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세계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뿌리 깊은 관점 중 하나는, 아마도 현실이 '불완전'하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가 감각하고 사용하는 이 세계는 어떤 형식으로든 완전하지 않다는 사고는 인간의 의식에 보편적으로 자리 잡혀 있다. 인과라는 개념도 그 일례가 될 수 있다. 인과는 현실 사건의 발생과 유지가 그 사건 스스로는 유지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다른 외부로부터 그것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로 둔다.
현실의 불완전성은 인간의 경험에 비추어보았을 때 너무도 명백해보인다. 어떤 의미에서건 사물은 유한하며, 불변한다기보다는 언젠가는 변화하고,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 자기 외부에 수많은 타자를 가지고 있는 상대적인 존재이다. 어떤 변화가 있어도 늘 참으로 바뀌지 않는 수학적 법칙 같은 것과 현실적 존재들은 본질적으로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이 불완전하다는 인식은 종종 그것이 완전한 절대자에게 의존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도 이어졌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신존재증명 중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증명은 이러한 생각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은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에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비현실의 절대자 원인으로 두며, 모든 사물은 우연한 것이기에 필연적인 것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든 심미적으로든 현실의 불완전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불완전하지 않는 외부의 절대자를 찾아나서게 만든다. 그렇다면 현실은 진정으로 불완전 한 것일까. 현실이 가진 상대성은 그것을 외부에 의존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일까.
상대성에 대해 색다른 관점을 가진 학자들을 우리는 한자 문명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1세기 경의 중국에서 형이상학과 인간에 대한 사변적 성찰 같은 것은 대승불교가 주류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퀴나스와 그리스의 철학자들처럼 외부의 절대자를 긍정하진 않았지만, 현실의 상대성과 운동성 등이 현실의 비실재를 증명해준다는 입장은 가지고 있었다. 대승불교의 창조자 격에 위치하는 나가르주나의 <중론>을 살펴보자.
사물이 참으로 존재하는 것[有者]이라면 [즉 자성적 존재라면] 소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MS 7.30) // 존재하지 않는 것[無者]이 소멸한다는 일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머리를 두 번 자르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MS 7.31) // 사물에 자성이 있다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이 없고 [不生不滅], 변화와 다양성도 없을 것이다.(MS 24.38)
-서울대학교 철학 사상연구소 서정형, "나가르주나 중론"
중론의 이 구절은 불교의 무자성론이 '변화와 다양성'이라는 현실의 성질을 합리적으로 설명해주는 이론임을 논증한다. 사물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성이 없고 다만 다른 사물에 의탁하여 임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것은 완전한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중간의 위치에 놓인다. 때문에 현실은 (파르메니데스가 기이하게 여겼던) 무와 유를 오가는 생성과 소멸, 변화와 다양성 따위가 일어나게 된다.
이들보다 비교적 마이너한 세계관인, 한당 유학의 체계 내에서도 변화하는 개별자는 실재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동중서 이후의 유학의 천인론에서 인간의 본질은 그를 둘러싼 환경(혈통, 성장환경, 심지어 별의 위치 같은 것까지도)에 의해서 따로이 구성되는 것이었다. 성리학에서처럼 모든 인간에게 통용되는 보편적인 인간의 본질은 생각되지 않았고, 이는 나라를 다스리기 더 적합한 환경에서 자란 귀족 혈통의 통치 정당성을 옹호하는 근거로 쓰이기도 하였다.
성리학의 향유자들은 주로 과거 합격에 실패하거나 과거 응시를 거부한 지역의 유력가 혹은 재야 학자들이었다. 중앙의 통치 제제에 벗어나 있으면서도 여전히 사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이들의 특수한 지위는 새로운 세계관을 구상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이 점은 현실의 상대성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현실은 변화하고 유한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과연 그것이 곧 비실재성을 의미하는지 의문을 던진다.
