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인, 맨 정신에 정확하게 다시 말할게. 우리, 버리지 마."
사실, <봄밤>을 보는 내내 은우 엄마가 어느 시점에 실제로 나와서 드라마의 결을 해칠까 봐 조마조마했었다. 역시나 <봄밤>은 은우 엄마를 그런 촌스런 방식으로 다루지 않는다. 기석이라는 정인이의 과거는 정리되고 있는 와중에 지호의 과거는 줄곧 지호의 내면에 트라우마로 갇혀 있었다. 그림이 완전해지려면 지호의 과거, 은우 엄마는 언젠가 반드시 털고 가야 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라 언젠가 그 이름이 등장할 거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봄밤>은 은우 엄마를 갑자기 나타나 은우의 양육권을 주장하며 지호와 정인이의 관계를 위협할지 모를 실체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숨겨져 있던 두 사람의 두려움과 불안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상징적 존재로 활용한다. 재혼해서 아이 낳고 잘 산다는 소식을 전함으로써 실체적 존재로서의 은우 엄마는 간단하게 털어버리고 그보다 그 소식이 불러온 파장이 두 사람의 내면에 미치는 영향을 더 자세히 묘사한다.
언제나 서로에게 솔직했던 이 커플은 건강한 정공법을 택한다. 지호는 맨 정신에 정확히 말할 테니 우리 버리지 말라고. 더 이상 괜찮은 척하지 않고 솔직하게 트라우마를 드러내고 정인이는 지호의 마음이 아니라 내 사랑이 부족한 데서 갈등의 원인을 찾는다. 그러니 냉각기가 있다 한들 길게 가지 못한다. 한대 콱 쥐어박고 싶고 속이 답답하고 섭섭해서 죽을 것 같을지라도, 지호가 머뭇거릴 때마다 여지껏 그래왔듯, 정인이가 먼저 움직이고 지호가 화답한다. 지호의 두려움이건, 정인이의 자격지심이건 간에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사랑하는 마음. 그거면 됐고 그거면 끝이다. 덕분에 지호와 정인이 사이, 과거도 털고 미래에 대한 불안한 마음까지 다 정리하고 난 후 이제 정말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안 남기게 되었다. 혜정 선배가 전한 소식 속에 등장한 은우 엄마는 <봄밤>의 세계에서 그렇게 제 몫을 다하고 퇴장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봄밤>은 정인이와 지호가 한 프레임의 그림으로 들어가는 이야기였다. 또 한편으론, 기석이가 어떻게 그 그림에서 설득력 있게 밀려 나오게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기석이는 끝끝내 정인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모든 주변 사람을 위계로 서열화 시키는 게 뼈에 각인되어 있는 기석이는 정인이가 지호를 사랑할 수 있다는걸, 지호가 그럴 만큼 가치 있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가 되지 않으니 이상한 논리만 계발한다. 지호를 향한 정인이의 진심을 함부로 결론짓고 폄훼한다. 더불어 지난 4년간 정인이가 자신을 만난 이유가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조건 때문이었다고 자기 연애의 의미마저 깎아내린다.
기석이에게 정인이는 사랑이 아니라 조건을 보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그래야 돌아올 가능성이 있으니까. 복수건 한풀이건 결혼이건 기석이에게 기회가 생길 테니까. 날 믿을 수 있냐는 정인이의 질문에 혼자 신이 나서 현수에게 이야기를 흘리고 지호를 낚아 보지만 기석이에게는 정인이뿐 아니라 지호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지호가 현수로부터 기석이 이야기를 듣고 약국을 뛰쳐나왔을 때는 정인이가 흔들렸는지가 아니라 정인이를 괴롭혔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라는 걸 기석이는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지호의 경고 아닌 협박에 대응하는 방법 또한 그림에서 사라지기가 아니라 판을 더 키우기였다. 근거가 되는 논리는 아버지가 태학에게 큰 자리를 주면 태학은 정인이를 설득할 거고 '마음만으로는 절대 만족하지 않는' 여자, '싸구려 로맨스는 이상이 아닌' 여자 정인이는 동정심을 버리고 돌아올 거라는 흐름을 탄다. 정인이와 관계가 정말 끝난 걸 몰라서 청혼을 하고, 받아들여졌다고 신나하고, 반지까지 되돌려 받아 놓고도 올해 안에 날 잡겠다고 단언했을까. 그게 아니다. 기석이의 세계관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발생하다 보니 자기 자신한테 속아 넘어가 주는 거 말고는 기석이가 달리 노력해 볼 게 없어서였다.
