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부터 복지사를 꿈꾸고, 20살에 지방대 사회복지학과에 들어갔다.

1학년 때 첫 연애를 하고, 세상의 채도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반드시 좋은 남자친구가 되어보이리라. 그 아이를 보고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군에 입대했다. 그래, 군인도 분명 사람들에게 이바지 하는 일이라고 들었다. 규칙적인 생활도 마음에 들겠다, 어느정도 인정도 받아, 전문하사로 임관했다. 단기 루트에 올라탔다. 나는 도움이 되는 작은 일이라도 사랑해마지않았다. 그러다 양발 부상으로, 몰랐던 지병으로 전역해야했다. 다들 많이 울어주었지만, 나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내 인생의 첫번째 실패로 기록되었다. 

간부도 직장인이라고 직장생활 까라가 있어, 나는 복학하지 않고 바로 작은 회사의 사무직으로 취업했다. 재미없고, 보람 없었다.

 7년을 사귄 전여자친구가 몇년의 고생 끝에 공시에 합격했다. 환승이별이라는 것을 당했다. 객관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가족들은 뻔하게도 모두 나의 편이었다. 그 아이를 욕했다. 나는 우습게도 그게 버려진 나를 힐난하는 것 같았다. 집안에 초상이 났다. 사람의 유골은 제법 섬뜩했다. 

나는 이 땅의 누군가보다는 불행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지만, 명백하게 행복하지는 않았다. 말수가 줄고 웃음이 어색하고, 문득 문득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픈건 싫었고, 의식이 끊어져 사라지는건 너무 무서웠다. 

죽는게 무서워 살아만 있는 기분은 제법 절망적이었다. 삶의 끝이 금방 찾아와주지 않으려나, 나만이 죽는 큰 사고라도 나주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직장도, 운동도 때려치우고 2년을 보냈다. 상담을 받아야했다. 밤마다 누군가 나에게 윽박을 지른다. 호흡이 자주 가쁘다.

평생 감사해야할 선생님과 시원섭섭히, 종결을 했다. 의외로 눈물은 나지 않았다. 나는 남을 위함으로 하여금 존재함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라고 했다. 몇년만에 퍽 마음에 드는 스스로였다. 

조금 나아진 정신으로 20대의 후반, 복학을 했다. 1년에 한번씩 의례적으로 복학 의사를 묻는 학교가 못내 고마웠다. 어떤 의미이든 아직은 돌아갈 수 있는 자리가 있었고, 나는 그렇게라도 내 자리가 필요했다. 

아무것도 없는 늦깎이 복학생을, 사랑한다며 만나주는 동갑내기 여자친구와 교재하게 되었다. 직장인인 그 아이는, 내가 잃었던 흥미와 경험들을 이자까지 쳐서 대신 갚아주기라도 하는냥, 시간과 돈과 관심을 쏟았다. 내가 그 아이를 위해 다른 무엇도 될 필요 없다고 말해주었다. 

졸업을 하고, 1급 시험에 합격했다. 차가 생기고, 장롱면허를 청산했다. 컴퓨터활용능력시험을 준비한다. 

슬프다. 시험 전날 또 나를 윽박지르는 어두운 방안에 출처를 알 수 없는 비명이. 세어야만 쉴 수 있는 들숨과 날숨이. 가족도 여자친구도 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얘기해주는데, 나는 또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자격증은 언제 나오냐는 상식적인 가족의 물음이 제발 좀 밖으로 꺼지라는 말로 들린다. 될 수 있으면 자기 사는 동네에 취업하면 좋겠다는 지극히 당연한 여자친구의 기대도, 거대한 압박으로 느껴진다. 밉다. 나는 더이상 나를 미워하는게 두려운 나머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미워서 견딜 수 없다. 

이 사회는 나를 받아주지 않을 것 같은 확신이 든다. 막연히, 그 어떤 복지관과 센터에도 내 자리는 분명 없으리라. 되먹지 못한 나. 나는 그 때, 자취방 구석의 축축한 이불속이 내게 어울리는 자리라고 여겼다. 지금 생각해보니 복에 겨운 소리였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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