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기고록이다. 걍 심심풀이로 보셈


나는 90년도부터 수많은 일을 해봤지만 사회복지만큼 정직한 일을 보지못한것같다.


보험도 팔아보고 자동차도 팔아보고 핸드폰도 팔아봤다. 심지어 고리대금업도 잠깐이였지만 발을 담가보았다


그이후에는 성실하게 일하기 시작하여


고물상에서 폐지, 고철 분류해서 납품하는일이나 대형 집게차나 소형 지게차로 빠레트도 날라보고 ㅈ빠지게 노가다도 해보고


물류센터에 지입차로 화물운송도 해보고 택배도 해보고 최근에는 취미로 딸배도 해봤다


어느 분야든 일은 힘들었고 급여는 제각각이였으며 보통


더럽고


힘들고


남들이 하기 싫고


남들에게 당당히 말하기 껄끄러운 일들도 많았으며


보통 그럴수록 급여는 좋았다.


항상 사회복지분야에서 특히 디시를 많이 눈팅하는 김깐돌 복지사로써는 갤럼들이 맨날


그놈의 ~ 급여가 ~ 어쩌고 ~ 저쩌고 ~ 그돈씨 ~ 딸배해야지 ~


이런 말들이 많다


당연하다 내게 한정된 시간은 정해져있고 나는 최고의 아웃풋을 내야하기 떄문에


나는 딱히 재능도 없고 노력도 많이 못하는 한량이에 불과했기에


불알 두쪽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야 니까짓게 벌어봣자 얼마나 벌엇냐 ? 사복일이나 하는놈이


라고 태클거는 십새끼는 분명 존재하기에 간단히 적어둔다


보험 100~400

자동차 180~500

폰팔이 250

사장 고리대금업 -500~1500

자영업 고물상 2000

대형지게차기사 350

물류센터 지게차기사 250

사회복지사 최저임금


영업일을 많이했고 기술일이나 현장일도 조금씩 했다 허풍도 섞여있다 가감해서 봐라


보이는가 ? 시간대비 나오는 아웃풋


자격증가지고 먹고사는게 항상 일정한 돈이 나오고


영업으로 먹고사는건 항상 왓따리 갓따리하고


내가 모든걸 책임지고 하는 자영업 사장노릇이야 말로 최고의 아웃풋이 흘러넘쳤다


하지만 고리대금업은 당당한일도 아니고 언제 칼밥먹을지도 모르고 운수도 더러운 경우도 많다


돈빌려준놈이 야반도주를 하질않나 집에서 연탄불을 피우질 않나 와이프 병원비라고 구라치고 바카라를 하는 새끼가 있질않나


참 기구한 직업이다


그 다음은 지게차를하다가 대형차를 하고 그다음에는 독립해서 고물상도 해봤다


이게 최고였다. 땅을 빌려서 거래처를 만들고 지게차 하던 짬으로 일을 받아와서 매출을 올리고 자동차도 기깔나게 뽑고 인생 최고점에 올랏다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힘든일이 그렇듯 몸이 먼저 부셔졌다.


몸으로 먹고 사는 일의 한계였다.


서울에서 가장 크고 좋다는 자생한방병원부터 현대아산병원까지 여러 병원 돌아다니면서 입원실 환자들을 봤다


다들 하나같이 허리가 부러져서 산업 현장에서 다쳐서온 남자들이였다.


누구는 삼성sdi인가 뭐시기 하는 프로젝트 팀장이라고 코드쟁이라고하고


누구는 대기업 사무직 누구는 노가다 십장까지 하 시발 개나소나 남자새끼들 다 다쳐서 병원에 있더라


다 큰 사내새끼들이 다쳐서 병동에 모여서 새벽마다 간호사한테 간식 뇌물로 바치고 물통에 소주 채워와서


밤마다 소주 한 잔씩 돌리는 그 재미가 있던 시절이였다.


이때 처음으로 의료직과 관련된 직업에 대한 흥미가 돋았다  의사와 간호사 이런 직군의 사람들을 보면서


참 워라벨이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9시~18시 출근 퇴근 교대하는 사람있고 무거운거 안들어도되고


손님이나 직장동료간 선생님 선생님 거리면서 호칭으로 불리고 참 그 당시에는 부러운 사람들의 세상이였다.


나는 맨날 입에다가 야 씨발 이런말이나 험한 인상으로만 살아온 세계와는 다른 결이 있는 세계가 나에게는 동경과 소외감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사회복지사 김깐돌이 탄생하게 되었다.


어릴적부터 우리 아버지가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있다.


