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약국에서 지호를 처음 만난 날, 약사 지호가 불러 준 전화번호를 단번에 외워서 저장한 정인, 계좌번호를 묻는 문자를 보내고는 그에게서 답문이 없자 신경이 쓰인다. 
'일하느라 못보나...?' 

정인은 동료 하린과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하린: 사람도 이랬으면 좋겠어. 기대 안 했는데 만날수록 점점 더 괜찮은..

정인: 첫만남이 운명적인 원샷 원킬이 될 수도 있지.

하린: 아니, 오늘의 운세도 절대 안 믿는 현실주의자께서 웬일?

정인: 그거는 꼭 조종당하는 거 같잖아. 어, 이거 하지마, 저기 가지마.. 별로야.

하린: 그렇다고 모험을 즐기지도 않잖아요?

정인: 야, 살면서 모험할 일이 뭐가 있니?  뭐, 학교 다니고 졸업하고 취업하고, 매일 똑같은 출퇴근에, 사이사이 가끔 친구.. 그게 단데..

하린: 연애를 왜 빼요? 그게 각종 사건사고의 핵인데.


퇴근 후 연인 기석의 차를 타고 친구 영주의 집으로 향하던 중 우리 약국을 발견한 정인.
'벌써 퇴근했나? 혹시 아직 저 안에 있을까?'
그녀는 불 꺼진 약국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날 밤, 정인은 잠들기 전 다시 한 번 약사에게 보낸 문자를 확인한다.
여전히 답이 없는 그..


정인: 그 약국 자주 가?

영주: 어느 약국?

정인: 너네 동네, 가다 있는 거 같은데..

영주: 어 있기야 있지. 근데 왜 잘 아는 데처럼 얘기해?

정인: (시선을 피하며) 말이 헛나왔지..

영주: (고개를 갸웃대며) 헛나올 말은 아닌데...?
정인 마음 속 지호가 일하는 약국은 어느새 '어느 약국'이 아닌 '그 약국'이 되어 있었다. 그 차이를 영주가 바로 캐치한 건 사서라는 직업 때문일까? 눈치가 빨라서일까? 정인은 택시비 때처럼 이번에도 아닌 척 둘러댄다. 약국에서의 일을 작은 해프닝으로 여긴다면 친구한테든 연인한테든 가볍게 털어놓을 수 있지 않나? 정인은 왜 자꾸 그날의 일을 꽁꽁 숨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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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회. 우리 약국 안
정인: 우리, 친구해요.

지호: 미안해요. 난 편할 자신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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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정인, 힘겹게 부츠를 벗고는 그대로 소파에 몸을 기댄다.
'오늘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약사 유지호.. 그의 고백이 왜 자꾸 마음에 걸리는 걸까?'
그와 주고받은 말들,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 쉽게 떨쳐지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 지호와 주고 받은 문자를 보고, 또 보고, 다시 보고, 또 다시 들여다본다. 창밖에 눈은 그쳤지만, 정인의 마음에는 유지호라는 눈이 내린다.


며칠 뒤 주말, 정인은 밖에 나가자는 재인에게 집에서 쉬고 싶다고 거절한다.

재인: 어, 눈 온다. 아침에 쨍쨍했는데.. 이번 겨울 마지막 눈이겠지? (휴대폰 주소록을 뒤적이며) 누구든 불러내야겠다.. 이정인씬 나갈 생각이 없고..
창밖에 함박눈이 펑펑 날리고 있다. 정인은 갑자기 약사가 생각난다. 다음 눈 오는 날이다.    
정인: 우리 나가자! (벌떡 일어나 방으로 간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오피스텔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는데
정인: 재인아..  

재인: 뭐?

정인: 너 친구 만나러 가도 되지?

재인: 아 왜~ 언니 딴 데 가게? 

