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집, 정인과 기석이 현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영국이 문 앞에서 그들을 맞는다.

영국: (정인을 보며) 어, 어서 앉아요. (기석에게) 차 좀 준비하라고 해.

정인: 아니요, 잠깐이면 됩니다.
영국과 기석 부자, 멈칫한다.

영국: (거실로 가서 소파에 앉으며) 아니, 무슨 얘기이길래 기석이한테도 비밀이에요? 전혀 모르는 눈치던데?

-> 영국이 현관 앞에 서서 둘을 기다린 걸 보면 정인이 아들과 함께 찾아온다길래 은근히 좋은 소식을 기대한 것 같다. 근데 어쩌지? 또 뒷통수 맞게 생겼네.

기석: (손가락으로 소파를 가리키며 뒤따라오는 정인에게) 앉어.
-> 쳐다보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지시하듯 말하는 기석, 이젠 그가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지호였다면 그녀에게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정인은 소파에 앉아 말없이 가방에서 반 접힌 노란 봉투를 꺼내고, 영국과 기석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본다. 영국은 정인이 건네준 봉투를 열어 사진을 꺼내본다.

'이건...'

-> 영국은 시치미를 떼려는 걸까? 왜 이걸 나한테 주냐는 표정으로 정인을 본다.


정인: (차분한 말투로) 뭔지 아시죠?

-> 영국을 보는 정인의 눈빛이 다 알고 왔으니 모르는 척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하다.

영국: (굳은 표정으로 기석과 정인을 번갈아 보고는) 궁금한 것들이 좀 있어서...
-> 부자들은 이런 방식을 선호하냐던 영주의 말이 맞나보다. 근데 아무리 부자여도 상대방 몰래 미행 붙이고 불법 촬영하는 게 용납될 수는 없다.


정인: 저희 부모님께 보내시기도 했고요.

영국: (놀라서 입을 반쯤 벌린 채 기석을 힐끔 보고 시선을 떨군다.)

기석: (난감해져서 영국의 눈치를 본다.)

정인: 아니신가요?




영국: (겨우 입을 다문다. 구린 짓을 했다가 당사자에게 제대로 걸렸으니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그래요, 내가 보냈어요. 미안하게 됐어요. (사진을 봉투 사이에 넣고 협탁에 탁 놓는다.)

정인: 아니요, 오히려 감사합니다.

기석: (정인을 째려본다.)


정인: 부모님께 말씀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었는데 속이 시원해졌어요.

기석: (영국에게 그동안 둘러댄 거짓말이 들통나버려서 곤욕스럽다.)

영국: 사진이 사실이란 거네.

정인: (단호하게) 전부 사실입니다.

-> 영국은 그동안 그 누구의 말도 믿지 않았다. 그는 비서를 시켜 자기 아들과 정인을 미행하게 하고 불법 촬영을 한 사진을 가지고 상대를 떠보거나 압박했다. 그가 의심이 많은 건 그에게 잘 보이려 거짓말을 하는 인간들에 둘러쌓여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편, 반대로 생각하면 그가 상대방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굳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게 된 걸 수도 있다.
정인은 처음부터 영국에게 솔직했다. 그녀가 기석과는 실패한 관계라고, 그에게 맘이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영국은 그녀에게 사람 마음은 변하는 거니까 확신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나 듣고 싶은 말이 아니면 수긍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인과의 세 번째 만남에서 영국은 더이상 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기석: 야! 너 지금 이 얘기할려고 여기 온 거야?

정인: 아니, (영국을 똑바로 보며) 사진 원본 주세요.

기석: 야, 이정인!

정인: (영국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부당하게 찍기도 했고, 갖고 계신 것도 불편합니다. 전부 주세요.

영국: (정인의 말에 놀라 숨도 못 쉬고 듣다가 기석을 힐끔 보고는 겨우 심호흡을 한다.)

-> 진짜 통쾌한 장면이야. 가진 자들의 거짓과 불법이 판치는 세상에 제대로 맞설 줄 아는 이정인의 용기와 단호함에 반했어.