깐돌아 항상 남자는 돈을 많이 벌어야한다 !


하지만 자기일에는 항상 최선에 최선을 다해야하고 니 직업에 미래를 보고 싶거든 그 직업에 종사하는 10년 20년 후를 지난 사람들의 모습을 보아라


그게 그 직업의 한계점이다. 공장에서 평생 믹싱돌리는 애는 30년후에도 니 옆에서 믹싱을 돌리고 있을기다


노가다하던 김씨는 아직도 노가다하는 김씨다. 아버지의 그 따뜻한 한마디가 나에게 오랜시간 이어져왔다.


그렇게 나는 항상 내가 갖고 있던 직업을 선택할때마다 내 10년 20년 선배님들을 찾아보고 인사드리고 친해지게 되었다.


가장 불쌍하고 하기 싫었던 직업 ?


대부업이였다. 이 새끼들은 5년이상 살아남은 새끼들을 보기가 힘들더라 그래서 그걸 깨닫은 순간 바로 사업을 접어버렸다.


고물쟁이들도 전부 앉은뱅이로 살고 허리수술 무릎수술 목수술 하고 있고


딸배들은 얼굴이 안보이고 지게차 운전사는 그대로 운전하고 있거나 고물쟁이로 전직해서 병원에 있더라


하지만 사회복지사는 다르더라 애네들은 개나 소나 10년이상 경력직이 더럽게도 많더라 


다들 어디 센터장 사무국장 팀장 하나씩 직함이나 자리는 다 꿰차고 있더라


여자들도 목에 힘주면서 나 여기 원장이야 ! 하고 빽하고 소리까지 지르고 시설 안에서는 아주 파워풀 우먼이더라 ~


그때였다 내가 이 직업에 확신을 가지게 되는 순간


이 직업 내가 무조건 10년 20년 한번 더 버틴다.


나도 사회복지사로써 내 인생 직업 마지막 방점을 찍겠다.


사회복지사 김깐돌 !


늦은 나이에 지방에 있는 요양원에서 채용 합격 소식에 개같이 달려갔다.


최저임금에 3개월 수습 90퍼센트까지 정말


개 좃같아도 이렇게 개좃같을수 없었다.


뭐 !? 여기에 식대도 뗀다고 ? 이 시발....개새끼들....


차는 자차로 다니고 기름값도 안줘 !? 에미 시발....


하지만 나를 일하게 해주고 경력 쌓게해줄 곳은 여기밖에 없었다 시발...


사랑스러운 내 고향을 떠나 전라도까지 떠나야했다.


3년만 기다리꾸마 내 3년만에 일다배워서 올라온다 시발


그렇게 김깐돌의 첫 사회복지사는 지옥같은 즌라도 노인요양시설에서 시작되었다.


2018년 전라도로 떠난 김깐돌 그의 운명은....


사회복지사 같지도 않는 업무부터 관리실 경비같은 업무까지 주말에도 출근


응급상황에는 새벽에도 나가서 장례식장 다녀오고 야간수당도 없고 연차도 그 당시에는 명절 대체합의까지


아주 시발 개좃같음의 씹씹씹이였다. 


2년간 계약서, 노무, 회계, 인권, cctv, 소송, 업무연락, 공문, 행정, 서류, 민주노총까지


요양원에서 아? 하면 아 ! 하고 알수 있을만큼 모든 업무를 내가 시간 내서 흡수하고 베끼고 서류자료를 강탈하고 절도하는 한이 있더라도


많은 문서들을 만들고 읽어보고 공부하고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별빛보다 빠르게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로부터 2년 시설내의 모든 업무를 장악하고 일을 통달하고 3년차에 다시 서울로 돌아갈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기다려라 영등포 ! 나 사회복지사 김깐돌 사무국장의 역량으로 다시 복귀한다 !


그렇게 사회복지사 김깐돌 사회복지중에서도 제일 대우가 안좋다는 노인장기요양에 발을 들인지 3년만에


영등포에 센터를 개설하게 된다.


일단 너무 긴것같으니 여기서 한번 끊자


결론은 뭐다 ?


평생 월급쟁이로 살 생각하지말고 


너가 주인이고 너의 사업을 하는게 최고입니다 사회복지사 회원님들 ^^


다음편에서는 1,914,440원 최저임금 사회복지사 김깐돌이 아닌


시설장 김깐돌로 찾아보겠습니다


뻥같은 이야기면 믿지말고 그냥 이런 글이구나 하고 넘어가주시면 고맙ㅇㅇ


궁금한건 댓글로 물어보십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