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석과의 만남 뒤 집으로 돌아온 지호는 부엌에서 커피를 내린다.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지호: 응, 정인씨~

정인: 전화한대놓구...

지호: (커피잔 들고 식탁에 앉으며) 정인씨가 괜찮을 때 통화할 거 같았어요.

정인: (혹시) 기석 오빠 여기 온거 알고 있었어요?

지호: (역시나) 갈 거라고 생각했죠. (커피 한모금)

정인: 뭐 마셔?

지호: (차분하게) 커피.

정인: 일부러 그러는거야, 아님 진짠거야? 왜 이렇게 여유가 넘쳐?

지호: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흥분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왠만해선 크게 놀라는 편도 아니고.

정인: (지호의 침착함이 부럽다.) 어른이네~

지호: 일찍 세게 놀래봐서.

정인: 지금보다도 어렸을 땐데, 그 큰 일을 어떻게 견뎠어요?




지호: (그 때 생각에 멈칫 하다가 표정을 풀고) 시간이 해결해준 거 같아요. (그나저나 정인이 걱정이다.) 괜찮았어요?

정인: 각오했던 부분이라.. 지호씬.. 만나서 맘 상하진 않았어요?

지호: 아니? 오히려 기석 선배가 많이 당혹스러웠을거예요. (조심스럽게) 그래서 말인데.. 우리,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애요.

정인: 무슨 뜻이에요?

지호: 두 사람, 지나온 시간만큼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지 않겠어요? 누가 잘했건 잘못했건 상처잖아. 그만큼 아플거구..

정인: (속깊은 지호에게 또 감탄한다.) 어쩜 그런 생각을 해?

지호: 나도 아파봤으니까. 기억하죠? 천천히 와도 돼. 나 어디 안가.

정인: (희미하게 미소)

-> 8회에서 숙희가 경험해본 사람과 안해본 사람의 차이는 엄청나다고 했던가? 20대 후반, 갑작스런 이별의 충격을 세게 겪었던 지호는 방황과 원망의 나날을 보내며 상처로 힘들어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말없이 떠난 은우 엄마도 말 못할 힘든 일이 있었겠구나, 하고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인과 기석에게도 상처로 남게 된 두 사람의 지난 시간들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거란 걸 안다. 자기에게 천천히 와도 된다고, 상처 입은 마음을 잘 추스리고 오라고 배려해준다. 

지난 6년 동안 은우만 바라보는 아빠로, 부모님 속썩이지 않는 아들로만 살아온 그는 과연 지난 상처를 다 극복했을까? 15회에서 은우 엄마 소식에 무너지는 지호를 보기 전까진 '시간이 해결해준 거 같아요.'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나보다. 아니, 다 잊지 못했어도 정인을 만났으니 이제 걱정 끝, 행복 시작! 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만약 은우 엄마가 나타나서 그를 흔들어도 절대 이유 커플은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근데 작가는 은우 엄마의 소식 한 줄만으로 이유 커플을 위기에 처하게 만든다. 이때는 꿈에도 상상 못한 전개네.)





며칠 뒤, 기석은 영국에게 정인과 올해 안에 결혼하겠다고 선언하고, 영국은 태학에게 정인이를 칭찬하며 둘이 잘 알아서 할테니 지켜보자고 한다. 이에 기분이 좋아진 태학은 주말에 정인이를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어진다. 형선은 정인에게 주말에 집에 들르라는 태학의 말을 전하면서 기석과의 관계를 묻는다.

형선: (조심스레) 둘이 다시 좋아진거야?

정인: (고개 숙이며) 아니.

형선: 어.. (정인의 손을 토닥여준다.)

정인: (머뭇거리다가) 엄마.

형선: 어?

정인: (망설이다가 겨우 말한다.) 나 엄마 실망시킬지도 몰라.

형선: (정인 손을 꼭 잡고) 아휴, 무슨 소리야~

정인: (벌써 미안하다.) 그럴지도 모른다구..

형선: 소신껏만 살면, 엄마 실망 안해.

정인: 진짜?

