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훈을 통해 재인의 귀국 소식을 뒤늦게 접한 태학은 형선에게 전화해서 재인을 당장 데려다 놓으라고 불호령을 내린다. 형선으로부터 그 얘기를 들은 정인은 재인을 데리고 저녁에 집가겠다고 한다.

형선: (걱정이 가득해서) 아빠 너한테 기분 좋았는데, 이 일로 산통 깨지면 어떡하니~~

정인: 기석오빠하고 헤어졌어.

-> 정인은 기석과 정리를 하려고 맘 먹고 나서부터 엄마를 만날 때마다 조금씩 마음을 내비쳤다.

'결혼은 어떤 사람이랑 해야 돼?'

'무슨 일 생기면 내 편 되달라고.'

'나... 엄마 실망시킬지도 몰라.'


형선: 어머나! 아우 얘, 아무리 바빠도 잠깐 얘기 좀 하자. 가만있어. (정인의 손을 끌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간다.)

-> 형선은 불같은 성격의 태학과 함께 살며 그의 눈치를 많이 본다. 딸들과 남편 사이에 껴서 집안의 평화를 위해 조율하는 역할을 하며 늘 마음을 졸인다. (아주 가끔은 자기를 무시하는 태학에게 못 참고 맞서서 넘어뜨리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 형선이 아버지의 뜻에 반기를 드는 딸들의 편에 서면서 종국에는 태학과 이혼할 결심까지도 한다. 봄밤은 가부장적인 남편에게 종속된 삶을 살던 아내의 정신적 독립을 보여주는 드라마기도 하다.


정인과 형선, 야외 휴게실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형선: (오늘은 알아야겠다.) 뭐냐니까, 응? 저번부터 실망시킬지도 모른대니 뭐니 하는 게 수상했어. 뭔데, 응? 기석이랑 헤어진 거, 그거 다 아니지?

정인: (더는 숨기지 않겠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형선: (이게 무슨..) 뭐?

정인: 지금은 이거 말곤 다른 얘기 못해..

형선: (놀라서) 이게 무슨 소리야 다~? 그것 때문에 기석이랑 깨진거야?

정인: (고개를 저으며) 아니, 정리 중이었어. 그러는 사이 그 사람이 나타난거야. 한눈 팔았다고해도 상관없어. 변명하고 싶지도 않고.

형선: 그 사정까지는 알 바 아니고.. 그래서 누군데? 그 사람이 누군데?

-> 형선은 뭐가 중한지 잘 아는 사람이다. 이미 벌어진 일을 가지고 시시비비를 따질 필요가 없다.


정인: 아직은 말 못해요.

형선: (한숨)


정인: 엄마, 내가.. 최대한 노력하고 말씀드릴게요. (형선 손 잡으며) 나 믿고 기다려줘.

형선: (그래도 걱정스럽다.)



퇴근하고 본가로 가는 지호 차에 혜정이 함께 있다.

혜정: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차 얻어탄 김에 한 잔 하려고 했더니 애들이 빨리 오라고 난리다 난리.. 아이고..

지호: (혜정 폰을 곁눈으로 보며 미소짓는다.) 다음에 집 앞으로 갈게요. 오늘은 엄마네 가야하고.

혜정: (본가 가는 지호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 마스크땜에 일부러 가는 눈치는 아닌데?

지호: (혜정에겐 뭘 숨길 수가 없다.) 뭐.. 겸사겸사. 지난 번 일 있고 나서 연락도 잘 안 하셔.

혜정: 정인씨? 흠... 엄마 말씀도 전혀 이해 못할 건 아니지.

지호: (혜정 힐끔 보고) 아는데... (앞을 보며 단호하게) 그래도 들어드릴 순 없어.

-> 사랑 앞에서 망설이고 머뭇거리던 지호는 더이상 없다.


혜정: (달라진 지호를 빤히 본다.)

지호: (혜정 눈길을 의식하며) 사고치라며?

혜정: 친게 아니라 당한건데~ 정인씨 보니까 사이즈 나오더만~ 철벽치고 살던 유지호 무너뜨릴만 하더라. (웃는다.)

-> 길가에서 잠깐 보고도 정인을 한눈에 파악한 혜정이다.

지호: (같이 웃는다.)

-> 정인 칭찬하는 소리에 팔불출 미소짓는 지호.

