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하게 가라앉아 맑아진 공기와 밤이슬이 맺힌 풀들이 별들 속에 파묻힌 만월의 청명한 빛을 한껏 받아 싱그러움을 자랑하고 있는 새벽녘이었다. 중세시대에나 나올 만한 거대하지만 오래되었던 성은 리바이반-주로 리바이지만-에 의해 담쟁이덩굴의 잎 하나 남아 있지 않았고 오히려 반짝거리기까지 할 정도로, 마치 어린아이들이 읽는 동화에 나올 법한 광경이었다. 새벽 특유의 아스라히 내려앉은 따뜻한 한기가 문을 열고 나온 여성의 몸을 덮었다. 안개같이 들러붙지만 포근한 그 느낌에 주변을 둘러보고 아름다움에 취해 있던 그녀는 잠시 원래의 목적을 떠올리곤 가던 길을 간다.
최근 너무나 바쁜 나날이었지만 하루 안에 끝난 일과여서 남는 시간을 목욕에 할애하기로 했었다. 오랜만의 목욕이었기에 개운했지만, 평상시 철야를 밥 먹듯 해 오던 탓이었을까, 몸은 어서 가서 자라고 요구해오고 있었다. 미처 채 말리지 못한 적갈색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간간히 떨어진다. 그중 한 방울이 시력이 좋지 않은 그녀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안경에 톡, 하고 닿인다. 이내 그것은 아스라히 달빛을 품어내더니 사라진다. 아름다운 광경이네, 라고 생각하고 바삐 발을 놀리던 그녀의 예민한 청각이 이질적인 소리를 잡아냈다.
- 찰박, 찰박.
물이 튀기는 소리였다. 몸은 피곤을 호소했지만 야심한 달밤에 물장구를 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 한지는 그 소리를 향해 걸어갔다. 또 방에 먼지가 쌓여서 걸레를 빨고 있는 리바이려나, 라고 생각하며 그 소리가 지척으로 다가온 걸 느꼈다. 한지의 눈앞에 보인 건 항상 보던 조사병단에 속한 이들의 다부진 등이 아니라, 조금은 작아 보이는 그것이었다. 소리 없이 그의 앞으로 다가간다. 그는 달빛 아래서 영롱한 색채를 내뿜고 있는 에렌이었다.
처음의 처음과 처음.
Eren X Mikasa
Fan Fiction
W. Favor
' 에렌? 안 자고 뭐 해? 내일도 여러 가지 많을 건데. '
거인에 대해 파헤친다는 명목 아래서 거의 혹사에 가까운 실험을 받고 있는 그가 걱정되어 말을 건넨다.
' 히익! 하..한지 분대장님. '
돌아온 건 조금 놀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엄마 몰래 장난을 치다 걸린 어린아이처럼 그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였다. 그의 손은 언제 돌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등 뒤로 가 있었다.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 애써 그것을 신경쓰지 않고 묻는다.
' 왜 그렇게 놀라? 혹시 거인화의 뭔가 문제점이라도 있어? '
한지는 또 미지의 일이 생겼나, 하는 호기심에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끼면서 묻는다. 하지만 에렌은 말을 하려다가 중간에 끊고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달빛을 바다 영롱히 빛나는 호박빛 눈동자가 당황으로 일렁거리는 것을 보고 있다가, 계속 머뭇거리는 그의 태도에 조금 차분하게 대응하기로 한다.
' 에렌. 네가 항상 힘써오는 건 알고 있어. 그렇지만 힘들면 말해야 해. 너한테도 무리가 가면 안 되는 거니까. '
빙긋이 웃어준다. 그제야 조금 편해졌는지 에렌은 말문을 텄다. 에렌의 '이거 꼭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하는 말에 한지는 꼭 그럴게! 하고 대답한다.
' 그게 사실, 진짜 부끄러운 일이지만... 밤에 자다가 이불에 실례해 버려서... '
' 하? '
에렌의 말을 이해하기에는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열다섯이다. 어릴 적에 간간히 하는 실수를 졸업한 지는 오래되었을 것이다...라지만 다 큰 애가 밤에 오줌이라니. 웃음은 굳어있던 몸에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한지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입을 가렸지만, 몸을 들썩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내 입안에서 맴돌던 웃음이 나온다. 한 번 나오자, 참을 수 없었다.
' ....그러니까 자다가 오줌을... 푸흡... 크..크하하하하하! '
' 아-..진짜 안 웃기로 하셨잖아요... 아우... '
민망한지 뒷머리를 연신 긁적대고 있는 에렌을 마주하고 또래에 걸맞지 않게 어른스러웠던 그를 생각한다. 비록 이 세계가 그렇게 강요하는 면도 있지만, 열다섯이란 나이는 아직 순수에 물들어있어야 할 나이였다. 한지는 항상 구축을 외치고 거인에 대한 분노를 그 눈에 담고 살아가던 에렌이 안타까웠지만, 잔뜩 얼굴을 붉힌 에렌이 초식동물마냥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항상 이 세계에 찌들어 있었던 그도 아직은 아이였다는 것을 자각한다. 한지는 에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의 머리보다는 조금 더 밤하늘에 가까운 머리칼이 손을 간지럽힌다.
' 뭐, 그럴 수 있지. 신경 쓰지 마! 최근 좀 피곤했을 테니까. '
' 역시 그런 거죠! 혹시 거인화의 다른 부작용 같은, 병 같은 것의 가능성도 있는 건가요!? '
응? 한지는 대화의 뉘앙스가 조금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에렌을 조금 의문스럽게 쳐다본다. 거인화는 인간의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건가? 계속 거인화하면 몸에 데미지가 쌓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들에 휩싸여 에렌에게 질문한다.
' 역시라니 뭐야. 상태가 많이 안 좋아? '
한지는 에렌의 이마에 손을 대어본다. 온도는 정상이었다.
' ......그치만 평상시랑은 달랐다구요. 뭔가, 하얗고... 끈적한 것이... '
몸에 큰 이상이 있을까, 불안에 휩싸여 초조해 눈동자를 보며 한지는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이 아이, 열다섯이 맞을까? 이 정도의 기본적인 내용을 아직까지도 모를 리가, 라고 생각하던 찰나, 항상 무리하던 에렌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 때 거인화를 하다 기절했을 때 '구축해버리겠어'이라고 웅얼거리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정작 주변의 병사들은 조금 식겁한 모양이었지만. 아직까지도 배운 적 없는 모양이구나, 하고 씁쓸하게 미소 짓지만 애써 숨긴다.
