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정인의 프로포즈를 받고 감동과 함께 고민에 빠진 지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퇴근 무렵 혜정에게 상담을 청하고, 그녀는 예슬을 서둘러 퇴근시킨다.

지호: 정인씨가 결혼하재.

혜정: 하재면, 프로포즈를 받았어? 이야~ 유지호, 날로 먹네~ 뭔 복이야?

-> 혜정은 할 말이 있다는 지호한테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겼나 싶어 걱정했는데, 그로부터 반갑고 기쁜 소식을 듣자 한시름 놓고 웃는다. 정인을 첨 봤을 때 지호가 사고를 친 게 아니라 그녀에게 당한 거구나 싶더니, 이번에도 그녀가 지호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구나 싶어 감탄을 한다. (지호 입에서 프로포즈의 'ㅍ'자라도 나오길 기다리다간 은우가 초등학교 입학하는 걸 먼저 볼 수도 있을 듯.)





지호: 그러게요. (그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이제 어떡해야 되나 싶어.

혜정: 뭘, 할까 말까를?

지호: 부모님.

혜정: 정인씬 뭐라는데, 허락없이 밀어붙이재?



지호: 말이 되요?

혜정: 예의가 아니라서 그렇지, 꼭 안 될 건 또 뭐있냐?

지호: (그래도 그건...)



혜정: 에이, 니 속 모를까봐? 혈기로 덤볐다간 역시 이런 놈일 줄 알았다 매도당하는 건 유지 존심이 용납을 못해, 그렇다고 양가의 축복까지 기다리긴 이정인이 지칠 거 같아서 불안해, 요점정리 됐지.
-> 혜정은 지호의 속마음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 같다. 그녀는 그의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본다. 형제가 없는 그에게 가족 말고 이런 지인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지호: 부모님 찾아뵙고 싶은데 정인씨가 걱정돼. 최악은, 나 때문에 부모님하고 돌이키기 어렵게 멀어지게 될까봐.
-> 그는 정인의 부모님을 만나뵙고 그녀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마지막 여자라고 생각하고 평생 아끼며 행복하게 살겠다고, 부족한 점이 많지만 자기를 한 번만 믿어달라고,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러나 혹시라도 자신의 진심이 잘못 전달되어 원치 않는 상황이 벌어질까봐 조심스럽다.

혜정: (잠시 고민하다가) 널 생각해서 참았다 보단, 우릴 위해서 이렇게까지 했다,가 후회없지 않겠니?

-> 혜정은 매사에 신중하고 남을 먼저 배려하는 지호를 여러 번 깨우쳐 준다. '한 번 사는 인생, 후회를 남기지 마라.'






혜정의 명쾌한 상담에 마음이 한결 편해진 지호는 그녀를 보며 미소짓는다.




퇴근하려던 지호는 정인한테 전화를 건다. 그녀는 몰카 사진 건으로 기석을 보기로 했다고 솔직히 말하고 그의 눈치를 본다.
정인: 진짜 오래 안 걸릴 거예요.

지호: (가운을 벗어 옷걸이에 걸며) 알았다니까.

정인: 이해해주는 거 아니었어?

지호: 대신 마지막이에요.

정인: 뭐가?



지호: 우리 일이잖아. 앞으론 혼자 하지 말라구.

정인: 알았어요. 마지막으로 한 번.

지호: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씩씩한 여자를 만났어.

정인: 벌써 슬슬 후회하는 눈친데?

지호: (웃으며) 도망갈 궁리하지 말랬지.



정인: 내가 도망을 왜 가? 기대라며. 진저리나게 달라붙어 있을 거야.

지호: 제발~

정인: (살짝 웃는다. 책장을 손으로 만지며) 나 지호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안 힘들어요. 얼마든 견딜 수 있어.

지호: 나야말로.



정인: (책장에 등을 기대며) 그러면 우리 내기할까? 누가 더 잘 버티나?

지호: 내가 이길 걸?

정인: (허리에 손 올리고) 승부욕 확 올라오네. 해요.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지호: 소원 먼저 말해도 되요?

정인: 치~ 벌써 이긴 것처럼. (웃으며) 뭔데요?

지호: 죽을 때까지, 상대방 기억해주기.

-> 지호의 소원에 담긴 마음을 읽으려니 은우 엄마 얘기를 안할 수가 없다. 자기가 낳은 아기를 버리고 외국으로 떠나서 6년 동안을 연락 한 번 없이 살 수 있다니... 이십대 중반의 어린 나이에 애엄마로 살기 싫었나? 자신이 없었던 걸까? 다른 꿈이 있었나? 아니면 그녀의 부모가 반대를 심하게 했을 수도 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지 않나... 그래도 그녀가 모질고 독한 건 사실이다.