혜정: (지호 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어? 우선 연애만?

지호: (단호하게) 마지막이지. 내 인생에서 마지막 여자라고.

혜정: 그런건 단정짓는 거 아니야~

지호: (결의를 다지며) 두고봐요. 어떻게 되나.

혜정: (며칠새 정인과의 사랑에 대해 확고한 결심을 한 지호를 보며 놀란다.)






그날 저녁, 정인은 본가 가서 재인과 나란히 태학 앞에 무릎 끓고
있다.

태학: 이사장님 만난 일도 그래. 아빠 체면을 봐서라도 참았어야지~ 뭐? 당장은 결혼을 못해? 하.. 그 양반이 마음이 넓어 이해했으니 다행이지, 심기라도 불편해졌음 어쩔뻔했어?

-> 자식이 바라는 것보다 자신의 체면을 중시하며 상사의 눈치만 보는 구시대의 아버지다.


정인: (아닌 건 아니다.) 당장은 못하는 게 아니라 결혼 생각 전혀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 잘못된 사실은 바로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올곧은 성격이다.


태학: (놀라서 형선 본다.)

형선: (당황해서) 아니, 저기.. 지금 당장 하는 게 아니니까..

정인: 아빠.

재인: (손가락으로 정인의 허벅지를 찌르며 말린다.)

정인: (재인이 손을 잡고 작게 '알아.'하고는 아빠를 보며) 기석 오빠한테 헤어지자고 했어요. 많이 고민해보고 힘들게 결정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오빠하곤 미래가 안 보여. 내가 만족하지 못하겠어요.

태학: (어이가 없어 언성이 올라간다.) 기석이가 부족하면 대체 어떤 놈이 성에 찬다는 거야? 너 그렇게 높이 보며 살았어? 내가 널 미처 몰랐던거냐?

정인: (차분하게 할 말을 이어간다.) 기석오빠 나쁘지 않아요. 조건으로만 보면 과분하기도 하지. 근데 지금까지 와보니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태학: (답답해서 소리지른다.) 그러니까 니가 바라는 게 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정인: (진심을 담아) 따뜻한 사람.
태학: (기가 막혀서 형선 보며) 아, 얘 지금 뭐래는거야?

형선: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따뜻한 사람이 좋대잖아..

-> 정인의 진심을 형선은 안다. 그치만 지금 상황에서 태학에게 털어놔봤자 정인의 진심이 통하긴 커녕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격이라 형선은 답답하다.


태학: 하 참.. 기가 차네, 기가 차. 허구헌날 소설책이나 뒤적대더니 머리속에 허상만 채웠네. 아주 인생을 헛살고 있었어.

-> 태학은 도서관 사서인 딸이 책에 파묻혀 지내다보니 현실감각을 잃고 잘못된 선택을 한다고 생각한다.


정인: (속상해서 울컥한다.)

-> 정인은 태학에게 자신의 진심 뿐 아니라 직업까지 무시당하자 서운하고 답답해서 눈물이 차오른다.


태학: (버럭 화를 낸다.) 뭘 울먹거려? 그따위 정신머리로 무슨 결혼이야? 나가서 길을 막고 물어봐라. 니가 하는 소리 알아듣겠다는 사람 하나라도 있나!



정인: 있으면? 내 말 이해해주는 사람 있으면, 허락해주실 거예요?

-> 태학의 세대가 만든 상식이 과연 정답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능력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사회적 지위가 사람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겠지만, 그것에 정신까지 지배당하며 언제까지 물질의 노예로 살아야하는가. 정인이 읽는 책은 속 보이는 계산기 따위를 두들겨대지 않는다. 진심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라고 말해준다.


선: (그만 말리고 싶다.) 저, 정인아..

정인: (애원하는 눈빛으로 형선을 본다.)

형선: (태학을 보며) 아, 여보.. 이만하면 애들 다 알아들었어. 이제 그만해.. 응?


태학: (누군가 있는 거 같다.) 너? 혹시?

