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상당수 학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장제스와 많은 중국인은 한반도를 대만과 마찬가지로 ‘원래 중국 것이었는데 일본에 빼앗긴 영토’로 보고 있었다. 2차 대전이 끝나 일본이 패망한 뒤에 한국의 ‘다시 중국의 속국이 돼야 한다’는 의식이었다. 조공·책봉 체제라는 것은 형식적인 외교 관계이며 명·청이 1882년 임오군란 전까지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별 고려 대상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34년 3월 27일의 일기에 장제스가 기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만과 한반도를 되찾자. 이곳은 한나라와 당나라의 일부였던 땅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황제의 자손으로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해 4월의 한 강연에선 이런 말도 했다. “우리는 동북(만주)의 실지(失地)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조선도 옛날부터 중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수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한국에 대한 이런 인식은 장제스 시절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배 교수는 이렇게 지적한다. “앞 세대 중국의 정치 지도자 쑨원(孫文)이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멀게는 책봉조공관계를 기본 축으로 하는 명·청 시대의 조선에 대한 인식이나 정책과 그 맥락이 닿아 있다.”
실제로 1880년대 조선에서 ‘총독’ 같은 지위를 누렸던 위안스카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쑨원은 우리가 아닌 중국인들에게나 영웅일 뿐이었던 것이다.
1939년 10월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이 최후의 항전지인 충칭 부근에 모여 ‘7당 통일회의’를 열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관리 한 명이 이를 참관하고 쓴 보고서에 관한 기사다. “한국 민족은 개성이 워낙 강한 데다 자존심이 세며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강하다” “젊은이들은 나이 든 사람을 무능하다고 비웃으며, 나이 든 사람들은 청년들이 유치하고 무지하다고 손가락질하기 일쑤다” 같은 분석을 보고 ‘1939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고 탄식하는 내용의 칼럼이었다.
그런데 기사에서도 언급했지만, 이것은 중국 국민당 정부 측의 대단히 악의적인 한국 민족에 대한 폄훼였다. “한국인의 민족성 자체가 단결 정신이 부족하다. 민족 혁명을 영도할 위대한 영수(領袖)가 존재하지 않는다. 중심 사상이 결핍돼 있다. 각 당파 간에 극심한 시기·질투·견제 현상이 난무하고 있다.” 한국인이 어떻게 분열돼 있는가에 중점을 두고 분석한 글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이 자료 수집을 거쳐 훗날 ‘한국인은 단결할 수 없는 민족이니 우리가 대신 통치하겠다’고 주장할 사전 포석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섬뜩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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