정인: 갑자기.. 아니다. 아니아니.. 택시 온다.   
정인의 마음은 벌써 우리 약국에 도착해서 안을 기웃거리고 있다. 겨우 몸을 택시에 실어서 학교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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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회. 삼겹살 집 앞 골목
지호: 먼저 들어가요. 같이 들어가면 거짓말을 해야 될 거예요. 
정인: 뭐, 그냥 화장실 갔다온 건데요 뭐..
지호: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요 그럼.. 편한 대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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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정기적으로 하는 독후감 행사 준비로 바쁜 정인.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려고 끄적이는데,
음악. 트렌드... 계절 . 눈 . 다음 눈 오는 날
그녀의 머릿속은 기승전지호다.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도서관을 찾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정인.  
'지호도 아들 은우와 저렇게 다니려나..?'
하다하다 모르는 사람을 보면서도 지호를 떠올린다.


퇴근길 버스정류장,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눈에 띈 약국 간판에 시선이 멈춘다. 하루종일 지호 생각. 이 정도면 중증이다. 정인은 우리 약국을 서성이는 마음을 찾으러 택시에 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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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회. 지호네 동네 카페
지호: 해요, 친구.. 친구 하자고요, 우리.  

정인: (말없이 지호를 본다.)

지호: 왜, 그새 맘이 바뀌었어요?

정인: (피식 웃으며) 웃겨.

지호: (같이 웃으며) 웃긴 친구 하나 생겼네.


● 3회. 술집 앞

지호: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정인: 뭘 해줄 수 있는데요?

지호: (정인 쪽을 향해 걷는다.)

정인: 건너오지 말아요.

지호: (걸음을 멈춘다.)

정인: (고개를 숙이며) 하.. 그럼 안 될 거 같애.


● 4회. 도서관

정인: (미안한 마음에 괜히 따진다.) 그래서요? 왜 피하는데요. 우리가 뭘 했는데. 지호씨하고 내가 뭐라도 했냐고?

지호: 하자면 할래요? 할 자신 있어요?

정인: 지호씨..

지호: 처음부터 얘기했죠? 난 정인씨하고 친구할 자신 없다고.

정인: 그 얘긴 끝났잖아요.. 그래서 친구하기로 했잖아..

지호: 그럼 형한테 얘기해봐. 우리 친구라고.. 그러니까 언제 어디서 우리 같이 있는 거 봐도 의심하지 말라고. 내가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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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정인은 서인에게 전화를 걸어 꾹꾹 눌러놓은 속내를 드러내며 눈물을 흘린다.
정인: 언닌 요즘 어때?

서인: 괜찮아. 근데 넌 아닌 거 같네? 왜? 무슨 일인데?

정인: 언니..

서인: 응

정인: 나 기석 오빠 배신하면.. 안되겠지? 배신하면 안되는 거지, 그치?

서인: 네가 그럴 땐 이유가 있겠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
평탄한 연애만 했던 정인은 지호를 향한 이성적인 끌림을 감당하기 힘들다.
자신의 불확실한 감정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상처입고 실망할까봐, 그녀는 자신도 속여가며 망설이고 멈추려한다.



며칠 후 도서관,

하린: 무슨 일 있어요?

정인: (하린을 본다.)

하린: 아니, 며칠 계속 기분 별로잖아요.

정인: 괜찮은데 왜..

하린: 안 괜찮은데?

정인: 전에 내가 그런 말 했었지. 나는 모험을 잘 안하는 사람이라고..

하린: 좋아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한 것 같은데..?

정인: 그 모험이라는 게 어디까지를 의미하는 거야?

하린: ??

정인: 모험은 하는 게 맞어... 안 하는 게 맞어?


퇴근하고 영주네 가는 길, 약국 불이 꺼져있다.
그 앞을 왔다갔다 하다가 발을 돌리는 정인.

영주는 정인에게 전화해서 지호가 안부를 묻더라는 말을 전하다가 편의점에서 지호를 마주치고 깜짝 놀란다.
정인: 나 왜 물어보냐고 했더니, 뭐래?