조사병단은 어제 같이 저녁을 먹었던 동료가 오늘 저녁에는 가슴에 있는 '자유의 날개' 하나만 남기고 사라져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그래서인지 주로 바깥으로 나가기 전에 행위를 하면 살아 돌아온다는 미신-거인은 행위를 한 사람을 피한다든가 하는- 이 퍼져있었다. '돌아올 곳이 있으면 사람은 그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갈 의지를 찾는다'라는 말이 이상하게 와전되어 바뀐 것이었다. 거인에 대한 공포를 줄인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지만. 그래서 조사병단은 상당히 성에 대해 개방적이게 되었다. 물론 그쪽으로 부끄러움을 많이 타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한지가 본 이들은 동성끼리는 대부분 편하게 이야기를 하는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처음이었다.
' 조금 특별수업이 필요하겠구나, 에렌. '
- 아아, 또 할 일이 늘어버렸네.
그렇지만 어쩌랴. 그녀가 스스로 결정한 일인 것을.
*
다음 날이었다. 다행히도 어젯밤의 일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고, 분대장님의 입은 무거웠는지 다른 동기에게는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런 언급이 없었으니까. 쟝이 이 사실을 알았다가는, 으으... 이건 틀림없이 평생 놀림감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으며 약속한 대로 분대장님의 방으로 향한다.
삐걱거리는 목재를 밟고 '4분대장 한지 조에'라고 적혀있는 명패가 걸린 문을 바라본다. 조금 긴장되는 손을 올려 노크하고 관등성명을 댄다. 어, 들어와! 라는 말에 문을 열자 잉크 냄새가 확 풍겨온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전부 잉크가 빼곡히 필기 된 종이-주로 거인의 스케치와 가설 같은 내용이 적혀있는-가 붙여져 있었다. 방 한쪽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침대에조차 종이가 붙어 있는 걸 보며 조금 두렵다고 느낀다. 거인화 실험을 할 때 조금 이상한 사람인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조금 오한이 드는 팔을 껴안으며 책상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는 분대장님을 본다.
앉으라는 듯 의자 하나와 차를 건네주는 분대장님의 의자 옆자리에 앉는다. 음..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라고 혼잣말을 하면서도 계속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힐끗 훔쳐보니 상당히 세세한 인체의 모형도였다. 한지는 계속 그것을 스케치하다 뜬금없이 에렌에게 무언가를 묻는다.
' 에렌. 아이는 어떻게 생기지? '
' 옛? 제는 성인 남녀가 한 침대에서 손을 잡고 자면 생기는 거라고 부모님께 들었습니다. '
아하하, 하고 웃어버리는 분대장님과 눈을 마주한다. 음...처음부터 해야겠네, 라고 말하는 분대장님이었지만,
뭔가 섬짓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 세계에서 거룩한 생명이 태어나는 방법을 이해해버린 에렌은 한지와 잉크 냄새가 진동하는 난잡한 방에서 나왔다. 빙글빙글 웃는 한지와 대조적으로 에렌은 눈 밑에 거뭇한 것이 보일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었다. 한지는 괜찮아, 에렌.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이제 어른이라는 거니까! 라며 어깨를 팡팡 친다. 곧 저녁시간 이었기에 에렌을 데리고 나온 한지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를 주절대고 있었다. 거인들의 경향이라던지 통점은 어디가 가장 센지 같은, 에렌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듣지 않을 이야기였기에 조금 신나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한지의 말은 미처 에렌에게 닿지 못했다. 그의 뇌는 이미 다른 것으로 가득했으니.
분대장님은 아주 친절하고도 자세하게 성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쳐주셨다. 물론 글과 그림-매우 정밀하긴 했지만- 하지만 그것 또한 신세계였다. 훈련병 시절부터 항상 이론으로 배우는 것은 약했었고 글로 배운다는 것에 조금 두려움을 느꼈었다. 한지가 한구석에서 꺼낸 한 뭉치의 종이를 보고는 머리가 아파오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생각보다 남자의 본능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많은 내용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어가 머릿속에 박힌 것처럼 떠나가질 않았다. 한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느껴져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애써 다른 생각을 해 보지만 모든 노력은 헛수고였다. 자신도 모르는 감정이었다. 자신에겐 성욕이란 것이 없는 줄 알았다. 훈련병단에 있을 적에도 미카사랑 해봤냐는 질문에 의미를 모르겠다고 답하자 에렌, 너 고자냐? 까지 묻던 몇 명 동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 미...미카사랑...
미카사를 떠올렸더니 갑자기 어젯밤의 일이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된다.
- 에렌... 난 너한테 뭐야?
- 에렌과 진짜 가족이 되고 싶어...
- 에렌...
그렇게 물으며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오던 그녀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왜 그런지 모를 구속감을 떠올린다. 평상시의 무미건조한 에렌, 과는 다르게 달콤한 한숨에 섞인 자신의 이름이 생각보다 자극적이었었기 때문이었다. 꿈인 것을 모르고 애써 너와 나는 가족이잖아, 하고 밀어낼 생각을 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던 몸. 그녀의 보드라운 살갗이 눈앞에 있었을 무렵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세계가 사라졌다. 입체기동 중 중력을 무시하고 자유낙하하는 것보다 더욱 큰 탈출감이 몸 안에서 제멋대로 날뛰었다. 강렬한 해방감은 짙은 여운을 줬고, 꿈에서 깨 보니 눈앞의 그녀는 사라져 있었다.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도는 단어들에 머리가 복잡하다. 한지에게 배운 지식이 겹쳐서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 뭘 해야하지!? 하고 생각하다 결론을 냈다. 아아, 그래. 병장님을 생각하자. 리바이를 생각하자 등골 한쪽이 오싹해진다. 지금도 식당에서 한껏 세상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눈을 하고 있겠지. 그 생각을 하자 조금 발걸음이 빨라졌다. 1초라도 늦으면 인상을 한껏 쓰고 칼을 갈고 있는 리바이를 마주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정말로 드레스 셔츠를 입고 눈앞에서 칼을 갈고 있는 리바이가 보였다. 꿈인가 싶었지만, 날을 가는 소리와 그에 대한 공포감에 시달린 경험이 눈앞에 앉아있는 이 사람은 진짜다, 라고 전해준다. 망상에 심각하게 빠져있었는지 언제 도착했는지까지 모를 지경이었다. 조금 늦었는지 리바이반의 다른 이들은 이미 식사를 끝낸 채로 만담을 하고 있었다. 문이 열린 한지와 에렌을 세상에 불만 가득한 눈이 꿰뚫듯 응시한다.