하지만 세상 사람이 다 자기처럼 생각하는 줄 아는 지극히 유아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기석이의 상황 판단은 또다시 망신살만 부를 뿐이다. 이사장과 태학의 만남을 어거지로 주선한 기석이는 일이 틀어지자 이제 아버지 탓을 한다. 아버지가 정인이를 반대해서, 아버지가 사진 찍어서, 아버지가 태학에게 한자리 약속을 안 해서. 정인이와의 연애 중에도 뭐가 안 좋으면 습관적으로 정인이 탓을 했었다. 니가 화를 빨리 안 풀어서, 니가 예민해서.
그렇게 자기 자신조차 설득할 수 없는 논리를 따라가고 남 탓만 하던 기석이는 퇴장 또한 일관성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기석이의 진심, '미안했다'라는 짧은 한마디를 정인이에게 보내기 전까지, 기석이는 자기 자신도 설득할 수 없는 정인이와의 미래를 내내 장담했었다. 기석이는 '할 만큼 했다'는 아버지의 최후 협상 결렬 통보를 듣고서야 비로소 포기를 한다.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나서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 더 강한 자의 포기 선언은 기석이를 마침내 멈추게 했다. 그렇게 사람을 놓고 계산만, 계산만 해대다가 정말 계산으로 하는 선 자리에 나와 앉아있는 기석이의 마지막은 그래서 더 허망했다. 예의상 짓는 미소와 예의상 하는 덕담들이 잠시 멈춘 사이, 시선을 돌린 채 웃음기가 사라진 기석이의 마지막 표정은 그 순간 기석이가 느끼는 씁쓸함을 결코 감춰주진 못했다.
<봄밤>은 지호와 정인이가 만나고 사랑하고 함께 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기본 축으로 삼고 있지만 그게 <봄밤>의 전부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 사랑이 지호와 정인이의 인생에 미치는 파장 그리고 그들의 연애가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변화하는 그 주변의 이야기다. 각기 다른 성향과 가치를 지닌 인물들이 두 사람의 '연애'라는 사건과 맞부딪치며 반응하는 양식들과 그를 통해 드러나는 삶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이 진짜 <봄밤>이다. <봄밤>의 탁월함도 진정한 가치와 재미도 전부 그 지점에 있었다. 겉모습만 따지자면 한 여자가 오랜 연인을 떠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 진부하면서도 단 한 줄로도 요약될 만큼 간단한 이 이야기는 인생을 심도 있게 조망하면서 멜로드라마라는 장르를 훌쩍 뛰어넘어 인문학이 된다.
흔히 디테일에 악마가 있다고들 하지만 디테일에는 신도 있다. 인물의 작은 행동, 소품 하나, 설정 하나, 카메라 앵글 하나하나가 <봄밤>이라는 인문학 작품을 완성하는데 일조했다. 그렇게 계산만 해대던 기석이가 일하던 장소가 은행이고, 인간 내면의 가치를 볼 줄 알았던 정인이가 일하던 장소는 수많은 책들이 있는 도서관이고, 작은 공간에 갇혀 있었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힐링을 선사하던 지호가 일하던 곳이 약국이었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엔딩, 다른 사람에게 약은 주면서 자기 자신은 미처 치유하지 못한 채 살고 있었던 지호가 어느 봄날이 데려다준 정인이를 처음 만났던 그곳, 약국에서 술 깨는 약, 고무줄 이야기를 하며 처음 만났던 순간을 웃으며 복기하는 두 사람,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공사장 소음을 배경으로 나누는 입맞춤은 지난 봄을 빛내주었던 <봄밤>의 완벽한 마감이었다.
