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랑 관계없는 서론이 조금 길었네요. 이글크래스트 스키장에 가기 전 적설량 정보를 찾아보니 지난 사흘간 거의 40cm 가까운 눈이 내렸다고 하더라고요. 파우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죠. 다만 상대적으로 작은 스키장 규모를 보니 이런 천혜의 기후가 조금은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제한된 숫자의 방문객으로 인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지 못하는 지리적 한계가 와닿는 순간이기도 했고요.
(어딘가 "팬시함"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보이지만 동네스키장의 정취가 느껴지는 이글크래스트 스키장)
하지만 다르게 이야기하면, 거대자본에 잠식당하지 않은 동네 스키장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했어요. 북미 스키장들은 최근 10년간 거대자본을 이끈 대기업들이 동네스키장들을 공격적으로 인수/합병을 하고 있는데, 좋아진 점도 있지만 지나친 상업화로 인해 이런저런 논란에 휩싸이고 있거든요. 하지만 이글크래스트는 이런 위험에서 한발짝 벗어난, 지역사회에서 직접 운영하는 스키장이었어요 (K리그의 시민구단 비슷한 개념인거 같아요). 무엇보다 일일 티켓 가격이 대기업 프랜차이즈 스키장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했었고, 식음시설들도 크게 부담가지 않는 가격으로 운영하고 있었고, 주말 인파도 걱정할 수준이 아니었어요.
(스키장 규모 자체는 그렇게 큰 스키장은 아니에요. 초급지역을 제외하면 사실상 2인승 리프트 3기가 전부인 곳이죠)
(하지만 인파대비 쾌적함이나 적설량 하나만큼은 정말 차원이 다른 스키장입니다 ㄷㄷ)
이글크래스트 스키장은 약 2.8km2 면적에 2인승 저속리프트 4기가 운행하는 말 그대로 작은 동네 스키장이었어요. 하이원 외곽면적의 70% 정도 되는 면적에, 훨씬 적은 숫자의 리프트들이 운행하고 있는거죠. 하지만 그만큼 인파가 적기 때문에 오히려 쾌적한 느낌이었어요. 눈이 펑펑 내리는 토요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리프트 대기줄을 5분 이상 기다련 본 적이 손에 꼽는거 같네요. 그리고 사람이 적은만큼 파우더가 정말 오래 남아있었어요. 토요일 하루내내 처음부터 끝까지 파우더를 즐긴 것 같네요. 보통 주말 폭설이 내리는 날 북미스키장들은 두시간 이내로 주요 슬로프들의 파우더는 사라지고 범프밭이 형성되곤 하는데, 이곳만큼은 예외었어요. 토요일 문닫는 그 순간까지 파우더가 남아있는 정말 멋진 곳이더라고요.
(익숙한 스티커가...? ㅋㅋㅋ)
또한 이곳에 내리는 눈은 캐스케이드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불친절한 무거운 눈이 아니라 홋카이도처럼 가벼운 눈이었어요. 처음에 파우더를 지나갈때 느낌이 너무나 다르더라고요. 무거운 눈을 지나가면 뭔가 굳지 않은 시맨트를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는데, 이곳의 가벼운 눈은 지나갈 때 가루가 날리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덕분에 파우더 한가운데서 스키가 멈추게 되어도 나오는게 상대적으로 쉽더라고요, 물론 나름대로의 고생은 했었지만 말이죠.
(눈이 푹신해서 그런지 다들 이렇게 겁없이 점프들을 하시더군요)
(파우더 가르는 그 느낌.. 하얀가루 위에서 둥둥 뜬다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는 느낌이죠 ㅋㅋㅋㅋ)
(카페테리아)
한편 스키장 규모에 비해 적은 인파때문에 게이트 너머 등 일부 한적한 슬로프에선 뭔가 조난 당한듯한 느낌을 받기도 해요. 드넓은 설산 한가운데 다른 사람들 없이 본인 일행들만 남겨진 그 느낌, 아마 백컨트리 스키 가 보신 분들은 비슷한 느낌을 받아 보셨을거에요. 아 그리고 이곳은 휴대폰 전파가 닫지 않는 스키장입니다!!
(게이트를 나가보면...)
"동네" 스키장답게 스키장 이곳저곳엔 동네 광고들이 붙어있더라고요. 주노에 위치한 음식점, 브루어리, 스포츠샵, 대학교, 은행 등등의 광고를 볼 수 있었어요. 그나마 전국구급 회사 광고라고 하면 알래스카 항공 광고..정도가 있었네요. 스키장의 비싼 다이닝레스토랑, 레슨프로그램, 글로벌 회사들 광고 일색이던 대기업 프랜차이즈 스키장들을 보다가 이곳을 보니 광고판마저 정말 색다른 느낌이었어요.
