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호네 평창사 세탁소, 세탁을 마친 옷들이 빽빽하게 걸려있다. 어두운 가운데 한쪽에만 은은한 불빛이 살짝 비춘다.

정인: (세탁소 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어렸을때부터 살았어요?

지호: 그랬죠. 초등학교때부터니까.

정인: 음... 깨끗한 어린이였겠다.

지호: 세탁소를 안했어도 지저분하지 않았을 거예요. 엄마가 워낙 깔끔하셔서.

정인: 음... 누구 닮았어요?

지호: 좋은 면은 부모님이 주셨고, 나쁜 면은.. 내가 만들었겠죠.

정인: (지호를 돌아보며) 지호씨, 효자구나?

지호: 무슨 효자야~ 속을 얼마나 썩였는데..
정인: (살짝 웃다가 뒤에 의자를 보며) 앉아도 되죠?

지호: 어, 앉아요.

정인: (의자에 앉아서) 이상하게, 알던 데 같애. 어릴 때 생각도 막 나고.

지호: (정인 옆에 앉으며) 익숙한 데니까.

정인: 약국도 그래선가? 생각해보니까 지호씨도 처음부터 설지 않았어.

지호: (장난스런 표정으로) 술이 덜 깼었다며?

정인: (째려보며) 분위기 깰래?

지호: 난 반대였는데.. 그땐 정인씨가 너무 해맑아서 신기했어요.

정인: 지금은 아니란거네?

지호: (미소띠며)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지.

정인: 칫~ (웃는다.)

지호: (일어나서) 믹스커피 있는데...

정인: 은근 분위기있어 여기. 한 잔 하기 딱 좋겠다.

지호: (정인을 돌아보며) 할래요?

정인: (깜짝 놀라) 술도 있어요?

지호: 아마도? (남수가 서랍에 넣어둔 소주 한 병을 꺼내 보여준다.)

정인: (웃음이 나서 입을 막는다.)

지호: 잠시만요~ (종이컵을 찾는다.)

-> 그녀를 세탁소에 데려온 지호는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과 부모님 얘기를 들려준다. 아버지의 일터인 이곳은 그가 학교를 다녀오는 길에, 골목을 뛰어놀다 지치면 들르는 쉼터였을 거다. 좀 더 커서는 이런저런 고민으로 잠 못 이루는 밤에 홀로 앉아 사색하기도 하고,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생일 땐 친구와 소박하게 술잔을 나누는 공간이기도 했을거다. 이젠 부모님도 친구도 아닌 그녀와 그의 성장이 고스란히 새겨진 세탁소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그녀는 약국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처럼 세탁소에서도 뭔지 모를 편안함을 느낀다.




정인: 나더러 재인이가, 이기적이 되래요. 어떠냐고. 내 진심을 지키는 일인데... 위로하는 말쯤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야. 그래야하는 거더라고요. 그래서 죄책감 안 가지려고.

-> 재인의 조언은 혜정 선배가 지호에게 '사랑이 무슨 봉사활동이니? 혼자 희생해주는 건 어리석은 내 만족이지 사랑 아냐~'라고 했던 말과 일맥상통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서 희생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오답인 걸 알아버린 연인 관계를 억지로 유지하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의리이고 사랑일까? 누구 있냐는 기석의 의심 앞에서 없다고 부정하며 테이블보를 움켜쥐던 정인이나, 그녀와 서로 같은 마음인 걸 알면서도 머뭇거린 지호나 둘 다 자신의 진심을 외면하였기 때문에 더 힘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자고 하는 게 사랑이다. 내가 불행한 사랑은 더이상 사랑이 아니다.

지호: (아래를 보며) 헤어진 시기 때문이 아니에요. 유지호라는게 존심 상하는거지.

-> 지호는 자신을 무시하고 얕보는 기석의 태도에 기분이 상하면서도 한편으론 세상의 편견어린 시선으로 생긴 자격지심 때문에 위축된다.


정인: 기죽는 거면 실망할거야.

-> 지호 때문에 기석과 헤어진 건 아니지만 만약 지호가 기석보다 부족한 사람이라면 정인이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그를 선택했을까? 그녀에게 지호는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남자이다. 그가 피해의식을 가지고 기죽는 건 보기 싫다.





지호: (정인을 보고 허리 펴며 미소짓는다.) 이정인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어서..

정인: (지호의 말이 슬쩍 마음에 걸린다. 소주 한 모금 홀짝인다.)

