊조렸다.


“그래도,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내 번호를 물려줄 만한 후배가. 들어보니 건희가 52번을 갖고 싶어 한다던데…”

“형!”


건창이 경악했다. 병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건창아. 나는 예전부터 내 번호를 달고 싶다고 하는 후배가 있으면 주고 싶었어. 내가 생각하기에 난… 영구결번이 될 만한 선수는 아니거든. 히어로즈에는 앞으로 더 훌륭한 선수들이 많이 나올 거고…”


병호의 목소리엔 여전히 자격지심이 묻어 있었다.


“참 나… 거짓말하지 마요. 영구결번은 형 꿈이었잖아요. 이 팀에서 어떻게 박병호보다 더 잘난 놈이 나와요? 50홈런은 개뿔, 20개도 칠까 말까 하는데.”

“건창아.”

“뭐, 형 말이 맞다고 쳐요. 하성이나 정후처럼 갑자기 터질 수도 있죠. 근데 걔들이 이 팀에서 야구를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예요? 형 덕분이잖아요. 형이 이 팀 해체 안 되게 지켜줬으니까.”

“…”

“나도, 같이 뛰었던 애들도 다 알아요. 우리 팀에 형이 어떤 존재였는지. 근데 왜 형만 몰라요. 진짜 바보예요?”


'나 원래 바보잖아.' 

그렇게 말하며 건창을 끌고 왔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그날의 포옹을 떠올린 병호가 볼을 확 붉혔다.


“고마워, 건창아… 그래도…”

“또 뭐요?”

“그래도 모두가 너처럼 생각해주진 않을 거야… 나, 내가 욕을 먹는 건 상관 없지만, 나 때문에 팀이 웃음거리가 되는 건….”


건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웃으라고 해요. 걔네들, 막상 형 앞에선 한 마디도 못 할걸요. 만약 그런 새끼가 있으면 내가 패 줄 테니까.”


병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건창이 쐐기를 박았다.


“알아들었죠? 히어로즈 52번은 형 말고는 없어요.”


병호는 할 말을 잃었다. 

건창이 주는 확신은 너무나 단단해서, 스스로를 의심한 것이 오히려 미안해졌다.

건창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하기 싫어요? 주목받는 거 부끄럽고, 밖에서 별의별 소리 다 나올까봐 겁나요?”

“...어.”


병호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영결 다는 날, 열애 발표도 할래요?”

“뭐?”


병호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건창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러면 영결 얘기는 쏙 들어갈걸요? 다들 나를 욕하기 바쁘겠지. 아, 그래. 형이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던 반지도 이참에 맞추면 되겠네.”

“건, 건창아! 너…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새신랑이!”


병호의 얼굴은 이미 폭발 직전이었다. 

두 볼은 물론 귀 끝까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건창은 그 모습을 보고 낄낄거렸다.


“얼굴 다 익었네. 은퇴식에서도 이러면 곤란한데.”

“그만해. 제발… 우리 이제 이런 거 안 하기로 했잖아…”

“아, 농담이에요, 농담. 내가 바본가? 헤어진 지가 언젠데.”


병호가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주저앉았다. 

커다란 손이 파르르 떨렸다.


“형. 난 형이랑 다시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 안 해요. 내가 뭐라고 형을 갖겠어요. 그냥 형이 영원히 모두의 병호 형으로 남아줬으면 좋겠어. 형은 그럴 자격 충분하니까.”

“건창이 너,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건창의 짓궂은 말에 휘말려 얼굴을 붉히는 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부담감이 조금은 덜어졌다.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병호의 배짱이 커질 리는 없었다. 

박병호는 여전히 소심하고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하나만은 분명했다. 

자신이 지키고 싶었던 것. 

지키지 못해서 무너졌던 것. 

그건 바로 건창이 있는 히어로즈였다.


“갈게요, 형. 아니, 박병호 코치님. 영결 하는 걸로 알고 있을 테니까 이번엔 빼지 마요.”


건창이 손을 흔들며 유유히 멀어졌다. 

홀로 남은 병호는 식지 않는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영영 사라진 줄만 알았던 것들이 다시 돌아오는 일도 있다. 히어로즈의 14번과 52번이 그랬다. 

비로소 2026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