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 옹정제 시기의 대규모 탄압으로 화남 지방에 기반한 반청복명세력의 사상적 기반은 거의 뿌리째 뽑혔다. 그리고 뒤이은 건륭제의 탄압으로 얼마 안 남은 복명사상가들과 수많은 저작저술들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문자의 옥은 한족과 만주족을 안 가렸기에[25] 서로 황제나 반대파에게 무슨 트집을 잡혀 역적으로 몰릴 수 있다 보니 무조건 몸을 숙이고 조심하면서 황제의 독재권력은 매우 막강해졌다.
그러나 '한족들의 마음을 굴종시키겠다.'는 청조의 의지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제 아무리 많은 사상자들을 탄압하고 숙청하고 서책을 불태워도 한족들은 마음 속으로 멸만흥한의 꿈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겉으로만 청조에 충성했다.[26] 이는 건륭제 말기 백련교도의 난을 시작으로 태평천국 운동, 신해혁명으로 이어졌고, 청이 멸망하면서 당연히 상당수의 만주족이 보복으로 갈려나갔다.
한편, 문자의 옥은 명대 중기 이후 나타난 자유로운 학문 연구 환경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당연하겠지만 자유로이 연구하고 토론하면 꼬투리 잡아 죽일텐데 누가 연구에 나설까? 그 결과, 청대의 지식인들은 트집잡힐 염려가 거의 없는 머나먼 과거의 기록이나 유물이 대상인 고증학에 빠져들었다. 당시 청나라 학문의 막장화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있다. 흔히 사문난적 운운하지만, 조선의 학문적 분위기[27]는 최소한 청나라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심지어 이후 숙종-영조 시절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한반도뿐만 아니라 전세계 역대 왕조들 어디를 둘러봐도 특정 계층에 대한 탄압이나 숙청을 심하게 한 사례야 많지만 청대 문자의 옥처럼 자국의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통째로 초토화시킨 검열 사례는 없었다. 심지어 바다 건너 일본 에도 막부도 카쿠레키리시탄에 대한 종교적 탄압이나 천황 추종 사상에 대한 탄압같은 것은 종종 있었지만 동인도 회사 등을 통한 서양 문물 교류를 끊임없이 가졌고, 조선통신사 등을 통해 조선의 문물도 받아들였다. 이는 장기적으로 메이지 유신과 청일전쟁을 통해 일본이 청나라의 국력을 단순간에 꺾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아시아가 유럽에 뒤쳐진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로 이 사건을 꼽는 학자들도 있다.[28] 현대인들이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중세시기 서양은 종교의 영향 때문에 학문을 탄압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반대였다. 식자층은 교회와 권력에 존경을 받았으며, 기독교와 전혀 관련없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고문 연구가 활발했었고, 르네상스 시대에 동방으로부터 희귀사본이 전수되어서 이전의 연구보다 활성화된 것일 뿐이다. 교회의 영향을 받은 수도사나 스콜라 철학자들도 학문의 자유를 누렸다.
생각이 마음에 안든다고 죽이던 종교 전쟁의 시기에서도 한참 벗어나[29] 상당히 높은 학문적 자유를 누렸다. 보수 교회 앞에서 무신론을 외쳐도 별 일 없는 사회의 학자들과, 증조할아버지가 쓴 편지에 글자 하나 잘못 썼다고 후손이 몰살당할 수 있는 사회. 인구나 경제력은 비슷했다고 해도 어느 쪽이 더 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지는 자명하다.[30]
어떤 의미로는 먼 옛날 진나라 시절에 벌어진 분서갱유에 뒤이은, 중국 정부의 주도로 행해진 반달리즘의 계보를 잇는다고 해도 좋을 사건. 그리고 몇백 년 뒤에 또다시 이 사태는 반복된다. 거기서 몇십 년 뒤인 21세기에도 시진핑의 지휘 하에 진행 중이다. 이를 보면 역사는 정말 신기하다고 할 수 있는데, 중국 대륙에 자리잡은 국가는 언제나 민족 문제로 크고 작은 탄압을 벌여왔고 그중에선 동시대 다른 지구촌에선 볼 수 없는 세계구급 스케일의 탄압도 주기적으로 나왔다는 것. 그 역사를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과거에는 중국의 문화학문적 쇠퇴가 동양 세계 전체의 쇠퇴를 불러왔다면 현대사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대한민국은 중국의 공산주의 삽질로 반사이득을 보아 경제를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었다. 물론 그것만이 대한민국이 발전한 이유는 아니지만, 적어도 옛 상국이었던 중국을 (좋은 의미로) 능가하는 국가가 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족들의 마음을 굴종시키겠다.'는 청조의 의지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제 아무리 많은 사상자들을 탄압하고 숙청하고 서책을 불태워도 한족들은 마음 속으로 멸만흥한의 꿈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겉으로만 청조에 충성했다.[26] 이는 건륭제 말기 백련교도의 난을 시작으로 태평천국 운동, 신해혁명으로 이어졌고, 청이 멸망하면서 당연히 상당수의 만주족이 보복으로 갈려나갔다.