' 13분 22초 지각이다, 망할 자식들아. '
반쯤 살의까지 담긴 듯한 그 말이었지만 한지는 항상 그랬던 일이었기에 웃음으로 유하게 흘려 넘겼다. 오히려 그다음 말이 더욱 큰 파장을 일으켰으니.
' 아아, 미안미안. 에렌이 어제 '성인식'을 해서 특별교육 좀 하다 왔거든. '
' 악!!! 분대장님!!! '
입이 무거울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들어오자마자 사실대로 핑계를 대는 그녀의 모습에 에렌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에렌은 곧바로 실수를 깨닫고 리바이를 흘끗 훔쳐보지만 평상시 같은 시끄럽다, 라는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보인 것은 딱, 하고 굳어진 두 사람이었다.
왜 식사시간에 칼을 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서늘하게 울리던 쇳소리가 뚝, 하고 끊긴다. 리바이는 동료가 처음 죽은 날 이후로 작은 먼지 하나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그의 성격 때문에 다른 여자와 몸을 섞은 경험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행위가 불결하다고까지 생각하던 그였기에 한지의 말을 듣고 머릿속에서 그런 것을 생각했을까, 안 그래도 날카롭던 인상이 더욱 굳어진다. 또 다른 이는 막 우려낸 차의 향기를 맡다 한 모금 마시기 위해 찻잔을 입에 갖다 대던 리바이반의 유일한 여인이었다. 방긋 웃고 있던 그 얼굴이 딱, 하고 굳어지더니 찻잔을 내려놓는다. 정적 속으로 사기가 마찰하는 소리가 울렸다.
' 속이 안 좋아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
' 칫... '
그렇게 말하고는 둘은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에렌은 들어가는 둘의 뒷모습에 잘 주무세요 병장님, 선배님, 하는 말을 던지지만, 대답은 끼익 거리는 목재의 소리였다. 순식간에 줄어든 인원수에 남은 이들은 급히 아이컨택을 한다. 오래간 훈련을 했기에 눈만 보아도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그들이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무슨 상황이래?
- 페트라는 이해한다 쳐도, 병장님은...아...
- 갑자기 들어오셔서 폭탄을 던져버리시네.
- 그나저나 성인식이라고? 크하하.
- 에렌 아직 열다섯이었던가?
- 그 분대장님이랑 특별교육이라니, 세세한 거 다 배웠겠구만.
포스를 내뿜는 리바이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에렌은 제대로 밥을 먹을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에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입에서 씹고 있는 빵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조차 신경쓰이지 않았다. 바쁘게 오가는 눈빛에도 한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녁을 흡입하다시피 한다. 에렌에게 할애한 시간만큼 다른 연구를 해야 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1초가 아까웠다.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눈앞에 놓인 음식을 모두 섭취한 그녀는 제군들! 그럼 좋은 담소 나누시길! 에렌도 오늘은 휴식! 하는 말과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아무렇지도 않게 눈빛만을 교환하고 있던 남자 셋의 이목에 에렌에게 쏠린다. 개중에는 등을 팡팡 소리나게 치기도 한다.
' 어이 에렌-! 축하한다고! 이제 진짜 어른이구나! '
' 흥, 그래도 아직은 젖비린내나는 꼬맹이라고. '
' 축하 파티 어때? 조촐하지만 맛난 거 좀 먹어보자고. 좋은 날이잖냐. '
조사병단도 술과 여자와 거인에 관한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큰 사건사고가 없는 조직이었기 때문에 작은 일도 축하하는 관례가 붙었다. 사소한 일이지만 조촐하게 축하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기에 군타 선배는 벌써 식량고로 떠났다. 남은 에르드 선배와 오르오 선배가 여러 가지를 묻는다.
' 그래서, 넌 무슨 꿈으로 흥분한 거냐, 에렌? '
' 핫. 뻔하잖아? 소꿉친구가 좋은 거 해주는 꿈 아니냐? '
놀리는 것이 재밌는지, 집요하게 한 부분으로 파고드는 그들의 모습에 에렌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단지 올라오는 열을 삭히기 위해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는 숨기고 싶은 일이건만, 다른 이들에게는 뭔가 축하할 일이었는지 기뻐하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며 한구석에서는 격렬하게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한구석에서는 뭔가 안도하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 처음 거인화를 실수했을 때처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은 하늘 높이 날아간 뒤였으니. 어느새 식량 창고에 갔다 왔는지 술 몇 병과 안주를 가지고 와 세팅하고 있는 군타 선배가 끼어든다.
' 어이, 프라이버시잖아! 그런 거는 안물어 봐도 된다고! '
천사다. 군타 선배는 천사가 틀림없어.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 그래서, 기분은 좋았어? '
.....아니었다.
*
술과 성적인 이야기로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는 한 방울씩 내리는 비에 의해 식혀져 갔다.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던 선배들은 빈 술병과 떨어지는 빗소리를 베게 와 친구삼아 곯아떨어졌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에렌이었기에 선배들을 한 명씩 침실로 옮겨 놓고 왔더니 몸에서 땀이 조금씩 배기 시작했다. 전부 각자의 침실로 옮겨놓은 후 에렌은 열기를 삭히기 위해 성문 앞으로 나갔다.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얼굴 여기저기 달라붙었다. 시원한 감각과는 반대로 구름이 내뱉는 한숨이 진득하게 달라붙는다. 비가 오는 날에는 입체기동장치의 와이어가 상할 수도 있고 앵커가 미끄러져 사고가 날 확률이 더 높아지기 때문에 모든 훈련계획은 사라졌다. 게다가 결벽증이 있는 리바이는 신발에 진흙이 묻는 것이 싫다며 숙소에 박혀있곤 했었다. 오히려 비를 싫어했던 리바이였기에 내일은 히스테리에 조금 피곤하겠다고 생각한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날이었기에 평상시 좋아하던 비를 보기 위해서 바깥으로 나간다. 성의 정문 바로 옆쪽에 작게 천막처럼 비를 피할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횃불마저 달려있는 그곳은 아늑할 정도여서 에렌이 밤에 자주 이용하곤 했다. 그곳으로 나가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마주한다.