형선: 아이구? 아주 작정하구 큰일 저지를건가 보네? (미소 띠며) 나는~ 니들한테 바라는 거 없어~ 자기 인생 포기 안하는거, 그거 하나면 돼.
(서로 눈 맞추며 웃는다.)
-> 자식에게 소신껏만 살면 된다고, 자기 인생 포기 안 하면 그걸로 족하다는 어머님, 당신께서는 세 따님이 소신을 가지고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도록 바르게 키우셨습니다. 진심을 담아 존경합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인데 소신을 가지고 정도를 걸으며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성인이 된 자식의 선택을 믿고 존중하기보다는 자신의 선택을 강요하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가. 형선과 세 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스스로 어떤 자식이고 어떤 부모인가(혹은 부모가 될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지호네 약국, 퇴근시간이다.

지호: (급하게 외투 챙겨 조제실을 나오며) 나 먼저 갈게요~
혜정&예슬: (무슨 일 있나??)

정인에게 전화를 걸며 약국 코너를 도는데 그녀가 딱 서 있다.

지호: (정인을 보고 깜짝 놀라) 아이고~

정인: 되게 놀라네?

지호: 아니, 카페에서 기다린댔으니까. 왜 여기 있어요?

정인: 동네에 소문나라구~

지호, 피식 웃는데 혜정이 지호를 뒤따라 나오다 둘을 발견하고 멈춘다.

혜정: (당황해서) 아~니, 하두 급하게 나가길래, 집에 무슨 일 생겼나 하고..

지호: (민망해서 웃으며) 무, 무슨 일이 생겨요~ (빨리 들어가라고 손짓)

혜정: (웃으면서 눈빛으로 정인쪽을 가리키며 소개해 달라고 한다.)

지호: (어휴, 어쩔 수 없다.) 여기는~

혜정: (기다릴 수 없다.) 안녕하세요~ 왕혜정이라고 해요.

정인: (고개 숙여 인사) 안녕하세요. 이정인입니다. 저는 뵜었는데.. 약국 몇 번 갔었거든요.




혜정: 어후~ 그럼 아는 척하지 그랬어요~~ 제가 얘에 대해선 싸그리 폭로할 게 엄청 많거든요~ (웃는다.)

지호: (당황해서 웃으며 혜정을 막고 약국으로 민다.) 누나 빨리 퇴근해야지~

혜정: (지호에게 밀려 올라가며 웃는다.) 아휴, 우리 또 봐요~~ (손들며 인사)

정인: (고개 숙여 인사하며) 네~

-> 이유 커플 탄생의 일등 공신인 혜정, 그동안 지호가 애지중지 아끼면서 숨겨둔 정인을 실제로 보게 되니 너무너무 반갑다. 철벽남 지호를 단숨에 사로잡은 여자가 누군가 궁금했는데 역시... 어두운 골목에서도 빛을 발하는 미모의 그녀다. 이번엔 꼭 진짜 인연을 만나서 지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지호네 카페, 세 번째 방문이다. 단골이 된 이유 커플은 그들의 지정석인 창가 자리에 앉아 서로 마주본다. 되게 오랜만인 거 같다.

지호: (반가움에) 갑자기 차 한 잔 하자고 해서 놀랐어. 진짜 무슨 바람이 분거예요?

정인: (귀엽게) 봄바람. (차 마신다.) 퇴근하다가 그냥. 피곤은 한데 집에 바로 가기는 싫고, 진탕 놀고싶은 건 또 아닌? 뭐 그런 날 있지 않아요?

지호: (미소 띠며) 그래서 또 만만한 유지호?

정인: (그건 아니다.) 편해서지~

지호: 말은~ (피식)


정인: 진짜! (눈을 맞추며) 난 지호씨가 편해요. (밝고 여운 말투로) 꼭 맞는 베개같애.

지호: (정인의 얼굴을 빤히 보며) 걱정 많이 되죠?

-> 갑작스런 정인의 방문이 반갑고 기쁘지만, 그녀가 자기 앞에서 일부러 더 태연하게 밝은 척하는 거 같아 신경쓰인다.

정인: (고개를 저으며 차 마신다.)

