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 점심 먹으러 식당에 가다가 도서관 복도 게시판에 부착된 포스터에 발길을 멈춘다.

영주: (정인에게 다가오며) 자뻑 타임이냐? (팔짱을 끼고) 이정인의 사심 가득한 야심작이긴 하지?

정인: 부럽냐?

영주: (어이없다는 듯) 부러울 게 없냐~? 나는 골치 아픈 연애는 딱질색이다.
정인: (계속 포스터에 시선 고정) 기다려준대.

영주: (놀라서 팔짱을 풀고) 이 무슨 시대에 맞지 않는 순애보래?

정인: 흥, 부럽냐?

영주: 어, 그건 좀 부럽다. 진짜 그냥 무작정 기다려준대?

정인: (영주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다네?

정인, 고개를 갸우뚱하는 영주를 툭 치고 식당으로 간다.


젓가락으로 밥알 세는 정인을 보며,

영주: (숟가락을 내려놓고) 뭔데 야, 듣고 먹자. 체하겠다.
정인: (젓가락을 내려늏으며 한숨 쉰다.) 만약에 니가.. 세상에 니 편이 하나도 없을지도 모르는 일을 앞두고 있다면, 어떻게 할 거 같애? 그래도 해, 아니면 포기해?

영주: 음.. 무슨 일이냐에 따라 선택지가 다를 거 같긴 한데, 내 편이 하나도 없다는 거는, 그만큼 아니라는 의미 아냐? 밀어부쳐봐야 무모한 짓인 거.

정인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영주: (근심 어린 정인을 보며) 약사땜에?

정인: 아니..

영주: (이건 또 뭐지?) 약사가 왜, 그 남자 문제있어?

정인: 그런 거 없어.

영주: (뭔가 숨기는 거 같은데..) 야, 혹시.. 그 남자 여자있냐?

정인: (어이없어 피식) 치..

영주: (짐작이 안되서 답답하다.) 것도 아님 문제될 게 뭐야?

정인: 내가 문제지, 내가 어..

영주: (한숨쉬며) 남친하곤 어떻게 할거야?

정인: 오늘 만나기로 했어.

영주: 드디어 끝?

정인: 그치.

영주: (걱정스러운듯) 좀 그렇겠다, 야..
정인: (애써 태연한 척) 원래 맘 먹었던 건데 뭐~

영주: (자꾸 맘에 걸린다.) 너의 연애의 끝은 괜히 뭔가 찝찝할까..


오기만 하라고, 언제든지 기다려주겠다고 약속한 지호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정인은 기석과의 관계를 정리하려 한다. 퇴근 후 카페에서 기다리던 그녀는 회식을 핑계로 또 약속을 미루는 그에게 화가 난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야근 중인 영주에게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고, 영주는 자기 집에 와있으라고 한다.
친구네 집에 가는 길은 익숙하지만 오늘은 기분이 다르다. 지호의 약국을 지나 그의 출퇴근길을 걸으며 그녀의 마음 속 기석은 잊혀지고 지호로 차오른다.  그와 같이 갔던 칼국수집, 카페를 지나면서 그녀는 그에게 연락하고 싶지만 꾹 참는다. 아직 주변 정리를 못했으니까.. 속으로만 그리워하기로 한다.

그날 저녁 지호네 집, 그와 정인의 관계를 궁금해하는 친구들이 모였다. 그는 그녀와 서로 이성으로 좋아한다고 털어놓는다. 지금 그녀는 그의 존재만으로도 힘들어하기 때문에 어떤 부담도 주고 싶지 않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까지 수없이 고민하고 머뭇거렸던 그이기에,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녀의 상황이 편해질 때까지 믿고 기다리려한다.





영재와 지호가 식탁에 앉아 자장면을 먹는다. 현수가 집에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 영재가 새 자장면 비닐을 벗기고 지호는 젓가락을 꽃아준다.
현수: (둘의 행동이 어이없어서 번갈아보며) 야!

영재: 오자마자 왜~? 먹어, 일단 먹어~ 먹자구~
현수: 얘네는 속이 없는거야, 뭐야~? (지호를 보며) 유지호, 내가 뭔말할지 알지.

지호: 너네가 생각하는 거 맞어.

(영재와 현수, 순간 얼음)

지호: 왜?

현수: 왜? 야! 하고 많은 여자 중에 왜 하필 권기석 여자야~?
지호: (휴지를 뽑아 입을 닦으며) 질 거 같냐?

현수: (기가 막혀) 하아..

영재: (현수에게 손을 뻗으며) 닥쳐봐. 그러면 너, 그동안 만나고 있었단 거야?

지호: 사실은.. 다같이 만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 내가 마음이 가서 고백했고, 남자친구 있는 거 알고 가볍게 친구로 지냈어.

현수: 야,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하니, (영재를 보며) 안그냐?

