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리프트 역시 엉덩이를 걷어차이는 것은 다를바가 없었다
그래도 체감상 옐로우 리프트보다는 속도가 좀더 빨랐던 것 같다
우리가 탄 리프트는 어느덧 초입을 벗어나 올라가고 있었다
별안간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비에젖은 흙 냄새가 피어올랐다
햇볕이 따사롭게 들던 옐로우와는 달리 눈쌓인 숲속으로 들어가는 비주얼이 음습하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마치 헤네시스 사냥터에서 평화롭게 놀다가 슬리피우드에 들어선 느낌,
우리는 앞으로 닥쳐올 일은 상상도 못한채 시시덕거렸다
별안간 휴대폰의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는데 순간 무언가 함께 딸려나온 듯한 불안한 감촉이 느껴졌다
분명 차키를 휴대폰이랑 같이 넣어둔 것 같았는데?
전화를 받는 것을 미루고 주머니를 훑어봤지만 있어야 할 차키가 보이지 않는다
친구들에게 헐 야 나 차키 떨궜다 ㅋㅋㅋ 라고 장난스럽게 이야기했고,
친구들역시도 븅신 ㅋㅋ 이따가 내려가서 찾자 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역시 걸려온 전화의 주인공은 우리가 버리고온 그 친구였다
그놈한테 니 전화 받을래다가 차키 떨궜잖아 라고 다같이 핀잔을 줬지만,
사실 그때가지만 해도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모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이는 재앙의 전주곡이었다
어쨌든 그친구한테는 오는길을 대략 설명해주었고,
진부역에 내리면 한명이 픽업을 가주기로 이야기가 됐다
이윽고 리프트는 하차장에 가까워져있었고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은건 핑크슬로프를 내려다보며 뒤를 지키고있는 슬로프의 모습이었다
감탄도 잠시,
생각보다 초반 경사가 가파른 것 같았다
뒤에 우뚝 서서 버티고있는 무서운 경사의 슬로프와 이어져있어 더 그래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다들 말로는 쫄? 을 외치고 있었지만
입밖으로 차마 내지못한 마음속 생각은 다들 비슷했을거다
막상 출발지점에 올라서 내려다본 핑크슬로프의 초반경사는 생각보다 가팔랐다
겁이 덜컥 났다
이건 안전장치가 있는 놀이기구따위가 아니었다
호기롭게 출발했다가 곧바로 당황하면서 몸을 추스르는 다른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공포가 피부로 와닿았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들 역시 이제와서야 사태파악이 된듯했다
야 이거 내려갈수있냐...?
아까랑 좀 많이 다른거같은데...?
이렇게 우물쭈물대며 밑을 구경하고 있던 찰나,
우리의 바로 옆에서 형광 스키복을 위아래로 갖춰입은 한 여자가 사뿐히 출발했다
척보기에도 고수의 티가 났다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경직되지 않은 그녀의 동작에서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었다
그녀는 편안하고 여유롭게 큰 호를 그리며 저 멀리로 사라졌다
오기인지 객기인지 모를 용기가 솟아남을 느꼈다
나만 그랬던 건 아니었는지
나먼저 간다 하고 한 친구가 먼저 경사선을 넘었다
나 역시 뒤따라 출발했던 기억까지는 있는데,
친구들이 다 어떻게 내려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었음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옐로우에서 우리가 해낸 '경험' 들을 믿었다
그 믿음이 나를 경사선에서 출발할 수 있게 해줬다
우리가 나눴던 깨알 같은 요상한 꿀팁들 중에는,
등산엘 가서 하산할때 상체를 뒤로 기대고 내려가는것처럼
무게중심을 뒤로해야 균형을 잡기 수월하다는 팁 또한 있었다
슬프게도 그것이야말로 '후경' 이라는 것을 깨달은 때는 먼 훗날의 이야기이다
내가 믿는 경험들을 부던히 그 순간에 적용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야속하게도 아까와 달리 스키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단 한번 온몸을 비틀어 방향전환을 성공한 그 순간,
갑자기 스키가 스케이트가 된 것같은 가속감이 느껴졌다
두어번 흰눈과 하늘이 번갈아 보이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발목에서 여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투둑- 하는 소리를 들었다
분명 넘어지면 알아서 스키가 빠진다고 했는데?