그렇게 조금 처마 밑에서 비를 보고 있으니 한껏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고 달아오른 몸이 조금씩 식혀진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들을 바라본다. 에렌은 비는 좋아했으나 이렇게 내리는 비는 질색이었다. 꼭 하늘이 눈물흘리는 것 같고, 뭔가 슬픈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가. 확 쏟아지기라도 하면 마음은 편하겠는데. 깊은 한숨을 내셔 보지만 속은 답답한 그대로였다.
비오던 날, 특히 이런 추적한 비가 내리는 밤에는 미카사가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 떠오른다. 어렸을 적 그녀가 납치되던 그 날에도 꼭 오늘같은 비가 내렸으니까, 아마 불안한 빗소리가 그때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거겠지. 어렸을 때에는 숨어서 우는 미카사를 찾아내 울지 마라고 옆에 있어줬었다. 포옹을 해준다든가 하는 것은 그로써 너무 부끄러운 일이었기에 항상 그녀가 지니고 다니던 머플러를 다시 매어 주거나,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잡아주고 이름을 불러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물방울은 미카사, 하고 부르면 사그라들곤 했으니까. 그렇지만 훈련병단에 들어가고 나서는 그러지 않았다. 매일매일이 고된 하루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자 숙소에서 남자 숙소로 어떻게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비온 뒷날의 아침에 눈을 뜨면 항상 옆자리에서 미카사가 조금 눈을 붉히고 색색대고 자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지금 넌 뭐하고 있을까, 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해버린다.
멍하게 하늘을 바라본다. 문득 미카사의 얼굴이 하늘에 비친다. 어젯밤 꿈이 머릿속에 몽실 떠오른다.
- 아무리 꿈이라지만 미카사랑 그런 짓을...
빙글빙글 웃던 오르오의 말도 생각났다. 미인인 소꿉친구가 좋은 거 해준 꿈이냐던 말이. 식혔던 열기가 다시 올라온다. 아무리 생리현상이라지만 가족인 그녀를 대상으로 그런 생각, 그런 꿈을 꾼 것에 조금 죄악감을 느끼며 털어버릴 요량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응시한다. 퐁-, 퐁-. 덧없이 떨어져 내려오며 자신을 죽여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그것은 장렬하고 비장했다. 조사병단의 이들을 보는 것 같았다. 자신을 불태워 세계에 희망의 한 선율을 가져다주는...
- 똑똑똑.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에렌이 서 있는 처마 뒤쪽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바깥으로 나가는 길인데, 왜 그런 노크지? 그렇게 생각하지만 문을 연다. 눈앞에 서있는 것은 단 하나 남은 소중한 가족이었다.
' 미카사? 안자고 왜 여깄어. '
' 비가 와서... 에렌을 찾으러 갔었는데 없었어. '
그녀는 비를 맞은 듯 조금 젖어있었다. 지하실에 들렀다가 내가 없는 걸 보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건가. 머플러에 고개를 파묻지만 미처 숨기지 못하고 살짝 상기되어 있는 눈시울이 보인다. 그날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거겠지. 단 하나 남은 온기를 붙잡고서. 고통스러운 기억이리라. 온기가 새어나가는 일 없이 꼼꼼하게 머플러를 다시 감아주며 한 마디를 덧붙인다. -따뜻하지?
미카사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하고, 계속 땅을 쳐다보고 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가를 조심스레 닦아준다. 이러는 건 오랜만인 것 같네. 훈련병 때는 아예 못 해준 것 같고. 그러고 보니 훈련병 때는 너는 그 슬픈 마음을 이끌고 나를 찾으러 왔을까. 슬퍼하는 너를 혼자 내버려 둔 게 되는 거구나...하고, 조금 미안해진다. 비를 맞아 조금 추웠을까, 덜덜 떨고 있는 미카사의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그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급히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어깨에 둘러준다. 그녀의 가슴팍에서 미약하게 떨리는 손을 잡는다. ...차가웠다. 눈을 마주한다.
' 에렌... 날 떠나지 마... '
미카사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젖은 채로 에렌을 올려다본다. 그렇게 말하는 미카사의 모습이 어젯밤의 꿈과 겹친다. 그 달콤한 한숨과는 다르지만, 애달프게 자신을 요청하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슬픔이란 감정에 젖어 우물처럼 끝없이 빠져들 것만 같은 검은색 눈동자와 눈물에 조금 일렁거리는 눈망울,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존재감을 흩뿌리는, 별이 떠다니는 밤하늘 같은 흑발. 자각하지 못했던 그녀의 여성스러운 부분들이 에렌에게 훅, 하고 다가온다. 상황과 맞지 않게 갑자기 심장이 두근댄다. 에렌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껴안았다.
평상시였다면 하지 않을 일이었다. 남들의 시선을 상당히 의식했으니까. 하지만 비 오는 날 밤, 단 둘이서라는 분위기가 자신을 조금 이상하게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울지 마-, 미카사. 내가 있어줄게. 그렇게 그녀의 귓가에서 속삭여준다. 조금 들썩이던 어깨가, 심장 박동이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는 걸 피부로 느낀다.
조금 그러고 있다가 이제쯤 되었겠지, 싶어 몸을 떨어뜨린다. 미카사는 온기를 찾으려는 듯 품속으로 파고든다. 그 모습에 얼굴을 들이댈 뻔 하다가 이성이 그것을 애써 붙잡는다. 입을 막는다.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 모습에 미카사는 의문스럽게 에렌을 쳐다본다.
' 에렌...? 어디 아파? 볼이 빨개. '
그녀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댄다. 그 모습에 오히려 당황해서 뒤로 물러나 버린다. 물러나려고 했으나 미카사가 잡고 있던 손을 잡아당겼다. 예상하지 못했던 외력에 의도하지 않게 미카사를 벽으로 몰아붙인 꼴이 되었다. 화악 하고 미카사의 특유의 달콤쌉쌀한 체향이 코 끝을 자극한다. 더욱 가까워진 그녀의 눈동자가 보인다. 조금 젖어 반짝거리는 것 같은 흰 피부. 가지런히 정리된 긴 속눈썹. 호선을 그리며 오똑하게 서 있는 코. 방금 막 따낸 딸기처럼 발그레한 윤기가 도는 붉은 입술. 항상 붉은 머플러에 숨겨져 있는, 완연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목선. 굳은살이 박혀있지만 얇고 길쭉한 손가락들, 하지만 자신의 손보다는 작은 그것들. 그 모습에 정말로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톡, 하고 끊어진다.
아아, 이렇게 아름다운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에렌은 본능에 몸을 맡긴 채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 비 오는 날의 첫 키스는, 칼에 베인 것 같이 뜨거웠다.