-> 지호는 자기가 기석에게 내세울 수 있는 건 정인의 마음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닌데? 더 젊고 잘생기고 몸도 건강하고 승부욕도 뛰어나서 농구도 잘하고, 여자 마음 알아주고 배려심 깊고 재밌고 머리도 좋고 공부도 더 잘해서 약사라는 전문직이고...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나 재산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며 남 깔보는 게 취미인 기석보다 백 배 천 배 낫다.
아니, 어쩌면 그가 말하는 '이정인이라는 빽'은 이정인이 알아봐준 좋은 사람이란 뜻일수도 있겠다. 4회였나, 그녀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풀이 죽었던 그에게 '지호씨를 알게 되서 참 좋아요. 좋은 사람이잖아.'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이제 그녀를 사랑하는 일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정인: (진지하게) 지호씨 머리 좋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얘기할 거니까 잘 겨요.

지호: (정인쪽으로 몸 돌려 앉는다.)

정인: 앞으로 지호씨가 못마땅할땐 바로바로 뭐라고 할거야. 납득하기 어렵게 화낼 수도 있을거고, 못된 말들로 막 쏟아낼 수도 있어요. 그럴때 혹시라도 지호씨 무시하는 맘이 있어서라고 해석하지마. 내 눈치보는 쪼다짓도 하지마. 아예 유지호 안 만날거야.
-> 정인은 지호가 혹시라도 자신의 올곧은 성격때문에 하는 말들에 오해하고 상처 받을까봐 걱정한다. 아마도 그녀는 기석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성격을 감당할 수 있는 남자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나보다. 상위 1%의 외모만큼이나 개성 강한 성격의 그녀를 기석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 그의 배경을 보고 비위를 맞추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던 그에게 정인처럼 눈치보지 않고 그를 막 대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녀에게 더 끌리고 내 여자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들었을지 모른다.



지호: (말없이 정인의 손을 가져다가 두 손으로 감싸 무릎에 올.)

-> 정인이 굳이 말 안해도 지호는 다 안다. 제멋대로 구는 못된 이정인인거, 날 좋아하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니까 더 화내고 본인부터 살고 보겠다는 심보인거, 은우를 걱정해서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잔소리한 거, 모두 그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고 행동인 걸 그는 알고 있다.




정인: (정색하며) 듣기 좋으라고 한 말 아니에요. 중요한거야. 꼭 기억해야돼, (지호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 응?

지호: (정인에게 살짝 뽀뽀한다.)
-> 정인은 참 바보다. 그렇게 좋아하는 티 다 내놓고 머리 좋은 그가 모를까봐 걱정이다.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그의 내밀하고 소중한 공간에 단 둘이 있는데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의 눈이 마냥 행복하다. 술은 정인이 마셨는데 분위기에 취한 건 지호다.



정인: 이 와중에 살길 찾는거봐. 음주운전 걸릴까봐 뽀뽀만 한거잖아.

지호: (인이 귀여워서 웃는다.)
정인: (웃으며 한모금) 카아~




지호는 늦은 밤 정인과 단둘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안전하게 머물 곳은 세탁소뿐인 줄 알고 왔는데, 과일 심부름 나왔다가 들어가는 남수에게 그만 딱 들켜버렸다. 뭐, 그래도 걱정없다. 아버지는 아들 편이니까. 아들의 데이트에 방해될까봐 몰래 숨어서 지켜보다가, 자기를 찾으러 나온 숙희가 혹시라도 눈치챌까봐 단단히 마크하는 남수다.


세탁소에서 몰래 꺼내마신 소주에 취한 걸까, 아니면 지호와 나눈 첫키스에 취한 걸까, 눈을 감고 봄밤의 꽃향기를 만끽하는 정인은 마치 봄바람을 타고 날리는 꽃잎처럼 하늘거리며 걷는다. 그런 그녀를 지호가 두 팔 벌려 안아준다. 그녀가 어디 멀리 날아갈까 싶어 꼭 붙잡는 것처럼... 이젠 혼자가 아니라 둘이면서, 둘이 아닌 하나가 되고 싶은 연인은 서로 눈을 맞추며 환하게 웃는다.




이유 커플의 데이트는 밤새도록 이어진다. 이들의 발이 닫는 곳은 모두 첫키스를 나눈 봄밤을 떠올릴 때 함께 그리워할 추억의 장소가 된다.


봄밤은 알고 있었다. 이들이 사랑에 빠지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