지호의 가슴에 맺힌 한은 그런 여자가 은우의 생모라는 사실이 어떻게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데서 온다. 그는 그녀를 좋은 추억으로 기억할 수도 없지만, 은우를 생각하면 평생을 미워하고 원망하며 살 수도 없다. 6년 동안 그는 자신의 기억에서 그녀를 지워야만 삶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일 거다. 한 때 못 보면 죽을 것처럼 사랑했던 사람이 이제는 기억하면 죽도록 힘든 존재가 되버렸으니, 그를 억누르고 있는 한의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런 그가 정인을 만나 자기 인생의 마지막 여자임을 확신하고 사랑만 하며 살기로 결심한 건 진짜 대단한 용기다. 그러나 그는 남들이 하는 평범한 연애나 순탄한 결혼을 쉽게 꿈꾸지 못한다. 그래서 공원 점심 데이트나 나들이, 그녀의 프로포즈는 그에게 가슴 벅찬 행복을 선사해주면서 동시에 불안감도 키운다. 미혼부인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그녀를 슬픔과 불행에 빠지게 만든다면, 그럼에도 사랑하니까 함께 하자고 해야 하나? 자신의 곁에서 힘들어하는 그녀를 보느니, 차라리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며 먼저 이별을 용기내야 하나?




정인: (예상 밖의 소원에 멈칫한다.)

-> 정인은 현실지향적이고 지호는 미래지향적이다. 정인은 현재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나 감정에 충실한 반면, 지호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과 주변 사람들의 감정을 먼저 생각한다. 인생의 풍파를 세게 겪은 사람은 예방 주사를 맞은 것과 같다. 어떤 일을 겪더라도 더이상 크게 놀라거나 쉽게 흥분하지 않는다. 정인은 9회에서 기석을 만나고 온 지호가 침착하게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에 '어른이네.'라고 느꼈다.

서른 다섯, 마냥 패기만으로 인생을 꿈꿀 나이는 아니다. 게다가 그는 자기가 책임져야 할 어린 아들도 있다. 자신의 행복만을 우선 순위로 놓고 행동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를 사랑해서 프로포즈까지 먼저 한 그녀에게 죽을 때까지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라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하다. 그런 말은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연인이 마지막으로 주고 받는 말 아닌가?

내기를 하면 상대방이 들어주기 싫거나 하기 힘든 걸 소원으로 말하는데, 그녀는 현재 그와 헤어질 가능성을 조금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그녀도 물론 4년이나 만난 기석과 헤어지고 허탈감을 느꼈지만, 지호는 기석과 다르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를 욕심내며 함께 할 미래를 꿈꾼다. 그녀는 결코 그를 과거의 추억이 되버린 남자로 만들고 싶지 않을거다.



정인과 자주 찾은 카페 앞에서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지호의 얼굴에 미소가 스친다.

그럼 친구해도 되겠네.

난 미저린데, 머저리네.

내가 지호씨, 사랑한다!



그녀를 보고싶어서 한참을 서있었던 술집 앞 건널목 나무 옆,

건너오지 말아요. 그럼 안 될 거 같애...

그때는 자신을 밀어냈던 그녀가 지금은 그의 곁에 있다. 그녀가 그에게 그은 선은 그와는 친구일 뿐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반대로 친구로는 지낼 수 없다는 고백이었다. 만약 그가 그녀를 보러 도서관에 찾아가지 않았다면 그들은 지금처럼 우리가 될 수 있었을까? 딱 한 번만 진짜 딱 한 번만,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 가는 대로 했다가 벌은 그녀 혼자 받게 하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진다. 그녀를 기다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신세가 서글퍼 왈칵 눈물이 솟는다.


정인은 자신과 지호에게 사람을 붙여 몰카를 찍은 영국과, 부모님께 사진을 보낸 기석을 만나러(지금은 그인 줄 모르지만) 가는 길이다. 그녀의 굳은 표정에서 근심이 묻어난다.
'오늘은 꼭 담판을 지어야 할텐데...'

그 때, 지호한테서 톡이 온다.

건너편에 정인씨가 없어서 참 좋다...

힘내라고,
함께 하지 못해도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매순간 당신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나를 기억하라고,
항상 같은 자리에서 당신을 기다리겠다고...

그의 진심이 빛이 되어 그녀의 얼굴에 진 그늘을 거둬준다.
미소를 띤 그녀의 마음에 우리를 지키기 위한 용기가 샘솟는다.



p.s.

이 글 등록 버튼 누르기까지 며칠이 걸렸는데 그러고 나서도 몇 번을 읽고 또 고치고 나서야 방금 대본집을 찾아 읽었어.
지호가 카페랑 술집 건너편을 바라보는 장면의 지문이 궁금했거든.
근데 싱겁게도 '가만 바라본다'가 다네.

지호 본체는 왜 글케 울컥한 표정을 지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찢어놓니?
지호 본체가 지호란 캐릭터를 분석하면서 감정을 반으로 줄여 표현했다고 그랬는데, 지호가 참 별 거 아닌 일에도 울컥하는 성격인 걸 아니까 그 장면도 그렇게 표현했겠지?
정인과 우리가 되기까지 그 과정이 쉽지 않았기에 지금의 행복이 더 크고 감사하지만, 우리를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한 마음 고생보다 더 큰 시련을 이겨내야 하니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거겠지.
지호 본체의 연기력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된 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