-------
에렌이 몽정하는 만화였나 그거보고 삘받쳐서 적었다
글 처음써보는건데 뭐 재밌게봤으면 좋겠네
최근 너무나 바쁜 나날이었지만 하루 안에 끝난 일과여서 남는 시간을 목욕에 할애하기로 했었다. 오랜만의 목욕이었기에 개운했지만, 평상시 철야를 밥 먹듯 해 오던 탓이었을까, 몸은 어서 가서 자라고 요구해오고 있었다. 미처 채 말리지 못한 적갈색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간간히 떨어진다. 그중 한 방울이 시력이 좋지 않은 그녀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안경에 톡, 하고 닿인다. 이내 그것은 아스라히 달빛을 품어내더니 사라진다. 아름다운 광경이네, 라고 생각하고 바삐 발을 놀리던 그녀의 예민한 청각이 이질적인 소리를 잡아냈다.
- 찰박, 찰박.
물이 튀기는 소리였다. 몸은 피곤을 호소했지만 야심한 달밤에 물장구를 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 한지는 그 소리를 향해 걸어갔다. 또 방에 먼지가 쌓여서 걸레를 빨고 있는 리바이려나, 라고 생각하며 그 소리가 지척으로 다가온 걸 느꼈다. 한지의 눈앞에 보인 건 항상 보던 조사병단에 속한 이들의 다부진 등이 아니라, 조금은 작아 보이는 그것이었다. 소리 없이 그의 앞으로 다가간다. 그는 달빛 아래서 영롱한 색채를 내뿜고 있는 에렌이었다.
처음의 처음과 처음.
Eren X Mikasa
Fan Fiction
W. Favor
' 에렌? 안 자고 뭐 해? 내일도 여러 가지 많을 건데. '
거인에 대해 파헤친다는 명목 아래서 거의 혹사에 가까운 실험을 받고 있는 그가 걱정되어 말을 건넨다.
' 히익! 하..한지 분대장님. '
돌아온 건 조금 놀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엄마 몰래 장난을 치다 걸린 어린아이처럼 그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였다. 그의 손은 언제 돌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등 뒤로 가 있었다.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 애써 그것을 신경쓰지 않고 묻는다.
' 왜 그렇게 놀라? 혹시 거인화의 뭔가 문제점이라도 있어? '
한지는 또 미지의 일이 생겼나, 하는 호기심에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끼면서 묻는다. 하지만 에렌은 말을 하려다가 중간에 끊고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달빛을 바다 영롱히 빛나는 호박빛 눈동자가 당황으로 일렁거리는 것을 보고 있다가, 계속 머뭇거리는 그의 태도에 조금 차분하게 대응하기로 한다.
' 에렌. 네가 항상 힘써오는 건 알고 있어. 그렇지만 힘들면 말해야 해. 너한테도 무리가 가면 안 되는 거니까. '
빙긋이 웃어준다. 그제야 조금 편해졌는지 에렌은 말문을 텄다. 에렌의 '이거 꼭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하는 말에 한지는 꼭 그럴게! 하고 대답한다.
' 그게 사실, 진짜 부끄러운 일이지만... 밤에 자다가 이불에 실례해 버려서... '
' 하? '
에렌의 말을 이해하기에는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열다섯이다. 어릴 적에 간간히 하는 실수를 졸업한 지는 오래되었을 것이다...라지만 다 큰 애가 밤에 오줌이라니. 웃음은 굳어있던 몸에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한지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입을 가렸지만, 몸을 들썩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내 입안에서 맴돌던 웃음이 나온다. 한 번 나오자, 참을 수 없었다.
' ....그러니까 자다가 오줌을... 푸흡... 크..크하하하하하! '
' 아-..진짜 안 웃기로 하셨잖아요... 아우... '
민망한지 뒷머리를 연신 긁적대고 있는 에렌을 마주하고 또래에 걸맞지 않게 어른스러웠던 그를 생각한다. 비록 이 세계가 그렇게 강요하는 면도 있지만, 열다섯이란 나이는 아직 순수에 물들어있어야 할 나이였다. 한지는 항상 구축을 외치고 거인에 대한 분노를 그 눈에 담고 살아가던 에렌이 안타까웠지만, 잔뜩 얼굴을 붉힌 에렌이 초식동물마냥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항상 이 세계에 찌들어 있었던 그도 아직은 아이였다는 것을 자각한다. 한지는 에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의 머리보다는 조금 더 밤하늘에 가까운 머리칼이 손을 간지럽힌다.
' 뭐, 그럴 수 있지. 신경 쓰지 마! 최근 좀 피곤했을 테니까. '
' 역시 그런 거죠! 혹시 거인화의 다른 부작용 같은, 병 같은 것의 가능성도 있는 건가요!? '
응? 한지는 대화의 뉘앙스가 조금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에렌을 조금 의문스럽게 쳐다본다. 거인화는 인간의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건가? 계속 거인화하면 몸에 데미지가 쌓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들에 휩싸여 에렌에게 질문한다.
' 역시라니 뭐야. 상태가 많이 안 좋아? '
한지는 에렌의 이마에 손을 대어본다. 온도는 정상이었다.
' ......그치만 평상시랑은 달랐다구요. 뭔가, 하얗고... 끈적한 것이... '
몸에 큰 이상이 있을까, 불안에 휩싸여 초조해 눈동자를 보며 한지는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이 아이, 열다섯이 맞을까? 이 정도의 기본적인 내용을 아직까지도 모를 리가, 라고 생각하던 찰나, 항상 무리하던 에렌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 때 거인화를 하다 기절했을 때 '구축해버리겠어'이라고 웅얼거리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정작 주변의 병사들은 조금 식겁한 모양이었지만. 아직까지도 배운 적 없는 모양이구나, 하고 씁쓸하게 미소 짓지만 애써 숨긴다.
조사병단은 어제 같이 저녁을 먹었던 동료가 오늘 저녁에는 가슴에 있는 '자유의 날개' 하나만 남기고 사라져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그래서인지 주로 바깥으로 나가기 전에 행위를 하면 살아 돌아온다는 미신-거인은 행위를 한 사람을 피한다든가 하는- 이 퍼져있었다. '돌아올 곳이 있으면 사람은 그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갈 의지를 찾는다'라는 말이 이상하게 와전되어 바뀐 것이었다. 거인에 대한 공포를 줄인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지만. 그래서 조사병단은 상당히 성에 대해 개방적이게 되었다. 물론 그쪽으로 부끄러움을 많이 타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한지가 본 이들은 동성끼리는 대부분 편하게 이야기를 하는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처음이었다.