항상 그렇듯이 완벽한건 없다
지금와서 떠올려 보는거지만
부츠 안에 하의의 모든 것을 우겨넣은 탓에 유격이 생겼을 거라고 추측해볼뿐이다
얼굴에 잔뜩 튄 눈의 차가움이 먼저 느껴졌고,
뒤이어 고통이 밀려왔다
멀쩡한 한쪽발을 딛고 일어서려 했으나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머지 두 친구는 어떻게든 살아서 완만해지는 곳까지 무사히 내려갔고
키가 190인 한 친구는 엉망이 된 펜스 밖에서 장비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보였지만 그는 계속해서 아 내 안경 아 시발 내 안경을 중얼거렸다
내려가던 다른 스키어들이 사방에 흩어진 내 장비를 챙겨다 주었고,
괜찮냐고 묻는 그들의 걱정에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해주었다
키큰 친구의 부축을 받아 패트롤에 실려 베이스로 무사히 내려왔지만,
아직 수습해야 할 일은 남아있었다
그때서야 빌어먹을 차키를 찾지 못하면 모두가 발이 묶인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눈앞이 노래졌다
분명 리프트 위에 있을 때에는 어련히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절뚝이며 한 걸음을 내딛을때마다 발목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순간에도 시시각각 눈은 쌓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의무실을 먼저 갔어야 맞겠지만,
그때의 나는 반드시 차키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결국 다섯명이 노는것을 중단하고 다같이 수색에 나섰다
리트프 탑승 위치에서부터 샅샅히 뒤지며 걸어올라갔지만 모래밭에서 바늘찾기에 불과할 뿐이었다
우리 바로 머리위를 지나는 리프트 위에서 사람들이 무어라 수근수근대는게 느껴졌고
이따금씩 머리위에 스키판의 눈을 터는 꼬맹이들이 신경을 긁어놓았지만 거기에 일일히 반응할 상황은 아니었다
리프트 직원한테도 분실로 차키가 들어온것은 없다고 했다
이후 한시간이 넘게 리프트 주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눈밭을 이잡듯 뒤졌으나 결국 찾을 수는 없었다
나는 늦게일어난 그 친구가 아직 ktx를 타지 않았기를 빌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그 친구는 아직 서울이었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우리집에 들러 예비키를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다른 문제가 있었다
가져온 두 대의 차량중에 하필이면 내 차에다 옷과 신발을 다 두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부츠를 벗지도 못하고 하염없이 스키하우스에서 죽치고 기다렸다
원래 우리의 계획은 5시에 용평을 출발해 강릉으로 가서 호텔에 체크인을 하는 것이었지만,
벌써 시간은 6시가 다되어갔고 하필이면 그 시간에는 스키장도 이용할수 없었다
얼핏 직원에게 듣기로는 지금은 눈을 다듬는 시간이라고 했다
주변이 캄캄해지고 나서야 지각한 친구에게 20분뒤 진부역에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고
보드부츠인 덕에 발이 그나마 자유로웠던 보드타는 친구가 그를 픽업하러 가겠다고 했다
마침 할 것도 없었던 나는 같이 가주겠노라고 조수석에 올라타 출발했고,
나머지 친구들에게는 차 문열면 바로 갈아입고 출발할 수 있게 장비를 다 정리해서 주차장에 갖다놔달라고 부탁해놓았다
이미 호텔 저녁 뷔페는 날아간 상황이었고,
도대체 왜 일이 이렇게 꼬인건지 허탈한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진부로 향했다
곧이어 진부역에 도착한 우리는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지각한 친구를 픽업했고,
셋이 용평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안한 전화가 걸려왔다
장비들을 차 근처로 옮겨두고 잠시 화장실 갔다온 사이에 다른 차가 우리가 렌탈한 장비들을 밟았다는 소식이었다
어두워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것저것 많이 깨지고 휘었다고 한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그순간만큼은 발목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차에 타있던 우리 전부 너무 어이가 없고 이상황이 신기해서 허허허 웃음이 나왔다
