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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잘린 불상들, 조선 말기 조선 불교계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유물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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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승려일까?


아무나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불법 공부를 한다면 승려일까?

아니다.


다른 승려의 제자가 되어 불법을 배운다면 승려일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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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의 자격이 성립되는 최소 조건은 아래와 같다.


석가모니는 구족계(출가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을 제정하면서


석가모니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누군가를 승단에 입문시키려면 '결격사유가 없는 후보자를, 결격사유가 없는 승려 10명, 비상상황이라도 최소 4명은 모여서 구족계를 전수해주는 의식을 치를 것' 이라고 규정했다.


이것을 3사7증(三師七証) 이라고 하며, 10명 중 3명은 구족계를 전수하는 역할, 나머지 7명은 그것의 증인 역할이다.


석가모니가 비상상황이라도 최소한 4명이 모이라고 한 이유가 있다.


승려가 된다는 것은 특정 승려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승가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인데, 석가모니는 최소한 승려 4명은 모여야 "승가"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로 한반도의 불교는 구족계와 3사7증의 전통이 완전히 단절되었다.


조선 건국 초까지는 교종/선종에 속하는 여러 가지 종파가 있었고 밀교 전통도 일부 전해졌다.


하지만 고려에서 조선으로 세속 정권이 교체되면서 숭유억불이 국가적 기조가 되었고


태종이 사찰의 수를 줄이고 연이어 세종이 여러 종파를 교종과 선종으로만 통폐합하면서 조선의 불교계는 큰 타격을 받았다.



심지어 신라, 고려까지는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상위 계층이었고 왕가와 귀족가에서도 출가하는 사례가 많았던 승려 계급은 조선이 건국되고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단숨에 천민의 지위로 떨어지고 도성 출입이 금지되기에 이르렀으며


국가 토목건설 사업이나 행사 등 노역에 차출되고 종이, 기와, 두부를 제조해 바치도록 하거나, 강제로 승려들을 병졸로 차출해 북방으로 강제 이주를 시키거나, 선비들이 행차할 때 산에서 잡일꾼이 필요하면 승려를 강제로 차출해 금강산 등 명산을 유람하면 선비들이 앉은 가마를 어깨에 지고 산을 오르게 하는등 불이익과 차별이 상당했다.



특히 교리가 복잡하고 어려워 승려가 다른 노동 없이 불법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시간과 물자가 필요한 교종과 밀교 종파는 그 이전까지 전적으로 귀족 계층에서 지원을 받아 운영되었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점차 맥이 끊어졌다.


그나마 자기 마음을 돌이켜 보는 '선禪', 자기수행을 중요시하던 선종은 사정이 나아 간신히 명맥이 이어졌다.

(선종도 제대로 "고승"이 되려면 불법 공부와 수행이 필요하지만 교종과 밀교보다는 그 집중도가 다소 낮다,)


그 결과 선종만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선종조차도 온전한 형태로 전승되지 못했다.


3사7증의 원칙에 따라서 승려가 되려면 적법한 승려 최소 10명은 모여서 구족계를 전수해주어야 새로운 승려를 입단 시킬 수 있는데 그 "최소 10명의 승가"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이르면 비구(정식 승려)가 아니라 사미(견습 승려) 신분으로 평생을 살거나 또는 스승부터가 사미라서 제자도 어쩔 수 없이 사미인 경우가 허다했다.


또한 명색은 출가자지만, 사실상 승려가 아니라 불목하니(절의 일꾼)나 마찬가지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즉 엄격한 불교적 관점에선 조선 후기 불교는 "사미승들의 느슨한 집합체"일 뿐 비구들로 이루어진 정식 승가이자 종파로 볼 수 없었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 불교 승려들조차도 도저히 조선 내에서는 유효하게 구족계를 전수받을 수 없다고 판단해 여기에 위기의식을 느껴


도저히 정식으로 계를 줄 스승을 구할 수 없다면 불보살에게 직접 기도해 받을 수 있다는 변칙 규정을 '범망경'이라는 대승경전에 실어 공식적으로 반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조선내 불교 사정은 점점 악화되었고 결국은 조선 후기에 서로 다른 지역의 승려들끼리 모인다 해도 같이 예불을 보기조차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지역마다 예불을 올리는 방식이 모두 달라졌고, 심지어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우지 않았다면 염불조차도 다르게 전수되었을 정도였다.


교리적인, 학술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종교 의례조차 파편화되고 왜곡되어 도저히 체계적인 하나의 종교로 유지할 수 없는 정도가 된것이다.


구한말에 서양인 가톨릭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조선의 사찰 승려들 중 제대로 학문적인, 불교의 깊은 내용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조선의 불교는 몰락한 상태였다.



일제강점기 한용운은 대놓고 조선 불교를 이렇게 묘사했다.


"조선 불가의 백 가지 법도가 신통치 않아서 하나도 볼 것이 없거니와, 그 중에서도 재나 공양 올리는 의식, 제사 예절 등은 매우 번잡, 혼란하여 질서가 없고 비열, 잡박해서 끝이 없는 상태이다."



일제강점기의 승려 안진호(安震湖 1880-1965)는 1925년 일본 불교 견학을 다녀와서 큰 충격을 받아 귀국 후 1935년 석문의범(釋門儀範)이라는 의례집을 출간했다.

(제목의 의미는 '석씨 문중(승려들)의 의례 규범'이란 뜻이며 조선시대에 발행된, 서로 다른 불교의례서들을 종합해서 하나의 통일된 표준의례서를 만든 것이다.)


현재도 고승들은 자신이 막 출가했을 때에는 출가자로서 읽을 만한 교재가 석문의범 딱 하나밖에 없었다고 할 정도로 조선 후기 불교는 난잡한 상태였고


현대 한국 불교의 조계종의 의례도 석문의범의 내용을 단순화시켰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계가 입은 타격은 굉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