정인: (참지 않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 재인이 정인에 대해 '한 번 맘 먹으면 우리 가족 아무도 못 말려.'라고 했던가. 정인의 욱하는 성격을 아는 재인은 집에 들어가기 전 그녀에게 '아직은 아니야. 유지호씨 얘기하면 언니 죽기 전엔 이 집에서 못 나와.'라고 단도리를 했건만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정인은 경솔한 걸까? 낮에 만난 엄마에게 지호의 존재를 털어놓은 그녀는 더이상 그를 숨겨가며 만나고 싶지 않다. 기석과 헤어지고 지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까지 한 마당에 아버지에게 혼나는 건 하나도 두렵지 않다. 언제고 아시게 될 일, 기석이나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하느니 자기가 먼저 말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거다.



그 시각, 지호는 본가에서 저녁 먹고 난 뒤 부모님과 식탁에 둘 앉아 있다.

숙희: (지호에게 과일을 건네주며) 혼자는 이런 거 더 못 챙기자너. 배불러도 먹어. (남수에게도 과일을 주며) 당신도.

남수: 나도 뭐 저녁 먹고 났더니 영... (하면서도 한 입 먹는다.)
-> 배불러도 아내의 말은 잘 듣는 남수. 숙희와 남수의 관계를 보면 왜 지호가 정인에게 끌렸는지 알 거 같다.


형선: (지호 눈치보며 말 꺼낸다.) 그, 전에 얘기하려던 사람 있잖니~ 실은 저기 아래 마트집 딸인데..
남수: 그건 지나간거지~

숙희: (남수 보며 눈치준다.)

지호: (과일을 다시 접시에 놓고) 저 결혼할 거예요.

숙희와 남수, 놀라서 지호 본다.
숙희: 아, 그럼~ 해야지. 그럼, 그래서 엄마가 이렇게 소개를 하려고 막..
지호: (단단히 결심하고 말한다.) 전에 말씀드렸던 사람하고요. 당장은 아니지만, 뭐 그렇다고 더 만나보다가 생각이 달라지거나 할 일은 절대 없어요.

숙희: 그 사람 미혼이라며. 안된다고 얘기했잖아?

지호: 죄송해요.

숙희: (부모 맘을 몰라주는 아들이 답답하다.) 얘가.. 너는 니 자식이라서 잘 몰라~ 자기가 낳지도 않은 애 부모되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어?

남수: (은우가 신경쓰여서 작게) 조용히 해~ 들어~





숙희: (은우방 쪽을 돌아보고 속상해서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지호: 나는요. 난 쉬웠겠냐고. (울컥) 왜, 왜 내 맘은 몰라주세요~

-> 혈기왕성한 20대 남자인 지호, 약대를 졸업하고 창창한 미래의 계획을 세우며 달려가려는 그에게 갑자기 헤어진 여친이 배불러서 나타나 아빠가 될 거라고 한다. 무슨 애완동물을 입양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반 닮은 아들이 생긴다는 거다. 이 무슨 청천벽력같은 말인가...

여자는 임신을 확인하고 나면 뱃속에서 점점 커지는 태아의 존재를 온몸으로 느끼며 엄마가 될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그러나 남자는 다르다. 모든 걸 아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게 된다. 사랑해서 결혼하고 부모가 되려는 각오를 한 부부도 막상 밤낮없이 울어대는 갓난아기를 대면하면 어쩌지 못해 불면증에 시달리며 밤만 되면 두렵고 괴롭다. 부모가 된 걸 후회하기도 하고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다.

하물며 아무 준비없이 두 팔에 핏덩이 같은 갓난아기를 안았을 지호는 어땠을까? 네 아이를 낳아준 여자와 결혼부터 해야 한다는 부모님 앞에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것만으로도 혼란의 연속인데 은우가 생긴지 한달도 안되서 그녀가 갑자기 사라졌다. 자기를 배신한 것도 기가막힌데 뱃속으로 낳은 자식까지 버리고 잠수탄거다. 학교를 휴학하고(약사면허증을 따고 29살쯤이니까 그는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을 듯) 미친놈처럼 찾아다녔지만 어디에도 없는 그녀, 벌써 외국으로 가버렸단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때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세상이 다 암전되어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절망감을 느꼈으려나... 하... 감히 상상조차 안 된다.

영재가 그랬다. 지호가 진짜 독한 놈이라고. 책임감 하나는 정말 지독하게 강하다고. 믿어도 된다고. 그를 그렇게 단단하게 만든 건 부모님이다. 매일 술마시며 인생 다 포기하고 싶었을 그를 숙희는 멱살잡고 독하게 일으켜 세웠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외아들 지호를 살뜰하게 챙기며 바르게 키운 숙희와 한 곳에서 터잡고 몇 십 년 동안 성실하게 세탁소를 운영하는 남수를 보며, 그 또한 무슨 이유로든 자기에게 온 아들을 받아들이고 책임을 지기 위해 이를 악물고 세상에 다시 발을 내딛었다.

