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가로 간 지호는 깊이 잠든 은우를 남수의 품에 안겨준다. 소풍 가방과 바람개비를 마루에 내려놓고 남수가 은우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본다.

지호: (숙희에게) 가봐야해요. 전화할게요. (서둘러 나간다.)

숙희: (놀라서) 어? (지호를 따라가며) 아, 아 얘~

-> 지호가 사귀는 정인이 어떤 여자인지 궁금한 숙희는 이따 집에 들렀을 때 그녀에게 잠깐 들어오라고 할까 싶었다. 근데 지호가 은우만 넘겨주고 가봐야 한다며 서둘러 나가니까 당황스럽다. 혹시 나들이길에 그녀와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전화한다던 지호는 정인과 함께 주말을 보내며 숙희에게 전화를 못했을거다. 아들이 그렇지 뭐... 그래서 숙희가 혜정에게 물어볼 게 있다며 만나자고 연락을 한건가보다.



택시를 탄 정인은 부모님이 사시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내린다. 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막상 본가 근처에 오니 걱정과 두려움이 엄습한다.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구고 걷는다.


계단 앞에 서서 위를 올려다본다. 오늘따라 집으로 가는 계단이 까마득히 높게 느껴진다.

아버지의 헛된 기대를 포기시킬 수 있을까?
내 진심을 아버지께 납득시킬 수 있을까?
부모님을 아프게 하고는 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심호흡을 길게 하고 한걸음 한걸음 계단을 올라간다. 다시 고개가 숙여진다. 그녀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방에서 나온 형선이 정인을 보고 놀란다.

형선: (정인에게 달려와 앞을 막으며) 어머, 얘얘얘얘~ 너 어쩔려고. 야,

정인: (어깨에 걸친 웃옷을 풀며) 사진은 뭐야?

형선: 아후, 내가 알어? 누가 보낸지도 안 적혀있다니까.

정인: 아빠는?

형선: (정인을 현관 쪽으로 밀며) 아후, 됐어. 빨리 가. 초상치르고 싶지 않음 빨리 가라구.

정인: 죽을 각오는 이미 했어. (집안으로 들어간다.)

형선: (정인을 따라가며) 야야, 야~ 어후, 나 진짜...


태학의 서재, 탁자를 사이에 두고 태학과 정인이 마주 앉아있다. 반쯤 열린 문 뒤에 형선이 초조한 낮빛으로 그들을 보며 서 있다.
태학: (탁자 위로 사진들을 탁 놓으며) 설명해봐. 그 사진에 있는 곡절이 뭔지 설명해보라고!

정인: 보신 그대로예요. 그 사람한테 아이가 있어요.

태학: (정인의 당당한 태도에 어이가 없다.) 너 도대체?

정인: (단호하게) 결혼할 거예요.

형선: (뒤에 서 있다가 정인 옆으로 달려와 앉으며) 저저저저 정인아, 이런 문젠 이런 식으로...


학: (버럭 소리지른다.) 식이고 나발이고. 너 지금 제정신 갖고 하는 소리야? 허락해주세요도 아니고 할거다? 이게 통보할 얘기야? 니가 아주 부모 알기를

정인: 다시 말씀드리면, 허락해 주실 거예요?

태학: (기가 차서) 얘가 그래도 증말

형선: (정인의 팔을 잡고) 얘얘, 지금 너너너너너너 너무 일방적이야. 엄마 아빠한테도 고민할 시간을 줘야지.

태학: (땅이 꺼져라 한숨)

정인: 절대 안 된다만 있잖아. 이미 정해놨잖아? 그게 무슨 고민이야?

태학: 너 말 잘했다. 절대 안된다를 떠올린 것 자체가 이게 얼토당토않은 짓이라는 걸 너도 알고 있다는 뜻 아니야?