' 조금 특별수업이 필요하겠구나, 에렌. '
- 아아, 또 할 일이 늘어버렸네.
그렇지만 어쩌랴. 그녀가 스스로 결정한 일인 것을.
*
다음 날이었다. 다행히도 어젯밤의 일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고, 분대장님의 입은 무거웠는지 다른 동기에게는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런 언급이 없었으니까. 쟝이 이 사실을 알았다가는, 으으... 이건 틀림없이 평생 놀림감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으며 약속한 대로 분대장님의 방으로 향한다.
삐걱거리는 목재를 밟고 '4분대장 한지 조에'라고 적혀있는 명패가 걸린 문을 바라본다. 조금 긴장되는 손을 올려 노크하고 관등성명을 댄다. 어, 들어와! 라는 말에 문을 열자 잉크 냄새가 확 풍겨온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전부 잉크가 빼곡히 필기 된 종이-주로 거인의 스케치와 가설 같은 내용이 적혀있는-가 붙여져 있었다. 방 한쪽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침대에조차 종이가 붙어 있는 걸 보며 조금 두렵다고 느낀다. 거인화 실험을 할 때 조금 이상한 사람인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조금 오한이 드는 팔을 껴안으며 책상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는 분대장님을 본다.
앉으라는 듯 의자 하나와 차를 건네주는 분대장님의 의자 옆자리에 앉는다. 음..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라고 혼잣말을 하면서도 계속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힐끗 훔쳐보니 상당히 세세한 인체의 모형도였다. 한지는 계속 그것을 스케치하다 뜬금없이 에렌에게 무언가를 묻는다.
' 에렌. 아이는 어떻게 생기지? '
' 옛? 제는 성인 남녀가 한 침대에서 손을 잡고 자면 생기는 거라고 부모님께 들었습니다. '
아하하, 하고 웃어버리는 분대장님과 눈을 마주한다. 음...처음부터 해야겠네, 라고 말하는 분대장님이었지만,
뭔가 섬짓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 세계에서 거룩한 생명이 태어나는 방법을 이해해버린 에렌은 한지와 잉크 냄새가 진동하는 난잡한 방에서 나왔다. 빙글빙글 웃는 한지와 대조적으로 에렌은 눈 밑에 거뭇한 것이 보일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었다. 한지는 괜찮아, 에렌.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이제 어른이라는 거니까! 라며 어깨를 팡팡 친다. 곧 저녁시간 이었기에 에렌을 데리고 나온 한지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를 주절대고 있었다. 거인들의 경향이라던지 통점은 어디가 가장 센지 같은, 에렌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듣지 않을 이야기였기에 조금 신나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한지의 말은 미처 에렌에게 닿지 못했다. 그의 뇌는 이미 다른 것으로 가득했으니.
분대장님은 아주 친절하고도 자세하게 성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쳐주셨다. 물론 글과 그림-매우 정밀하긴 했지만- 하지만 그것 또한 신세계였다. 훈련병 시절부터 항상 이론으로 배우는 것은 약했었고 글로 배운다는 것에 조금 두려움을 느꼈었다. 한지가 한구석에서 꺼낸 한 뭉치의 종이를 보고는 머리가 아파오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생각보다 남자의 본능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많은 내용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어가 머릿속에 박힌 것처럼 떠나가질 않았다. 한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느껴져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애써 다른 생각을 해 보지만 모든 노력은 헛수고였다. 자신도 모르는 감정이었다. 자신에겐 성욕이란 것이 없는 줄 알았다. 훈련병단에 있을 적에도 미카사랑 해봤냐는 질문에 의미를 모르겠다고 답하자 에렌, 너 고자냐? 까지 묻던 몇 명 동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 미...미카사랑...
미카사를 떠올렸더니 갑자기 어젯밤의 일이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된다.
- 에렌... 난 너한테 뭐야?
- 에렌과 진짜 가족이 되고 싶어...
- 에렌...
그렇게 물으며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오던 그녀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왜 그런지 모를 구속감을 떠올린다. 평상시의 무미건조한 에렌, 과는 다르게 달콤한 한숨에 섞인 자신의 이름이 생각보다 자극적이었었기 때문이었다. 꿈인 것을 모르고 애써 너와 나는 가족이잖아, 하고 밀어낼 생각을 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던 몸. 그녀의 보드라운 살갗이 눈앞에 있었을 무렵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세계가 사라졌다. 입체기동 중 중력을 무시하고 자유낙하하는 것보다 더욱 큰 탈출감이 몸 안에서 제멋대로 날뛰었다. 강렬한 해방감은 짙은 여운을 줬고, 꿈에서 깨 보니 눈앞의 그녀는 사라져 있었다.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도는 단어들에 머리가 복잡하다. 한지에게 배운 지식이 겹쳐서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 뭘 해야하지!? 하고 생각하다 결론을 냈다. 아아, 그래. 병장님을 생각하자. 리바이를 생각하자 등골 한쪽이 오싹해진다. 지금도 식당에서 한껏 세상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눈을 하고 있겠지. 그 생각을 하자 조금 발걸음이 빨라졌다. 1초라도 늦으면 인상을 한껏 쓰고 칼을 갈고 있는 리바이를 마주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정말로 드레스 셔츠를 입고 눈앞에서 칼을 갈고 있는 리바이가 보였다. 꿈인가 싶었지만, 날을 가는 소리와 그에 대한 공포감에 시달린 경험이 눈앞에 앉아있는 이 사람은 진짜다, 라고 전해준다. 망상에 심각하게 빠져있었는지 언제 도착했는지까지 모를 지경이었다. 조금 늦었는지 리바이반의 다른 이들은 이미 식사를 끝낸 채로 만담을 하고 있었다. 문이 열린 한지와 에렌을 세상에 불만 가득한 눈이 꿰뚫듯 응시한다.
' 13분 22초 지각이다, 망할 자식들아. '
반쯤 살의까지 담긴 듯한 그 말이었지만 한지는 항상 그랬던 일이었기에 웃음으로 유하게 흘려 넘겼다. 오히려 그다음 말이 더욱 큰 파장을 일으켰으니.