영재: 그러기로 하면.. 할 수 있지..만 그래서~ 지금 그냥 친군거야?

지호: 아니. 이성으로 좋아하지.

현수: 아, 뭐라는거야?! 아, 아무튼 넌 그렇다치고, 그럼 그 여자는?

지호: 나하고 같은 생각이지.

(영재와 현수, 걱정스런 눈으로 지호를 본다.)

지호: 나 혼자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게 나아?

영재: 뭐 그건 또 아니지. (현수를 보며) 그렇잖아.

현수: 아, 뭐 그렇긴 한데.. 아, 그래도 하아.. 그 여자, 되게 웃긴다아? 남자, 남자친구는 뭐가 돼? 남자 있는 여자가 그래도 돼?

지호: (젓가락으로 자장면을 비비며) 난 애도 있는데 뭐..

현수: ...


(식사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모여 앉은 3인방)

현수: 아, 그래서 어쩔건데.. 뭐 권기석한테 뺏어올거야?
지호: (무슨..)

-> 지호는 정인에게 승부욕으로 덤비는 게 아니다.

현수: (말이 심했나?) 아니, 뭐 표현하자면..

영재: 정인씨도 지호 좋아한다는데 뭐~
현수: 그럼 빨리 정리하든가.

지호: 상관없어, 난..
현수: 뭐래니?
지호: 처음부터 만나는 사람 있는 거 알았구, 접을라면 그 때 접었어야지. 야, 니들도 알다시피 내 상황이 쉬운 것도 아닌데,무조건 오라고만 하는 건 내 욕심이야.

영재: (조심스럽게) 그래도 뭔가 결정을 해야 하는 거 아냐?

현수: 내 말이 그 말이야~

지호: 내 존재만으로도 이미 힘들어하고 있어. 더 부담주고 싶지 않아.

삼인방의 자장면 회동씬 대사들이 너무 재밌기도 하고 그 와중에 지호가 꺼내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넘 멋져서 결국 다 받아적었네. ㅋㅋㅋ





친구들을 배웅하러 빌라 앞에 나온 지호는 골목을 걸어 올라오는 정인을 발견한다.

'여긴 어떻게..'

영재와 현수, 정인을 보고 당황해서 번갈아 고개 숙이며 인사한다.

현수: (지호에게 작게 들리게지만 밤이라 다 들린다.) 벌써 집에도 오니?

지호: (당황해서) 아니.. (뒤를 돌아 영주네 집을 올려다본다. 2층 베란다에 불이 꺼져있다.)

'혹시 날 보러..?'

영재: (현수 팔을 끌며) 어, 가자!

현수: (눈치없이) 왜?

영재: (답답) 뭐가 왜야, 그냥 가자, 빨리..
현수: 나 지호랑 할 얘기 있어~

영재: (쳐답답) 아냐아냐, 시끄러. (정인에게 인사하며) 안녕히 계세요.

정인: (영재쪽을 돌아보며 고개로 인사만..)
지호: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자세로 2층 베란다를 한 번 더 올려다본다. 정인에게 다가가) 친구 아직 안 들어온 거 같은데..

-> 여긴 어쩐 일로 왔어요? 나 보러 온거에요?


정인: 좀 있다 온대요.

-> 영주 만나러 온 거예요.


지호: (망설이다가) 그.. 현관 번호 몰라요?
-> 아, 그렇지.. 영주씨네 먼저 안 들어갈거예요?  


정인: (동시에) 밥 먹었어요?

-> 나 배고픈데 같이 밥 먹을래요?


지호: (무심결에) 응.

-> 난 먹었어.


정인: 됐어요, 그럼. (빌라쪽으로 발을 내딛는데)
-> 어랏? 나랑 같이 있기 싫은가?  됐어요.


지호: (다급하게) 먹으러 가요.

-> 같이 있어요.


정인: (퉁명스럽게) 먹었다며.
-> 싫다며?


지호: 먹는 거 봐줄게요.

-> 설마~


정인: (여전히 퉁명스럽게) 사준단 소리는 안하네?

-> 밥 사줄거야?


지호: (바지 주머니를 손으로 치며) 지갑이 없어가지고..

-> 내가 사줘야돼?


정인: (삐친척) 있어도 안 사줄거잖아.

-> 또 그런다.


정인 다시 골목으로 내려가고 지호 그녀 뒤를 따른다.