정인: (울컥해서 고개 숙이고) 맞아요. 말도 안 돼.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어요. 어떤 때는, 멍해지기도 해. 내가 어쩌다, 어떻게 하다... 근데, 단 한 번도 (태학을 보며) 후회는 안 했어요. 그래서 내가 먼저 결혼하자고 했어요.
-> 정인은 기석과 연인이 된 뒤 그의 집에서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4년 동안 연인 관계를 유지해온 건 그를 너무 사랑하거나 그의 조건을 놓치기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무심하게 변해버린 기석에게 서운함을 느껴 불만을 얘기하면 그는 치킨 쿠폰 따위로 그녀를 얼러줄 뿐이다. 오히려 그녀의 속좁음을 탓하며 이별 통보를 하기 일쑤다. 권위적인 태학과 자존심 센 기석을 보면서 그녀는 남자에 대한 기대나 환상을 갖기 힘들었을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반고흐의 '영혼의 편지'같은 책을 읽으면서 진실된 사람을 만나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상처입더라도 함께 의지하며 이겨낼 수 있는 연애를 꿈꾼다. 그런 그녀 앞에 어느날 마음이 따뜻한 남자, 유지호가 나타난 거다. 결혼할 남자가 있는 그녀는 아이가 있다는 그와 연인 사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기석과 달리 그녀를 배려하고 세심하게 챙겨주는 그에게 끌리면서도 그의 곁에 있을 자신은 없었다. 그녀는 어쩌다, 어떻게 하다 그와 결혼까지 결심하게 된걸까?

기석을 만나는 동안 그녀는 그가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결혼은 어떤 사람이랑 해야 될까?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함께 있으면 설레고 마주보며 웃을 수 있는 사람, 기석은 아니지만 지호는 그런 남자였다. 그녀는 그가 좋은 사람이란 걸 알아보고 나서 놓치고 싶지 않은 맘에 몇 번을 찾아가며 친구하자고 했다가, 친구로만 지낼 자신없다고 했다가, 결국은 딴 여자 만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한다.

미혼부를 만나는 걸 알고 그녀를 걱정해주는 언니 서인과 친구 영주의 맘을 알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은우가 예뻤다. 지호에게 처음부터 호감을 느낀 것처럼. 은우가 준 공룡 스티커를 휴대폰에 붙인 것도 그녀 마음이 은우에게 활짝 열려있기 때문이다. 연애는 상대에 대한 이성적인 끌림만으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결혼은 가족이 되어 평생을 함께 해야 하는거다. 만약 정인과 은우가 서로를 조금이라도 불편해했다면 그녀는 지호와 결혼할 결심을 하기 어려웠을 거다. 은우까지 셋이 함께 한 나들이는 그녀에게 지호 부자 곁에 함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다.




태학: (기가 차서 한숨을 길게 쉬고) 데리고 와봐.

정인: (단호하게) 싫어요.

태학: (정인을 탁 보며) 왜 싫어! 결혼하겠다며?


정인: 그 사람 불러서 온갖 모욕줘서 나가떨어지게 하려는 거 다 알아. 저한테 하세요. 맞다 죽는 한이 있어두 그 사람 못 데려와.
-> 혹시 태학에게 전적이 있는 걸까? 서인이가 결혼하기 전 사귀던 남친이 있었는데 조건이 별로여서 태학이 반대라도 했던 걸까?
아니면 지난 번 그녀의 오피스텔 앞에서 마주친 지호를 무시하는 태학을 본 뒤로 아빠를 설득하기 전엔 그를 소개하지 않겠다고 결심한건가?
미혼부인 지호를 사랑하고 결혼까지 결심한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비난이나 질타를 혼자서 다 받으려 한다. 안 그래도 미안해하는 그가 자신의 가족에게 무시당하고 상처입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그 시각 지호는 정인네 부모님의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 휴대폰을 손에 쥐고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진동이 울린다. 서둘러 받는다.

재인: 재인이에요. 엄마가 전화를 안 받아서 어떤 상황인지 알 수가 없어요. 지금 가고 있어요.

지호: 난 집 앞이에요.
재인: 올라갈 건 아니죠? 절대 안 돼. 우리 언니 죽어요.

지호: (정인이 걱정되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태학: 기석이 안 만나도 좋아. (꿈쩍 않는 정인을 보고) 알았어. 퇴임하고 재단 일도 포기할게.

형선: 하... (어이없다.)

태학: (형선을 보고) 왜?

형선: (고개를 돌려버린다.)

태학: (정인을 보며) 아빠도 깔끔하게 포기한다고!

정인: 죄송해요. (고개를 들고) 전 포기 못해요.


형선: 정인아, 어? 너너 지금 너무 일방적이라고. 고집 세우지마~ 그리고 너도 시간 갖고 좀 더 생각해봐야 돼.

태학: (화가 나서 소리지른다.) 무슨 생각을 해? 이건 무조건 안되는 거야. (탁자를 내리치며) 가능성 제로! 영이라고!