' 아아, 미안미안. 에렌이 어제 '성인식'을 해서 특별교육 좀 하다 왔거든. '
' 악!!! 분대장님!!! '
입이 무거울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들어오자마자 사실대로 핑계를 대는 그녀의 모습에 에렌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에렌은 곧바로 실수를 깨닫고 리바이를 흘끗 훔쳐보지만 평상시 같은 시끄럽다, 라는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보인 것은 딱, 하고 굳어진 두 사람이었다.
왜 식사시간에 칼을 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서늘하게 울리던 쇳소리가 뚝, 하고 끊긴다. 리바이는 동료가 처음 죽은 날 이후로 작은 먼지 하나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그의 성격 때문에 다른 여자와 몸을 섞은 경험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행위가 불결하다고까지 생각하던 그였기에 한지의 말을 듣고 머릿속에서 그런 것을 생각했을까, 안 그래도 날카롭던 인상이 더욱 굳어진다. 또 다른 이는 막 우려낸 차의 향기를 맡다 한 모금 마시기 위해 찻잔을 입에 갖다 대던 리바이반의 유일한 여인이었다. 방긋 웃고 있던 그 얼굴이 딱, 하고 굳어지더니 찻잔을 내려놓는다. 정적 속으로 사기가 마찰하는 소리가 울렸다.
' 속이 안 좋아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
' 칫... '
그렇게 말하고는 둘은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에렌은 들어가는 둘의 뒷모습에 잘 주무세요 병장님, 선배님, 하는 말을 던지지만, 대답은 끼익 거리는 목재의 소리였다. 순식간에 줄어든 인원수에 남은 이들은 급히 아이컨택을 한다. 오래간 훈련을 했기에 눈만 보아도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그들이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무슨 상황이래?
- 페트라는 이해한다 쳐도, 병장님은...아...
- 갑자기 들어오셔서 폭탄을 던져버리시네.
- 그나저나 성인식이라고? 크하하.
- 에렌 아직 열다섯이었던가?
- 그 분대장님이랑 특별교육이라니, 세세한 거 다 배웠겠구만.
포스를 내뿜는 리바이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에렌은 제대로 밥을 먹을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에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입에서 씹고 있는 빵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조차 신경쓰이지 않았다. 바쁘게 오가는 눈빛에도 한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녁을 흡입하다시피 한다. 에렌에게 할애한 시간만큼 다른 연구를 해야 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1초가 아까웠다.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눈앞에 놓인 음식을 모두 섭취한 그녀는 제군들! 그럼 좋은 담소 나누시길! 에렌도 오늘은 휴식! 하는 말과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아무렇지도 않게 눈빛만을 교환하고 있던 남자 셋의 이목에 에렌에게 쏠린다. 개중에는 등을 팡팡 소리나게 치기도 한다.
' 어이 에렌-! 축하한다고! 이제 진짜 어른이구나! '
' 흥, 그래도 아직은 젖비린내나는 꼬맹이라고. '
' 축하 파티 어때? 조촐하지만 맛난 거 좀 먹어보자고. 좋은 날이잖냐. '
조사병단도 술과 여자와 거인에 관한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큰 사건사고가 없는 조직이었기 때문에 작은 일도 축하하는 관례가 붙었다. 사소한 일이지만 조촐하게 축하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기에 군타 선배는 벌써 식량고로 떠났다. 남은 에르드 선배와 오르오 선배가 여러 가지를 묻는다.
' 그래서, 넌 무슨 꿈으로 흥분한 거냐, 에렌? '
' 핫. 뻔하잖아? 소꿉친구가 좋은 거 해주는 꿈 아니냐? '
놀리는 것이 재밌는지, 집요하게 한 부분으로 파고드는 그들의 모습에 에렌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단지 올라오는 열을 삭히기 위해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는 숨기고 싶은 일이건만, 다른 이들에게는 뭔가 축하할 일이었는지 기뻐하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며 한구석에서는 격렬하게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한구석에서는 뭔가 안도하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 처음 거인화를 실수했을 때처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은 하늘 높이 날아간 뒤였으니. 어느새 식량 창고에 갔다 왔는지 술 몇 병과 안주를 가지고 와 세팅하고 있는 군타 선배가 끼어든다.
' 어이, 프라이버시잖아! 그런 거는 안물어 봐도 된다고! '
천사다. 군타 선배는 천사가 틀림없어.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 그래서, 기분은 좋았어? '
.....아니었다.
*
술과 성적인 이야기로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는 한 방울씩 내리는 비에 의해 식혀져 갔다.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던 선배들은 빈 술병과 떨어지는 빗소리를 베게 와 친구삼아 곯아떨어졌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에렌이었기에 선배들을 한 명씩 침실로 옮겨 놓고 왔더니 몸에서 땀이 조금씩 배기 시작했다. 전부 각자의 침실로 옮겨놓은 후 에렌은 열기를 삭히기 위해 성문 앞으로 나갔다.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얼굴 여기저기 달라붙었다. 시원한 감각과는 반대로 구름이 내뱉는 한숨이 진득하게 달라붙는다. 비가 오는 날에는 입체기동장치의 와이어가 상할 수도 있고 앵커가 미끄러져 사고가 날 확률이 더 높아지기 때문에 모든 훈련계획은 사라졌다. 게다가 결벽증이 있는 리바이는 신발에 진흙이 묻는 것이 싫다며 숙소에 박혀있곤 했었다. 오히려 비를 싫어했던 리바이였기에 내일은 히스테리에 조금 피곤하겠다고 생각한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날이었기에 평상시 좋아하던 비를 보기 위해서 바깥으로 나간다. 성의 정문 바로 옆쪽에 작게 천막처럼 비를 피할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횃불마저 달려있는 그곳은 아늑할 정도여서 에렌이 밤에 자주 이용하곤 했다. 그곳으로 나가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마주한다.
그렇게 조금 처마 밑에서 비를 보고 있으니 한껏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고 달아오른 몸이 조금씩 식혀진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들을 바라본다. 에렌은 비는 좋아했으나 이렇게 내리는 비는 질색이었다. 꼭 하늘이 눈물흘리는 것 같고, 뭔가 슬픈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가. 확 쏟아지기라도 하면 마음은 편하겠는데. 깊은 한숨을 내셔 보지만 속은 답답한 그대로였다.
