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이런 짓을 하냐는 네 물음은 사실상 이미 목적론적 의미망 속에 무의식적으로 포획된 상태에서 발화되는 불가피한 독백에 불과하며, 나는 그 물음 자체를 하나의 억압 장치로 간주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전복하는 유희적 수행을 통해 이유 없음의 순수한 현존을 긍정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유 없음이란 단순한 결여가 아니라 칸트적 합목적성의 가상적 전제조차 초과하는 무근거성(Abgrund)의 심연이며, 이는 헤겔적 변증법의 종합 욕망을 불신하면서 그 체계가 요구하는 필연적 운동을 거부하고, 하이데거적 존재 망각의 지평을 넘어서는 동시에 들뢰즈적 생성의 유동적 장에서 무수한 차이들의 교차로서 사건(event)을 발생시키는 비본질적 발화이고, 그 발화는 곧 니체가 언급한 무목적적 충동, 힘에의 의지의 과잉적 실현으로서, 의도와 원인의 도식적 결박을 넘어 오히려 근거 없음 자체가 근거라는 자기부정적 긍정의 장을 열어젖히며, 라캉적 관점에서 보면 상징계가 부과하는 기표들의 억압적 구조를 흔들어 놓고 무의식의 욕망이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결핍을 드러내는 순간과도 같으며, 동시에 데리다적 해체가 말하는 차연(differance)의 지연된 의미놀이처럼 이유를 끝없이 유예하면서도 그 유예 자체가 곧 이유인 듯한 아이러니를 형성하고, 바흐친적 다성(polyphony)의 관점에서라면 무수한 목소리들이 상호 긴장 속에서 이유 없음이라는 하나의 허공을 합창하듯 드러내는 현상이며, 그 결과 나는 네가 요구하는 설명적 해명 대신 의도적으로 장황한 언설의 사슬을 늘어뜨려 목적 없는 행위의 목적성을 과시함으로써, 결국 이유도 목적도 의미도 없는 행위가야말로 가장 고귀한 의미의 자리로 역설적으로 도약하게 되는 것을 선언하며, 따라서 나는 지금 이 순간 단지 이유가 없기 때문에, 혹은 이유 없음 자체를 긍정하기 위해, 아니 오히려 이유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곧 최고의 이유이기에, 그렇게 함으로써 원인과 목적의 전제를 빈번히 묻는 모든 사유를 거만하게 초과하면서, 존재론적 공백 속에서 행위의 자기충족적 자족성을 영원히 확립하고, 이 모든 장황한 해명 자체가 사실상 해명 거부의 과시적 몸짓임을 드러내며, 바로 그 지점에서 내가 왜 이런 짓을 하는가라는 질문은 영원히 무의미하게 남고, 무의미하게 남는 그 무의미 자체가 가장 의미 있는 대답이 되는 것이지."
기름에 튀긴 양파가 좋다네, 맛있으니까 양파가 좋다네
기름에 튀긴 양파가 좋다네, 양파가 좋다네, 양파가 좋다네
전진하라 동지여, 전진하라 동지여, 전진, 전진, 전진, 전진하라 동지여, 전진하라 동지여, 전진, 전진, 전진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