지호: (입술을 물었다 떼며) 나만 믿어라, 그런 뜬구름 같은 약속 못해.

-> 정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은데 그렇다고 헛된 희망을 심어주고 싶진 않다.

정인: (지호를 본다.)

지호: 대신, 좋을때든 힘들때든 괜찮아. 언제든 오늘처럼 와요.

-> 언제나 늘 항상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서 정인을 기다리겠다고 약속하는 지호.




정인: (두 팔을 테이블에 올리고 기대서 귀엽게) 방문 서비스는 없나?
-> 눈물을 그렁그렁해서 지호를 바라보던 게 엊그제인데 이젠 막 애교가 넘친다. 사랑이 좋구나~~


지호: (웃으면서 장난친다.) 누구처럼 하는 거 봐서.

정인: 치, 못된 건 진짜 빨리 배워.

지호: 매일매일 달려가고 싶지. 에라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 그런 맘이 얼마나 큰데...

-> 지호는 지금 죽을 힘을 다해 참고 있다. 그녀를 보고 싶고 손잡고 싶고 안고 싶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그녀를 밀어낼 때가 더 힘들었을까, 지금이 더 힘들까?


: 근데?

지호: 함부로 까불다가 이정인 어버리면 어떡해? 다신 없을 사람인데...

-> 어후... '다신 없을 사람'이라니, 사랑한다는 말보다 백 배 천 배 감동이다.


정인: (감동받아 울컥) 이러다가 실망하면 어떡하려구. 나에 대해 다 모르잖아.

지호: 더 알게 있나?

정인: 있지~

지호: 뭐?







정인: (시선 창으로 옮기며) 사실은... (팔을 내리고 아래를 본다.) 나 큰일났어요.

-> 사랑 고백의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몰카 연기 시작하는 정인.


지호: (무슨..) 왜요? (탁자에 손 올리며) 뭔데? 얘기해봐요.

-> 정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긴장하는 지호.


정인: (지호를 빤히 보다가 눈 내리깔며 한숨 길게 쉬고) 내가... (지호를 보며) 지호씨, 사랑한다!

-> 지호에게 혼나고 차일까봐 긴장하며 그를 만난 날, 갑작스런 사랑 고백에 감동받은 그녀는 아마도 미리 사랑 고백 몰카 시나리오를 준비한 거 같다. 그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고백이 될 듯.



지호: (얼음)

정인: (놀래키는 거 성공해서 뿌듯한 미소)




지호: (얼굴 붉어지고 눈시울도 뜨거워진다.) 말없이 벌떡 일어나 카페 밖으로 나간다.

정인: (당황해서 따라나간다.)




정인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훌쩍이는 지호.

정인: 지호씨.. 허!

지호: (정인 시선 피한다.)

정인: (지호 얼굴 따라 움직이며) 뭐야~ 지금, 운다고?

지호: (아닌척 기침)



정인: (두손으로 지호 얼굴을 잡고 가까이 당겨보며) 어! 운다. 지호씨 운다. (웃는다)

지호: (정인의 손을 잡아 내리며) 안 우는데?

정인: 어, 우는데?




지호: 아냐아냐, 눈에 뭐가 들어가서...

정인: 눈물도 많은 남자야~

(서로 웃는다.)

-> 눈물 많은 지호, 원래 그는 그런 남자였을까? 쉽게 감동받고 잘 울고.. (약국에 걸린 약사 면허증 속 그의 20대 사진을 보면 상남자였을거 같은데 말이지.)
그는 6년 전 자신과 눈 맞추는 은우를 두고 나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그동안의 생활, 행동, 말, 생각까지 통제해야만 했다. 시시때때로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며 사는 동안 인간미를 잃어버린 그가 어느날 정인을 만난 뒤 오만가지 감정이 봇물 터지듯 그의 가슴에서 쏟아짐을 느낀다. 다신 없을 줄 알았던 사람을 만나 다신 못 느낄 줄 알았던 사랑을 확인하고 아이처럼 울음이 터져버린 날, 약도 안 바른 채 덮어만 두었던 상처에 신선한 바람이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