자기를 보며 눈을 맞추는 천사같은 아기에게 '은우야~'라는 이름을 부르고, '아빠라고 해봐. 아빠~'라는 말을 가르치는 지호를 상상해보니 눈물이 울컥 솟는다. 행복하게 불러야 할 이름과 호칭을 그는 눈물 없이 부를 수 있었을까? 은우가 처음으로 그에게 아빠라고 했을 때 그제서야 그는 벅찬 눈물과 함께 미소를 짓지 않았을까? 그는 그렇게 아빠가 되었을거다.









숙희: (안타깝다.) 지호야..

지호: (자기 맘을 몰라주는 숙희에게 서운하다.)

남수: (한숨 쉬며 일어난다.)



세탁소 안, 지호가 겉옷을 챙겨 입고 남수에게 인사하러 들어온다.
남수: (소주 한 병을 꺼내 지호를 보며) 바로 가야하냐?

지호: (말없이 종이컵을 꺼내서 남수 옆에 앉아 소주를 따라 건넨다.)

남수: (고개숙인 지호 보고 한숨 쉬며) 너무 섭섭하게만 생각하면 안 돼~ 우리도 속으론 얼마나 기쁘겠어. 근데 은우를 생각하면 또 마냥 좋다고만 할 수 없는게 사실이라..

지호: 나라고 생각 안했겠냐고.. 얼마나 많이 멈출라고 했는데.. 안되니까 여기까지 왔지.. 오히려 그 사람한테 미안해죽겠어. 나만 봐주는데, (한숨) 난 머뭇거리기만 했다고.

-> 지호는 편견 없이 자신만 봐주는 정인 앞에서 늘 비혼부인 자신의 처지가 맘에 걸려 주저했지만, 부모님마저도 아들인 자기보다 손자인 은우를 먼저 생각하니까 서운한 마음이 든다.


남수: (소주 한모금 마신다.)

지호: 은우일 겪고, 다신 두분 속 안 썩이겠다고 다짐했어요. 어떤 말씀도 거역 안하겠다고 죽을 각오를 했어. 근데, 이 여잔 못놔요. 힘들 거 알아. 그래도 갈거야. 그만큼 절실해요.

-> 같은 날 같은 시간, 정인이 부모님 앞에서 따뜻한 마음을 지닌 지호를 향한 마음을 굳건하게 밝힌 것처럼, 그도 어렵게 붙잡은 그녀를 다시는 놓칠 수 없는 절실한 마음을 확고하게 밝힌다.


남수: (한숨 내쉬고) 살얼음 위에 살던 니가 이렇게까지 확고할 땐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얼마나 고민을 했을지 알고도 남아.

지호: (울컥한다.)
-> 지호의 편에서 그의 마음을 공감해주는 남수가 있어 참 다행이다.


남수: (지호를 보며) 어떤 사람이야?

지호: 처음으로 날.. 유지호로만 봐준 사람이에요. (말만으로도 울컥할 만큼 벅찬 표정으로 남수를 본다.)

->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의 6년, 보통의 남자라면 모든 면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쳐날 시기에 지호는 미혼부가 되어 때때로 치밀어오르는 감정과 욕구를 꾹꾹 억누르며 살아왔다. 그러다 정인을 만나 누구의 아들 또는 아빠가 아닌 남자 유지호로 다시 살 수 있게 된 거다. 그에겐 다시 없을 운명이다.

남수: 흠.. (지호의 허벅지를 두드리며) 고맙다. (소주 한 모금)

-> (점쟁이가 지호를 보면 30대 중반에 귀인을 만나 만사형통할 사주라고 할 거 같다. ㅋㅋㅋ)
삶의 열정을 거세당하고 무표정으로 살아가던 지호의 얼굴에 절실한 감정이 나타난 게 얼마만인지... 남수는 아들의 진가를 알아봐준 정인의 안목과 귀인을 알아보고 붙잡은 아들의 용기가 고맙다. 오랜 나날 잿빛의 하늘이었던 지호의 얼굴에 햇살이 비치며 무지개가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