분명 오늘은 우리의 역대급 해프닝으로 기록될 것이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도중 운전하던 친구가 입방정을 떨기 시작했다
야 이제 사고만나면 피날레 찍는거 아니냐?ㅋㅋㅋ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말에 대꾸를 해주었다
ㅋㅋㅋㅋ그러게 그럼 완전 그랜드슬램 각인데
그리고 신이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그 입방정은 현실이 되었다
여행내내 발목이 아프긴했지만, 그래도 나름 특별했던 강릉에서의 2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사고가 나버린것이다
서울에서만 줄곧 있던 우리들은 눈오는 영하의 강원도 도로에 대한 '경험' 이 없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강원도는 한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제설작업이 빠르게 이루어지는 곳이고
서울로 돌아가는 날 역시도 눈발이 날리는 추운 날씨이긴 했지만 고속도로에 눈이 쌓여있지는 않았다
무리해서 과속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앞서가던 친구의 차량이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갑자기 빙 돌았다
나는 깜짝 놀라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우리 역시 앞으로 쭈욱 미끌리며 친구의 차량을 들이 받았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안전거리를 꽤 많이 두었고 주변에 다른 차량이 없었다는 게 천운이었던 거 같다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소리에 비해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고,
천만다행으로 당장 다친 사람도 없었다
출고한지 일주일밖에 안되었던 친구의 새 니로는 사고차가 되었고,
나는 하필이면 자차를 들지않았기에 추후에 중고 부품을 찾는답시고 장한평을 헤매야만 했다
어쨌든 무사히(?) 살아돌아와서 우리는 2박3일에 대한 정산을 하게되었고,
부러진 두 쌍의 스키와 세 개의 폴값은 원래 여행 예산을 한참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우리는 단톡에서 저마다 시발시발거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그 당시를 재현하기 바빴다
나는 봄이 올때까지 발목에 반깁스를 해야만 했다
그 뒤로 '스키장' 은 우리들 사이에서 절대 꺼내서는 안 될 말이 되어버렸다
첫 스키,
분실
부상
파손
사고
그리고
차마 말을 꺼낼 수는 없었지만
마음 한켠에 어렴풋이 떠오른 생각 하나,
'그래도 재밌었는데...'
그게 내 첫 스키장의 추억이었다
-fin
ps1. 스붕이들의 첫 스키 추억도 공유해주라
ps2. 반응 좋으면 연재함
- dc official App
캬 왔다 내 야동
저러고 스키를 또탈수있다는게 ㄹㅇ 스친놈이네 ㅋㅋ
저러고 다시 스키장 간건 몇년뒤의일임 ㅋㅋㅋ - dc App
우당탕탕 대환장파티 ㄷㄷㄷ - dc App
ㅋㅋㅋㅋㅋ스키가이렇게위험합니다 여러분
이 글 두개에 스키탈때 하면 안되는행위 다들어있다 반면교사를삼자.. - dc App
“핑크” - dc App
아주 그냥 파란만장했던 시작이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핑크직벽 처음 서면 발 떨리는거 개공감입니다요. 그거때문에 한동안 옐로우만 탔음 ㅠㅠㅠ
전그래서 핑크직벽이 진짜 과장이아니라고 생각합니다 ㅋㅋㅋ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자 도살구간이 핑크인듯요.. - dc App
시트콤이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우 살떨리는 사건사고 종합세트네 - dc App
그이후로 수준에 맞는 장비, 안전장구, 올바른 사용법, 윈터타이어같은 요소에대한 강박이 생겼습니다; - dc App
뭔 쌍팔년도 썰 같았는데 니로 ㅋㅋㅋ
ㅋㅋㅋㅋ18년임무려 - dc App
이러다가 어떻게 다시 시작했는지가 궁금하다 ㄹ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