선禪을 배우는 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풀과 나무, 새나 짐승의 삶 또한 모두 환상이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봄과 여름에 태어나 자라나고 가을과 겨울에는 변하여 쇠퇴하기 때문에 환상이라고 여긴다. 왜 다음과 같이 답하지 않는가? '사물이 태어나 죽고 번성하고 쇠퇴하는 것은 그 자체로 리理가 있다.' 무엇을 환상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이정유서 권1 10)
삶이 있는 것은 바로 죽음이 있고 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시 끝마침이 있다. 이것은 영원함(常)을 가지기 때문이다. 불교는 번성과 쇠퇴를 영원하지않음(無常)의 근거로 이해한다. 이는 영원하지 않음이 도리어 영원함의 근거라는 점을 모르는 것이다. 사람의 수명이 백 년인 것은 영원하다. 백년이 넘어도 죽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할 수 없다. (이정외서 권7 25)
한 나무가 봄에 꽃을 피우고 가을에 시드는 것은 영원한 리(常理)이다. 영원하게 꽃을 피우는 그러한 리는 없다. 그것은 다만 망상일 뿐이다. 지금 불교에서는 죽음을 영원하지 않음으로 여긴다. 죽음이 있다면 영원함이 있는 것이고 죽음이 없다면 도리어 영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정외서 권10 47)
-A.C. 그레이엄, "정명도와 정이천의 철학" (일부 번역은 원문을 직접 보고 수정했음)
마치 세계의 '이유 없음'을 그 자체로 세계의 본질로 보고 긍정하라고 주장한 메이야수처럼, 성리학자들은 현실의 필멸성을 오히려 현실에 구현된 하나의 불멸적인 질서를 보여주는 근거로 받아들인다. 현실은 생겨나고 없어지는 유한성의 질서에 참여함으로서, 오히려 세계의 유한함이라는 절대적인 원리를 가지게 된다.
그레이엄은 이러한 논변이 유한함의 원리가 실재함을 보여줄 뿐 개별 사물들의 실재성을 논증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보고, 상常이라는 글자가 불교에서는 영원함이라는 의미로, 유교에서는 규칙성이라는 의미로 쓰인다고 생각해 각각 다르게 번역하였다. 그러나 규칙성이나 영원함이나 여기선 실질적으로 뜻이 유사하고(예컨대 '사람이 백년 가량을 사는 것은 규칙적이다' 라는 진술은 그것이 하나의 규칙이라는 것으로, 곧 이 사실이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리학자들이 리理를 현상에 내재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리의 실재성이 곧 개별 사물의 실재성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구분을 두지 않았다. 또 두 번째 인용문에서 '이는 영원하지 않음이 도리어 영원함의 근거라는 점을 모르는 것이다' 라는 부분은 원래 '영원하지 않음이 곧 규칙적인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 번역되어 있었다. 원문을 보니 도리어(乃)와 근거, 까닭 등을 나타내는 단어인 소이(所以)자가 누락되어 있어 이를 채워 넣었다.
유한성을 그 자체로 세계의 절대적 원리로 긍정하는 것과 더불어, 변화의 자연성과 관련된 논의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영어에서 자연을 가리키는 단어인 nature가 본질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자연이란 스스로 자自와 그러할 연然을 합친 것이다. 즉 '스스로 그러하다', 무언가가 자기 내부에 가지고 있는 자기 원인에 의거하여 존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가르주나나 아퀴나스 등의 철학에서 이런 자연성은 상상의 관념이거나 특정한 절대자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일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자들은 이러한 자기 원인을 모든 현실의 존재들이 가지고 있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원인이란 바로 사물의 '상대성'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에 의거해 볼 때 이는 모순적인 주장처럼 들린다. 상대성은 곧 그것이 시공간적으로 유한하다는 것으로, 적어도 언젠가는 소멸할 위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스스로가 자신의 원인이어서 그것이 존재, 활동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필요치 않다면, 그것을 어떻게 상대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리의 개념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학자 중 한 명인 정호의 설명에 따르면, 무언가를 '상대적이다'라고 칭하는 것은 곧 그것이 그러한 성질(理)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그렇다면, 현실은 외부로부터 상대성을 '안배'하지 않는다. 같은 성질을 '다시'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역易이라고 명명된 것에는 곧 리理가 있다. 도리道理는 모두 자연自然이다. 만약 안배하여 정해진 것이라면, 다시 무슨 이치가 있겠는가? 하늘과 땅, 음과 양의 변화는 마치 두 멧돌과 같다. 오름과 내림, 채움과 비움, 부드러움과 강함이 애당초 멈추거나 쉰 적이 없다. 양陽은 항상 더하고 음은 항상 덜어낸다. 그러므로 똑같지 않으니, 비유하면 멧돌이 돌면 이가 모두 맞지 않고, 이가 맞지 않으면 곧 만 가지 변화를 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물이 똑같지 않음은 사물의 실정(情)이다. 그런데 장주는 억지로 사물을 똑같이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물은 끝내 똑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요부가 말씀하기를 "공空에 빠지면 끝내 집착하게 되고, 사물을 똑같게 하면 이르는 곳마다 다투게 된다." 하였다.