형선: (같이 언성이 올라간다.) 당신도, 우린 의견에 줄 수 있어도, 결정을 정인이 몫이야.

태학: 부모가 왜 있어? 허수아비처럼 서있기만 하는 게 부모야?

형선: 맘대로 휘둘러도 되는 것도 아니야.

정인: (자기 때문에 부모님이 싸우셔서 속상하다.) 그만해. (울먹이며) 상처 드리는 거 알아요. 너무 죄송해요.
태학: (한숨을 푹 쉰다.)


정인: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엄마 아빠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데, 정말 너무너무 미안한데,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돼요.
-> 읽기글 쓰면서 정인에 대해 '마음이 시켜서 하는 거다.'란 표현을 몇 번 썼었다. 지금은 그녀의 심장이 머리를 마비시켜 버린 상태다. 지호를 만날수록 그에게 끌리는 감정이 너무 크고 행복해서 그가 지닌 조건을 냉정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절친 영주가 아무리 팩폭을 날리며 현실 조언을 해도 그녀는 세상 욕받이가 되든 말든 그를 만날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자신에게 꼭 맞는 베개처럼 편안하고 좋은 사람이 또 있을까? 그녀는 그가 자신의 운명이라 믿기에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커도 마음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태학: 니가 말만 딱따거리지 속이 여려빠져서 그래. 지금도 끊어낼 법도 한데 이 사람 저사람 생각하느냐고 머뭇거리는 거라고! 뭐가 어려워? 눈 질끈 감고 (탁자 위 사진을 집어서 구기려는데)

-> 태학은 기석처럼 정인이 동정심에 지호를 만난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빠는 딸에 대해 반은 알고 반은 모른다. 정인은 외강내유 스타일이다. 자기 주장이 강하지만 다른 이들의 입장이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안다. 그녀가 끊어내지 못하고 머뭇거린 건 기석과의 관계였다. 지호를 알게 된 뒤로 그녀는 달라졌다. 자신의 진심을 지키기 위한 용기와 결단력이 생긴거다.
정인: (아빠한테서 사진을 뺏으며) 하지마!
태학: (정인의 기세에 놀란다.)

정인: (울음이 터져 훌쩍거리면서도 사진을 꼭 쥐고 놓지 않는다.)


정인은 아무리 부모라 해도 자신의 진심을 무시하고 짓밟는 건 참을 수 없다. 태학이 세게 나와도 자신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결연한 표정으로 사진을 한 장씩 소중히 챙긴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태학과 형선은 할 말을 잃는다.

-> 마지막 씬은 참으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하지마!'라고 비명처럼 외치며 아빠 손에 들어간 사진을 빼앗는 정인의 행동과, 어깨를 들썩일만큼 격한 설움이 복받쳐서 훌쩍이며 아빠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무섭게 슬펐다. 15초 정도 되는 짧은 장면은 지호와 은우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큰지 느끼게 해준다.

그녀는 지호에게 프로포즈를 한지 불과 몇 시간도 안 지나서 아빠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녀의 가족은 태학과 형선인데, 새로운 가족이 되고픈 지호와 은우를 지키기 위해 그녀는 부모 가슴에 생채기를 낸다. 이쯤되면 태학에게 둘째딸은 더이상 품 안의 자식이 아니다. 그녀는 부모로부터 몸만 독립해서 사는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새로운 가족을 이루어 진짜 어른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반대하지 않는 결혼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조건이나 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면 모르겠지만, 어느 한쪽이 더 차거나 기우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교장 딸에 사서 교사인 정인이 빼어난 미모와 지성까지 갖추고도 영국에게 인정을 못 받은 것처럼. 실제로 만나보면 그 사람의 진가를 알게 되지만, 부모에게 자식의 결혼은 사람만 보고 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보니 갈등이 생긴다.

부모가 결혼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건이 자식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태학과 정인처럼. 그럼 인생을 더 길게 산 부모의 선택을 따라야 할까? 서인은 그렇게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결심하였다. 그런 언니를 보면서 정인은 태학에게 결혼만큼은 자신의 선택을 존중해달라고 못 박았었다.

결국 결혼해서 사는 건 자식이고 결혼 생활에 책임도 자식이 스스로 져야 한다. 형선의 말처럼 부모는 조언을 해줄 순 있지만 그 책임까지 부모가 대신해줄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