정인은 다시 가방을 열고 지갑 안에서 명함을 하나 꺼낸다. 그 모습을 보는 영국은 다시 긴장한다.

'누구 명함이지? 혹시 변호사? 나를 고소하려고 하나?'

정인: (명함을 탁자 위에 놓으며) 제 명함입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제 직장 주소로 보내주세요.

-> 며칠 전 태학이 정인과 지호, 은우까지 찍힌 사진을 구겨버리려고 했을 때 정인은 하지말라고 외치며 그의 손에서 사진들을 빼앗아 하나하나 소중히 챙겼다. 마찬가지로 그녀는 어떤 의도로 찍힌 것이든 자신에게 소중한 사진들이기에 영국의 더러운 손에서 빼앗아 되찾고자 한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영국은 기석을 째려보고, 낭패감에 빠진 기석은 정인을 째려본다.



잠시 뒤, 정인과 기석은 대문을 나선다.

정인: (한 손을 치마 주머니에 넣고 뒤돌아 기석을 보며) 오빠도 아버님한테 감사해. 내가 언제 들통나나 그렇게 바랬는데, 소원대로 한방에 시원하게 털렸어.

기석: 사진 내가 보냈어.

-> 그게 자랑이냐? ㅉㅉ
정인: (놀란 눈으로 그를 빤히 본다. 왜?)



기석: 나만 죽을 수 없잖아. 승부는 봐야 될 거 아니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정인: (한숨을 쉬며) 이런다고, 내가 오빠한테 다시 돌아갈 것 같애?

기석: 넌 유지호로 안 돼. 그동안 나 왜 만났어, 응? 너무 사랑해서? 내가 가진 배경이 없어도 나 만났을까?

정인: (어이가 없다.)

기석: 크게 상관 안 했어. 너만 그런 것도 아니고, 사람이 원래 없는 것보다 있는 걸 더 좋아하니까. 그게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거고.


정인은 기가 막힌다. 자존심 쎈 그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못난 행동과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화를 참고 생각하니 자신이 그를 배신하고 상처줘서 망가뜨린 것 같다.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눈물이 왈칵 난다.
정인: (고개를 숙이고) 잘못했어.

기석: (??)



정인: (기석을 보며) 내가 다 잘못했어. 배신한 거, 상처 준 거, 다 미안해. 용서해 달라는 거 아니야. 평생 저주를 퍼붓고 괴롭힌데도 받을게. 얼마든지.

기석: (정인의 반응이 예상과 다르자 기가 막히고 화가 난다.) 유지호가 뭔데, 그 새끼가 뭔데 이딴 식으로 나와~! (허리에 손을 올리고) 난 다 필요 없고, 답은 하나야. 다시 제자리로 와!


정인: (기석을 똑바로 보며) 이제 오빠로는 부족해. 내 욕심이 더 커졌거든.
-> 딴 건 다 참아도 유지호를 무시하는 건 못 참는 정인이다. 자신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남자는 기석이 아니라 지호라는 걸 분명하게 못 박는다.



기석: 이정인...

정인: (반지 케이스를 건네며) 짐작했었겠지만, 의미를 두지 않아서 갖고 간 거였어. 늦게 돌려줘서 미안해.


기석: (반지 케이스를 열어 반지를 꺼내고 케이스는 바닥에 버린다. 잠시 손바닥에 반지를 올려두고 고민하던 그는 뒤돌아서 멀리 던져 버린다.)

정인: (기석의 유치한 행동에 할 말을 잃는다.)

기석: (정인을 보며) 받은 사람이 의미가 없다는데 뭐 쓰레기나 다를 바가 없지.


기석: 다시 말하지만 유지호는 너 절대 못 채워.

-> 바닥에 떨어진 반지와 함께 그의 자존심도 바닥을 뒹군다. 근데도 끝까지 지호한테 지기 싫어하는 걸 보니 그는 아직도 자신이 못난 놈인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가보다.

정인: 갈게.

정인은 기석을 남겨둔 채 언덕 아래로 내려간다. 기석은 멀어져가는 정인을 바라보며 대문 앞에서 방향을 잃고 한참을 서성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