영주: 어, 그냥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요~ 그러던데?
그가 편의점에서 뭘 샀는지도 궁금한 정인, 영주는 그런 그녀가 저번부터 완전 수상하다.
정인과 지호는 도서관에서의 엇갈림 이후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지만, 그들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주변 사람들은 다 안다. 망설이고 기다리는 동안 서로가 더 생각나고 궁금하고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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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회. 지호의 차 안

지호: (고개 숙이며) 난 정인씨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정인: (지호를 보며) 안그래. 나 지호씨를 알게되서 참 좋아요. 

지호: (?? 고개를 들고 정인을 본다.)

정인: 좋은 사람이잖아. 

● 5회. 레스토랑 앞

정인: 내가 사랑을 해달라고 애원하길 했어, 결혼해달라고 매달리길 했어? 이 마음 하나 알아주길 그거 하나 바랬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석: 알았어, 알았어. 나 이제 알겠어.  

정인: 아니, 오빤 처음부터 알았고, 끝까지 묵인하면서 태연하게 지금까지 왔어. 날 제일 아프게 하는 게 그 부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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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석에게 그동안 꾹꾹 눌러온 속내를 다 드러낸 후, 정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더이상은 예전처럼 그를 만날 수 없다. 드디어 영주에게 솔직히 털어놓는다.  
정인: 오빠하고 헤어지려고.

영주: 약사가 그 정도였어? 지금껏 버틴 연애를 버릴만큼?
-> 영주는 약사와 정인 사이를 매우 수상하게 여겼지만 정인이 말할 때까지 더 캐묻지 않고 기다렸다. 영주가 놀라는 거 보면 오랜 연애로 권태기에 빠진 친구 정인에게 지나가는 바람 정도로 약사란 존재를 짐작했나보다. 
정인: 그것때문만은 아니야. 안 믿겠지만..

영주: 믿어. 니 연애 응원했던 사람이 아니라.. 근데 이거는, 남친 배신때리겠다는 거잖아.
-> 정인의 연애가 재인이 눈에만 후져 보이는 게 아니었나보다. 
정인: 시기가 맞물렸을 뿐이야.

영주: 억울해도 그게 배신이야.
-> 영주는 앞으로도 계속 정인에게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평가와 조언을 해준다. 이런 친구가 있는 정인이 부럽다. 
정인: 헤어지지마?

영주: 아이그.. 마음에 딴 남자 품고 몸만 가있을 자신 있으면..
-> 영주는 핵심을 잘 집는다. 연애 상담의 내공이 고수인 듯.
정인: 하아..

영주: 너 못 헤어져. 아니, 니가 못하는 게 아니라 니 남친이 못 놓을거다.

정인: 존심 강해서 그럴 사람 아냐.

영주: 들키면? 야, 그 자존심에 지가 딴놈한테 밀렸단 거 알아봐라. 순순히 놔주겠냐?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자기 대학 후밴데? 가능성 제로 본다. 아니, 내가 6년을 만나고도 어떻게 헤어졌는데.. 서로에게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어. 야, 만약에 제 3자가 거기 있었으면 지금까지 전쟁이었을걸?

정인: 하아.. 전쟁이건 말건 더이상 못 만나.
-> 여태껏 관성으로 버텨온 기석과의 관계 정리, 정인이 첫 번째 벽을 넘기로 결심했다. 

영주: 아니, 그 약사는 뭐 기다리고만 있는다니?

정인: 그 사람하고도 못 만날거야.

영주: 남,남친이랑 헤어져도 안 만날거라구?

정인: 자신이 없어. 그 사람 옆에 있을 자신이..
-> 정인은 아직 두 번째 벽을 넘을 자신은 없다.
영주: 잠깐만, 나 지금 전혀 이해를 못했어. 응?

정인: (잠시 망설이다) 나중에..

영주: (들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으며) 어후, 손 떨려..
-> 눈치 백단에 연애상담 고수인 영주조차도 정인이 자신없어하는 이유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절친에게도 말 꺼내기 어려운 핵폭탄 급 비밀인가 싶어 걱정이 앞선다.  