좋다. 진짜
이 리뷰 최고다 진짜
너봠이의 마무리 리뷰를 보고나니 봄밤을 제대로 깔끔하게 마무리한 것 같아서 기분 좋다 매번 고급진 리뷰 쓰느라 고생했다 봠이가 되어죠서 고마웠다ㄱㅅㄱㅅ
봄밤을 인문학으로 ! 최고다
진짜 좋다.
와 이 리뷰 정말 최고다
정말 좋다 복습을 부르는 리뷰
그래 이거야..나샛 봄밤을 헤매이는 이유..
정말 좋은 리뷰다 - dc App
너무좋다는 말밖에안나와 정독했어 좋은글 고마워
와 감탄 감탄 ㅋ
다른 사람에게 약은 주면서 자기 자신은 미처 치유하지 못한 채 살고 있었던 지호가 어느 봄날이 데려다준 정인이를 처음 만났던 그곳, 약국에서 술 깨는 약, 고무줄 이야기를 하며 처음 만났던 순간을 웃으며 복기하는 두 사람,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공사장 소음을 배경으로 나누는 입맞춤은 지난 봄을 빛내주었던 <봄밤>의 완벽한 마감이었다. -너무좋다 이문장
나도나도22222
좋구나
크 리뷰진짜 좋다
잘 읽었어. 기석 부분 특히 좋다.
최고다
진짜 쵝오ㅡ넘조타
어쩜 이리 잘 쓰나. 잘 봤다.
진짜 최고다
도대체 누가 쓴거야!미친 드라마에 걸맞는 완벽 리뷰네
너무너무너무 좋다 ㄱㅅㄱㅅ - dc App
드라마 퀄이 좋으니까 리뷰도 고퀄인거봐라 이햐.... 이거 우리만 보기 아깝다. 배우들, 작가님한테도 너무 보여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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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계산만 해대던 기석이가 일하던 장소가 은행이고, 인간 내면의 가치를 볼 줄 알았던 정인이가 일하던 장소는 수많은 책들이 있는 도서관이고, 작은 공간에 갇혀 있었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힐링을 선사하던 지호가 일하던 곳이 약국이었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이 부분도 텍스트로 보니 더 잘 이해가 된다. 이렇게 정제된 언어로 멋진 리뷰를 써줘서 고마워
직업과 연결해서 인물을 설명하는 것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 .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꼭 집어서 얘기해 주니 더 또렷해진다.
봄밤이 이렇다니까 ㅎㅎ레벨이 달라
그동안 꾸준히 업로드햇던 봐미들 리뷰도 잊지못할듯
울드에 대한 찬사다 봠부심 뻐렁치는밤이다
봠이 리뷰는 항상 최고다 잘봤어
정독했음 ㄱㅅㄱㅅ
멋지다! 리뷰
미안 실수로 비추눌렀다ㅠㅠ 늘 멋진 리뷰 잘 보고 있어
후,, 리뷰듣고 울컥하긴 처음이네ㅠ 고맙
낵아 이런 고퀄 리뷰를 스크랩하려고 반고닉을 팠다 감쟈해!
기다렸어 리뷰 ㅠㅠ 이제야 봄밤 마무리할수 있을거같은 기분이다 눈물난다 ㅠㅠ
와. 진짜 읽는 내내 감탄했다. 쵝오다 !!!!!
아침부터 정독하면서 감탄하고 있다. 마지막 문단 특히 너무 좋네. 그동안 고퀄 리뷰 너무 잘 봤고 고마워요. (더 써주면 좋겠다는)
좋은리뷰 하트꾹 눌러주고 왔다 ㅋ
최고의리뷰
대박 고퀄리뷰감사
지호의 두려움이건, 정인이의 자격지심이건 간에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사랑하는 마음 - 사랑은 위대한거지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