한편, 문자의 옥은 명대 중기 이후 나타난 자유로운 학문 연구 환경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당연하겠지만 자유로이 연구하고 토론하면 꼬투리 잡아 죽일텐데 누가 연구에 나설까? 그 결과, 청대의 지식인들은 트집잡힐 염려가 거의 없는 머나먼 과거의 기록이나 유물이 대상인 고증학에 빠져들었다. 당시 청나라 학문의 막장화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있다. 흔히 사문난적 운운하지만, 조선의 학문적 분위기[27]는 최소한 청나라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심지어 이후 숙종-영조 시절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한반도뿐만 아니라 전세계 역대 왕조들 어디를 둘러봐도 특정 계층에 대한 탄압이나 숙청을 심하게 한 사례야 많지만 청대 문자의 옥처럼 자국의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통째로 초토화시킨 검열 사례는 없었다. 심지어 바다 건너 일본 에도 막부도 카쿠레키리시탄에 대한 종교적 탄압이나 천황 추종 사상에 대한 탄압같은 것은 종종 있었지만 동인도 회사 등을 통한 서양 문물 교류를 끊임없이 가졌고, 조선통신사 등을 통해 조선의 문물도 받아들였다. 이는 장기적으로 메이지 유신과 청일전쟁을 통해 일본이 청나라의 국력을 단순간에 꺾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아시아가 유럽에 뒤쳐진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로 이 사건을 꼽는 학자들도 있다.[28] 현대인들이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중세시기 서양은 종교의 영향 때문에 학문을 탄압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반대였다. 식자층은 교회와 권력에 존경을 받았으며, 기독교와 전혀 관련없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고문 연구가 활발했었고, 르네상스 시대에 동방으로부터 희귀사본이 전수되어서 이전의 연구보다 활성화된 것일 뿐이다. 교회의 영향을 받은 수도사나 스콜라 철학자들도 학문의 자유를 누렸다.
생각이 마음에 안든다고 죽이던 종교 전쟁의 시기에서도 한참 벗어나[29] 상당히 높은 학문적 자유를 누렸다. 보수 교회 앞에서 무신론을 외쳐도 별 일 없는 사회의 학자들과, 증조할아버지가 쓴 편지에 글자 하나 잘못 썼다고 후손이 몰살당할 수 있는 사회. 인구나 경제력은 비슷했다고 해도 어느 쪽이 더 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지는 자명하다.[30]
어떤 의미로는 먼 옛날 진나라 시절에 벌어진 분서갱유에 뒤이은, 중국 정부의 주도로 행해진 반달리즘의 계보를 잇는다고 해도 좋을 사건. 그리고 몇백 년 뒤에 또다시 이 사태는 반복된다. 거기서 몇십 년 뒤인 21세기에도 시진핑의 지휘 하에 진행 중이다. 이를 보면 역사는 정말 신기하다고 할 수 있는데, 중국 대륙에 자리잡은 국가는 언제나 민족 문제로 크고 작은 탄압을 벌여왔고 그중에선 동시대 다른 지구촌에선 볼 수 없는 세계구급 스케일의 탄압도 주기적으로 나왔다는 것. 그 역사를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과거에는 중국의 문화학문적 쇠퇴가 동양 세계 전체의 쇠퇴를 불러왔다면 현대사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대한민국은 중국의 공산주의 삽질로 반사이득을 보아 경제를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었다. 물론 그것만이 대한민국이 발전한 이유는 아니지만, 적어도 옛 상국이었던 중국을 (좋은 의미로) 능가하는 국가가 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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