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결혼 준비한다는 지인을 만났다. 술잔을 비우기가 무섭게 앓는 소리부터 터져 나왔다. 요즘 서울 집값이 얼마니, 대출 금리가 어쩌니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결혼식장 비용 얘기로 넘어가더니, 결국엔 "야, 결혼 준비하다가 파혼한다는 말이 왜 나오는지 알겠다. 사소한 걸로 진짜 뒤지게 싸운다"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되게 치열하고 열심히 사는 것 같아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참 피곤해 보였다. 근데 그 긴 대화 속에서 딱 하나 빠진 게 있었다. 정작 그 난리를 치면서도 왜 그 사람과 살고 싶은지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프레임》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 지인의 얼굴이 자꾸 걸렸다. 책에서는 '왜'라고 묻는 상위 프레임과 '어떻게'라고 묻는 하위 프레임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는 방법이자 수단이고, 왜는 의미이자 방향이다. 둘 다 삶에 꼭 필요하지만, 의미 없이 방법만 비대해지면 결국 길을 잃고 만다.
지금 우리의 결혼 문화가 딱 그렇다. 전부 '어떻게'의 영역에만 목을 맨다. 집은 어떻게 구할지, 혼수는 어떻게 채울지, 예산은 어떻게 쪼갤지, 그리고 당장 터진 저 갈등을 어떻게 무마할지. 따질 리스트는 끝이 없고, 통과해야 할 하위 프레임의 시험들만 가득하다. 정작 왜 이 사람과 평생의 살을 맞대고 살아가려 하는지, 그 근원적인 이유는 묻지 않는다.
왜를 잃어버리니 '어떻게'라는 현실의 무게가 점점 더 무겁고 숨 막히게 다가오는 것이다. 리스트가 빽빽해질수록 상대는 내 동반자가 아니라 함께 시험을 치르는 파트너, 혹은 내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대상처럼 변해버린다.
기혼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결혼은 장점 보고 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단점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 보고 하는 거라고. 평생 부딪히며 살다 보면 상상도 못 한 밑바닥이 다 보이기 마련이니까. 아무리 철저하게 조건을 따져봤자 살아보기 전엔 절대로 모르는 영역이 존재한다.
결국 단점을 포용한다는 것도 그 사람을 어떤 창문으로 바라보느냐의 문제다. '왜 이 사람과 살고 싶은지'가 선명한 사람은 상대의 모난 부분이 보여도 그냥 그 사람의 독특한 모양새로 받아들일 힘이 생긴다. 반면 '왜'가 없는 사람은 단점이 보일 때마다 "내가 선택을 잘못했나?" 하며 조건의 계산기를 다시 두드리기 시작한다.
조건을 맞추는 게 아니라 시선을 맞추는 것, 그게 결혼의 본질 아닐까.
나는 아직 결혼을 해보지 않았다. 그러니 이 글은 미혼자의 오만이나 착각일 수 있다. 하지만 해보지 않았기에 오히려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왜' 없이 '어떻게'만 채워서 꾸려진 결혼은, 골인하고 나서도 "내가 여기 왜 서 있지?" 하는 공허함에 시달리게 된다. 어쩌면 결혼 후에 찾아오는 권태와 위기의 진짜 정체는 이런 게 아닐까. 지옥은 장소가 아니라 형태다. 왜를 잃은 채 어떻게의 리스트만 남은 관계, 그게 바로 지옥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결혼이라는 무거운 현실 앞에서 지쳐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한 번쯤은 그 리스트를 잠깐 내려놓고 스스로에게 물어봤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 왜, 이 사람과 살고 싶은가."
왜긴 왜야 타이밍 안맞으면 평생 못할거 같은 불안감때문에 하는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