정인은 기석을 만나 헤어지자고 말하려 하지만, 그는 눈치를 챘는지 약속이 있다며 만남을 피한다.
퇴근하면서 지호를 떠올린 그녀,
조심스레 전화를 걸어보지만 그는 받지 않는다.
궁금한 마음에 그의 집 앞에 와보니 3층 베란다 불이 켜져 있다.
집에 있구나 싶어 다시 전화를 걸어보지만 안 받는다.
뭐지? 이젠 전화도 피하나 싶어 화가 난다.
그녀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진다. 
가서 따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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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회. 정인의 오피스텔

정인: 날 볼 때 뜸금없고 때론 황당하기도 한 거 알아요. 지나치단 생각 할 때도 있었을거고.. 돌이켜보면 언제부터 시작된건지 모르겠는 혼란 속인데, 빨리 정리할 노력보다는 피하고 싶단 생각만 있었던 거 같애요.

-> 오래된 연인이 잘 만나다가 갑자기 헤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사소한 듯 보이는 틈이 하나 둘 생기면서 안으로 안으로 깊어지다가 한 순간 가해진 작은 충격에도 쩍 하며 갈라지는 거다.
지호: 그때마다 만만한 게 유지호였고?
-> 정인은 우연히 만난 지호에게서 따뜻한 마음 씀씀이를 느낀다. 그의 말 한 마디, 그녀를 보는 눈빛과 표정, 작은 행동에도 함께 있는 그녀를 신경 쓰고 배려하는 착한 마음이 담겨 있다. 좋은 사람... 그래서 그녀는 그가 자꾸 생각나고 보고싶었나보다. 톡으로 해도 될걸 굳이 만나자고 하고 찾아오고 전화하고 그랬나보다.
정인: (본다.) 그래서 고맙다구..
-> 정인은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연애를 해왔는지 깨달았다. 지호 덕분이다. 이제라도 정리할 결심을 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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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텔 앞에서 영재와 재인을 마주친 정인, 간단히 인사하고 먼저 들어가려는데,
재인: 언니! 언니 남친 약사 만나고 있대.

정인: (놀라서 영재와 재인을 번갈아본다.)
기석과 지호가 함께 있다니, 무슨 일이 터질 거 같아 불안하다. 그래서 나와의 약속을 깬건가? 뭔가를 눈치채서?
재인이 집으로 들어오며 언니에게 따진다. 
재인: 약사랑 뭐야? 솔직히 말해. 뭐냐고?

정인: 뭘?

재인:  약사가 좋아한다는 여자 언니지?

정인: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재인: 어후.. 진짜.. (소파에 앉아 정인을 보며) 언니도 좋아하는거야?

정인: (앞을 보고) 재인아... (재인을 보며) 좋아해.
정인은 재인에게 솔직해지기로 결심했다. 지호와 기석이 같이 있다는데 혹여 지호가 상처입을까 오직 그만 걱정되는 걸 보면 더이상 자신의 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기석을 배웅하고 돌아온 정인에게,

재인: 어떻게 할지 결정했어?

정인: (걱정할까봐 말을 못한다.)

재인: 나는, 언니 선택 존중할거야.

정인: (재인을 보며 눈물 글썽, 고맙다.) 
-> 재인이 지호를 부르는 호칭이 '약사'에서 '유지호씨'로 바뀌었다. 재인은 처음부터 지호에게 호감과 매력을 느꼈고 그런 그가 자기 언니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니 다행이다. 정인이 이제라도 후진 연애를 때려치고 진정한 사랑을 찾기를 바란다.
재인: 간만에 한 번 안아줄까?

정인: (재인 품에서 어깨에 기대며 울컥, 눈물이 난다.)

재인: (더 꼭 안아주며 웃는다. 토닥토닥)



정인이 처음으로 지호에게 사과한다.
미안하다고.
그리고 또 처음으로 고백한다.
좋아한다고.
솔직해진 그녀가 그는 참 좋다.
그와 그녀는 부정과 망설임의 시간을 지나 진심의 섬에 도착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이 곳에서 이제껏 걸쳐왔던 거짓을 벗어버리고 흔들림없이 사랑을 키워나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