비오던 날, 특히 이런 추적한 비가 내리는 밤에는 미카사가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 떠오른다. 어렸을 적 그녀가 납치되던 그 날에도 꼭 오늘같은 비가 내렸으니까, 아마 불안한 빗소리가 그때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거겠지. 어렸을 때에는 숨어서 우는 미카사를 찾아내 울지 마라고 옆에 있어줬었다. 포옹을 해준다든가 하는 것은 그로써 너무 부끄러운 일이었기에 항상 그녀가 지니고 다니던 머플러를 다시 매어 주거나,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잡아주고 이름을 불러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물방울은 미카사, 하고 부르면 사그라들곤 했으니까. 그렇지만 훈련병단에 들어가고 나서는 그러지 않았다. 매일매일이 고된 하루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자 숙소에서 남자 숙소로 어떻게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비온 뒷날의 아침에 눈을 뜨면 항상 옆자리에서 미카사가 조금 눈을 붉히고 색색대고 자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지금 넌 뭐하고 있을까, 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해버린다.
멍하게 하늘을 바라본다. 문득 미카사의 얼굴이 하늘에 비친다. 어젯밤 꿈이 머릿속에 몽실 떠오른다.
- 아무리 꿈이라지만 미카사랑 그런 짓을...
빙글빙글 웃던 오르오의 말도 생각났다. 미인인 소꿉친구가 좋은 거 해준 꿈이냐던 말이. 식혔던 열기가 다시 올라온다. 아무리 생리현상이라지만 가족인 그녀를 대상으로 그런 생각, 그런 꿈을 꾼 것에 조금 죄악감을 느끼며 털어버릴 요량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응시한다. 퐁-, 퐁-. 덧없이 떨어져 내려오며 자신을 죽여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그것은 장렬하고 비장했다. 조사병단의 이들을 보는 것 같았다. 자신을 불태워 세계에 희망의 한 선율을 가져다주는...
- 똑똑똑.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에렌이 서 있는 처마 뒤쪽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바깥으로 나가는 길인데, 왜 그런 노크지? 그렇게 생각하지만 문을 연다. 눈앞에 서있는 것은 단 하나 남은 소중한 가족이었다.
' 미카사? 안자고 왜 여깄어. '
' 비가 와서... 에렌을 찾으러 갔었는데 없었어. '
그녀는 비를 맞은 듯 조금 젖어있었다. 지하실에 들렀다가 내가 없는 걸 보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건가. 머플러에 고개를 파묻지만 미처 숨기지 못하고 살짝 상기되어 있는 눈시울이 보인다. 그날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거겠지. 단 하나 남은 온기를 붙잡고서. 고통스러운 기억이리라. 온기가 새어나가는 일 없이 꼼꼼하게 머플러를 다시 감아주며 한 마디를 덧붙인다. -따뜻하지?
미카사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하고, 계속 땅을 쳐다보고 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가를 조심스레 닦아준다. 이러는 건 오랜만인 것 같네. 훈련병 때는 아예 못 해준 것 같고. 그러고 보니 훈련병 때는 너는 그 슬픈 마음을 이끌고 나를 찾으러 왔을까. 슬퍼하는 너를 혼자 내버려 둔 게 되는 거구나...하고, 조금 미안해진다. 비를 맞아 조금 추웠을까, 덜덜 떨고 있는 미카사의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그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급히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어깨에 둘러준다. 그녀의 가슴팍에서 미약하게 떨리는 손을 잡는다. ...차가웠다. 눈을 마주한다.
' 에렌... 날 떠나지 마... '
미카사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젖은 채로 에렌을 올려다본다. 그렇게 말하는 미카사의 모습이 어젯밤의 꿈과 겹친다. 그 달콤한 한숨과는 다르지만, 애달프게 자신을 요청하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슬픔이란 감정에 젖어 우물처럼 끝없이 빠져들 것만 같은 검은색 눈동자와 눈물에 조금 일렁거리는 눈망울,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존재감을 흩뿌리는, 별이 떠다니는 밤하늘 같은 흑발. 자각하지 못했던 그녀의 여성스러운 부분들이 에렌에게 훅, 하고 다가온다. 상황과 맞지 않게 갑자기 심장이 두근댄다. 에렌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껴안았다.
평상시였다면 하지 않을 일이었다. 남들의 시선을 상당히 의식했으니까. 하지만 비 오는 날 밤, 단 둘이서라는 분위기가 자신을 조금 이상하게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울지 마-, 미카사. 내가 있어줄게. 그렇게 그녀의 귓가에서 속삭여준다. 조금 들썩이던 어깨가, 심장 박동이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는 걸 피부로 느낀다.
조금 그러고 있다가 이제쯤 되었겠지, 싶어 몸을 떨어뜨린다. 미카사는 온기를 찾으려는 듯 품속으로 파고든다. 그 모습에 얼굴을 들이댈 뻔 하다가 이성이 그것을 애써 붙잡는다. 입을 막는다.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 모습에 미카사는 의문스럽게 에렌을 쳐다본다.
' 에렌...? 어디 아파? 볼이 빨개. '
그녀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댄다. 그 모습에 오히려 당황해서 뒤로 물러나 버린다. 물러나려고 했으나 미카사가 잡고 있던 손을 잡아당겼다. 예상하지 못했던 외력에 의도하지 않게 미카사를 벽으로 몰아붙인 꼴이 되었다. 화악 하고 미카사의 특유의 달콤쌉쌀한 체향이 코 끝을 자극한다. 더욱 가까워진 그녀의 눈동자가 보인다. 조금 젖어 반짝거리는 것 같은 흰 피부. 가지런히 정리된 긴 속눈썹. 호선을 그리며 오똑하게 서 있는 코. 방금 막 따낸 딸기처럼 발그레한 윤기가 도는 붉은 입술. 항상 붉은 머플러에 숨겨져 있는, 완연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목선. 굳은살이 박혀있지만 얇고 길쭉한 손가락들, 하지만 자신의 손보다는 작은 그것들. 그 모습에 정말로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톡, 하고 끊어진다.
아아, 이렇게 아름다운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에렌은 본능에 몸을 맡긴 채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 비 오는 날의 첫 키스는, 칼에 베인 것 같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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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렌이 몽정하는 만화였나 그거보고 삘받쳐서 적었다
글 처음써보는건데 뭐 재밌게봤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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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야 너무길다 나눠서 올리지ㅓ
아 거참 글 기네 - dc App
그러도 나중에 읽어봄 - dc App
20밖에안되는데 이게 기냐..미안 - dc App
오랜만에 문학이라니 잘읽는다 문체 너무 맘에든다!
에렌미카추
그래서 에렌이 몽정하는 만화 링크는?
@ㅇㅇ 땡큐 ㅋㅋ @최후의프로토스 구글링해바 바로나온다 - dc App
하...미카에렌은 개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