-이정유서 권2 상편 130
번역은 이현선, "장재와 이정의 철학: 이정의 장재 비판을 중심으로" 와 http://m.blog.daum.net/bokjorl/490?np_nil_b=-2
역易은 유명한 점술서인 주역에 나온 단어로, 흔히 '바뀌다'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위에서 말한 "장재와 이정"에 따르면 이것은 음양이라는 대립되는 두 현상의 상호작용이기도 하다. 역시 상대성, 혹은 현상의 유한함 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보고 붉다고 말하는 것은 곧 우리가 본 것이 붉음의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사과가 나무와 바람 등에 의해 붉어졌다' 라는 진술은 엄밀히 말해 모순임을 알 수 있다. 사과는 이미 붉으므로, 바깥에서 다시 그 성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 하면 우리는 사과 이전의 상태인, 씨앗이나 아직 다 익지 않은 풋사과가 나무와 바람 등에 의해 붉어졌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정호는 (아마도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위처럼 무언가 이전의 상태가 외부로부터 성질을 받아 무언가가 되는 것이 '상대성'의 경우에는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상대적인 것 이전이라면 상대적이지 않은 무한하고 불멸하는 상태일 것인데,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타자가 있고 상태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상대성을 띠고 있음을 의미하니 말이다.
정호는 이를 근거로 사물의 차이성이 외부에 의한 것이 아닌 스스로의 자기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물의 유한함은 그 어느 다른 타자로부터도 받지 않은 사물의 고유한 본질이며, 사물은 유한하고 차이를 가지는 존재가 됨으로서 자신에게 내재한 본질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장자와 같은 도가철학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진다. 사물의 다름은 그것의 본성이기에, '만물일체의 경지' 따윈 없다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들은 존재의 유한함이 절대자에게 의존하여야 하는 유약함의 근거가 아닌, 오히려 그 자체로 존재를 자립적으로 만들어주는 자기 원인임을 보여준다. 자신의 유한성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서 인간은 무한한 질서를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바깥의 절대자가 세상을 운행할 필요는 없다. 다음과 같은 또다른 성리학자, 퇴계 이황의 언급에서도 보이듯이 말이다.
태극에 동정이 있는 것은 태극이 저절로 동정하는 것이다. 천명이 유행하는 것은 천명이 저절로 유행하는 것이다. 어찌 다시 그렇게 하도록시키는 자가 있겠는가? 다만 무극에서 이오(二五)가 나와 묘합하여 응결함으로써 만물이 생겨나는 곳으로 나아가서 본다면 마치 주재하
고 운용하는 자가 있어 이와 같이 시킨 것처럼 보일 뿐이다. 서경에 '위대한 상제께서 아래 백성들에게 치우침 없는 덕을 내려주셨다’고 했는데 정자가 이른바 주재를 일러 제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중략) 천명이 유행하는 곳에 별도로 그렇게 하도록 시킨 자(使之者)
가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퇴계집 권6 54b. 번역은 김선희 "라이프니츠의 신, 다산의 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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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의 절대자를 부정하는 논리라는 점에서 이 갤과 맞을 듯하여 써보았는데, 님덜의 생각은 어떠실런지 몰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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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동양철학에 관해서 글 쓰던 사람도 있긴했는데
그게 납네다 - dc App
이과라서 죄송합니다. 뭔소린지 알아들을수 없어, 오늘도 수학문제를 풀고 있겠습니다
여 갤에 분석철학도 올라오는데 이 정도믄 쉬운 거 아닙네까 - dc App
잘 읽었어.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하네.
ㄱㅅㄱㅅ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