<뜻밖의 그대 1>

그와 그녀는 그렇게 뜻밖의 만남으로 같이 마주하게 된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더 반갑고 설렌다.
영주네 집앞이나 체육관에서 마법처럼 다시 만났을 때만해도 긴가민가하던 인연이, 서로에게 애끓는 마음과 간절한 노력으로 운명이 된 지금, 함께 하는 모든 것이 신기할만치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지호의 단골 식당에서 지난 번처럼 칼국수와 수제비를 시킨 정인,
식당 주인이 알아서 그의 앞에 칼국수를 놓자 웃음이 나는 지호다.
그와 눈이 마주친 그녀의 보조개가 깊이 파인다.
배고픈 그녀는 그의 앞에 놓인 그릇을 얼른 들어 자기 앞으로 옮긴다.
그의 추천 메뉴와 그녀의 최애 메뉴 모두 자기 차지라 신난 그녀.

정인: (양손에 든 숟가락과 젓가락을 식탁에 탁탁 두들기며) 맛있겠다~~

지호: (정인이 먹는 모습을 보며) 진짜 다 먹을거예요?

정인: (수제비 한숟가락 입에 넣고 지호 쳐다보며) 뺏어먹을 생각 하지마~

지호: (미소띠며 고개 끄덕)

그녀의 보조개에 화답하는 듯, 그가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며칠 전만 해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서로를 안타까워하던 그들이, 지금은 눈만 마주쳐도 마냥 행복한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지호: (턱을 괴고 정인 앞에 잘생긴 얼굴을 들이밀며 그녀를 빤히 본다.)

정인: (갑자기? 심쿵&부담)
지호: 먹는 거 봐준댔잖아요.

정인: 이거는 구경하는거지~

지호: (장난 그만. 다시 팔 내리고 허리 편다.)

정인: (숟가락질을 멈추고) 지호씨 친구들..

지호: (신경쓰였구나.) 괜찮아요. 대충 얘기했어.
정인: (걱정되서) 뭐래요?

지호: 정인씨인 것도 그렇지만, 나한테 더 많이 놀랐을거예요.

정인: (들고 있던 젓가락을 그릇에 내려놓고) 진짜, 아무도 안 만날려고 그랬어요?

지호: 절대는 아닌데, 생각이나 노력 자체를 안했지.

정인: (생각에 잠긴다.)

-> 그의 상처가 얼마나 큰건지, 은우 엄마를 못 잊어서 기다려온건 아닌지 신경쓰인다.







지호: (정인을 빤히 본다.) 무슨 생각하는데?

정인: (지호를 보며) 응? 아니? (다시 젓가락 든다.)

지호: (알 거 같다.) 내 얘긴 나중에 자세히 할게요.

정인: (고개 끄덕이며 칼국수 )




지호: (잘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며) 근데 진짜 먹어보란 소릴 안하네?



정인: 인심썼다. (먹던 젓가락을 내밀며) 한숟가락만 먹어요.

지호: (젓가락을 보며 잠시 망설인다.)
정인: (자기 젓가락을 칼국수 그릇에 놓고 새 젓가락을 꺼내주려는데)




지호: (칼국수 그릇을 자기 앞으로 옮겨서 정인의 젓가락으로 후르륵 먹는다. 그릇째 들고 정인을 보며 미소. 국물까지 들이킨다.)

정인: (잘 먹는 그에게 시선 고정하며 수제비를 떠 먹는다.)


둘은 지난 주말 길거리 포옹으로 스킨십을 시작했지만 실은 아직 손도 한 번 안 잡아본 사이다. 같은 식당에서 처음 같이 밥 먹을 때는 어색함이 감돌았는데, 오늘은 우연히 만나 밥 먹으러 온 거 치고 서로가 너무 편해보인다. 서로가 운명임을 받아들여서일까? 정인이 무심코 내민 그녀의 젓가락으로 그는 그녀의 칼국수 그릇을 그대로 가져다 먹는다.  잠시 망설였지만 어떠냐 싶은 그다. 가족끼리, 혹은 친한 친구나 연인끼리 할 법한 행동을 그들은 당연하게 한다.  

이 둘은 서로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호응해준다. 말 사이사이에 주고받는 눈빛과 행동들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이 묻어난다. 정인이 칼국수와 수제비 두 메뉴를 시킨 건 결정장애나 대식가여서가 아니다. 식당에 두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손님으로 식당 주인을 배려한 거다. 그는 그녀가 두 그릇을 다 먹기 부담스러울까봐 배려해서 혼자 다 먹을 수 있냐고 묻고, 그녀는 이미 저녁을 먹은 그가 자기때문에 무리해서 또 먹는 건 싫어서 욕심내는 척 한다. 그런 그녀의 배려를 알아챈 듯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한편 그녀는 그가 오랫동안 이성을 만나려는 시도나 생각조차 안했다는 말에 신경이 쓰인다. 그녀가 아는 그의 과거는 기석 오빠한테 전해들은 게 다이기 때문이다. 좋아하게 된 남자의 지나온 길이 궁금하긴 하지만, 또 막상 들어서 좋을 건 없는 게 과거의 연애사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그는 나중에 천천히 다 말해준다고 하고, 그녀는 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이, 서로가 인연이고 서로에게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