(알래스카 대학교 광고가 붙어있는 리프트 타워, 이렇게 로컬 광고들이 많이 붙어있더라고요)
한편 이 스키장은 재미있는 영업패턴을 가지고 있는데, 무려 월요일/화요일은 그냥 통으로 닫아버리는 스키장입니다(!!). 동네사람들이 다들 생업하러 일터로 나가는 바람에 주중 인파가 얼마 없어서 그런걸까요? 시즌이 한창일때마저 일주일에 이틀을 운영하지 않는 재미있는 패턴을 기지고 있는 스키장이었어요. 또한 운영하는 날도 오후 세시면 종료를 하더라고요. 인파도 인파지만 무엇보다 북위 58도 부근의 고위도 지방이라 해가 정말 일찍 졌어요.
정말 색다른 원정이었어요. 항상 잘 알려진 지역의 대기업 프랜차이즈 스키장 위주로만 다니다가, 이번엔 한번 다른 경험을 해 보고 싶어서 알래스카 소도시의 동네 스키장을 가게 되었는데 너무 잘한 선택인거 같더라고요. 뭔가 숨은 진주를 발견한 느낌 같았어요. 한편으론 떨어지는 접근성, 리조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고객서비스 같은 동네 스키장의 한계를 느낄 수 있었지만, 이색적인 정취와 환상적인 가벼운 파우더가 이번 원정을 멋지게 장식 해 주었죠.
제한적인 인프라와 접근성으로 인해 원정을 입문하시는 분들이나, 많이 가 보시지 않은 분들에겐 추천하기가 어려운 곳 같아요. 하지만 파우더에 진심이거나, 기존의 잘 알려진 스키원정지와는 다른 색다른 종류의 원정을 시도해 보고 싶으신 분들에겐 조심스럽게 추천 드려도 괜찮은 목적지가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알래스카에 스키타러 가 봤다"라고 뭔가 있어보이는 썰을 풀수도 있고 말이죠 ㅋㅋㅋ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ski&no=40065
알래스카 원정이야기 - 알래스카 해안가의 작은 마을 주노(Juneau)(큰 스키백을 들고 비행기를 타는건 참 여러모로 손이 가는 일인거 같아요. 하지만 이것 또한 원정의 묘미 아니겠나요)gall.dcinside.com어느덧 시즌의 막바지가 되고 봄 정취가 하나하나 느껴지는 시기이기도 하고요. 많은분들이 지나가는 겨울을 아쉬워 하며 하나둘씩 장롱에 스키를 보관하는 시기인거 같아요. 모두 좋은 추억을 만드셨던 시즌이었길 바라며 폐장하는 그날까지 모두 안전스킹 하세요!
(알래스카를 떠나며.. 아래 주노의 불빛이 내려다 보이네요)
매번 감사히잘보고있습니다. 고맙읍니다 - dc App
흠..현지 중고장터도 궁금하긴 하네요 ㅋㅋ - dc App
이런곳에서도 , 흔히말하는 데몬복입는 현지인들도 있나요? - dc App
딱히 "데몬복"이라고 불릴만한 의류들은 보지 못했어요. 데몬이라는 개념 자체도 대중적이지 않은 개념이고 말이죠. 그나마 좀 비슷한거 라면 소속 스키장이나 스노스쿨이 표기된 의류들을 입으신 분들이 있긴 해요.
데몬복 ㅋㅋㅋㅋ 우물안 개구리냐?
이런곳은 리프트 광고도 멋지게하네...
동네스키장만의 낭만이 있는곳 같아요
혹시 J님은 직업이 해외를 많이 다니시는건가요? 아님 해외 거주중이신 건가요? 아니면 초-부자라서 가고싶을때 가실 수 있는건가요?
해외 거주를 하면서도 국민건강관리공단에 월 건보료를 납부해야 하는 신분입니다(=국내 체류기간이 김). 외국계 회사 직장인이고요 주로 머무는 곳은 있지만, 종종 지인 집에서 신세지면서 조금 먼 곳 원정을 같이 가는 경우도 있어요. 어지간한 대도시엔 회사 사무실이 있기 때문에 해당지역 사무실로 출근하다 주말을 이용해 스키장을 다녀오는 경우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