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사무실, 정인은 자기 앞으로 온 우편물을 들고 자리에 앉는다. 봉투를 뜯어보니 sd카드가 하나 들어있다.

하린: (정인을 보며 감탄한다.) 결국, 역시~



영주: (정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냐?

정인: (영주를 보며 피식) 치~

영주: (박수를 치며) 오케이, 간만에 영주포차, 어?

하린: (손가락을 튕기며) 전 무조건이죠~



정인: 난 무조건 안 된다.

영주: (??)

정인: 3층에서 놀기로 했거든.

영주: (짜증나서 자리로 돌아가며) 와~ (뒤돌아 정인의 어깨를 친다.) 나 진짜 이사갈거야.

정인: (영주를 보며 웃는다.) 흐흐흥~



그 때 울리는 폰 진동, 기석의 톡이다.

잠깐 내려와

한숨 쉬는 정인, 표정이 굳는다.



도서관 야외 휴게실, 기석과 정인이 벤치에 나란히 떨어져 앉았다.

기석: 외근나갔다가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정인: 자리 오래 못 비우는 거 알지?

기석: 아버님 퇴임 후에 자리 어떻게 했음 좋겠어?

정인: (지금 그 얘길 왜...?)


기석: 자존심이 바닥을 치는데 뭐든 못해? 이 정도는 일도 아니지.

정인: 내가 오빠를 잘 모르고 만났던 거야, 아님 이렇게 만든거야?

기석: 자책은 나중에 하고. 어떤 선택을 해야 너랑 나뿐만 아니라 니네 집 우리집까지 다 평온해질지, 그거 먼저 고민해봐.


정인: 고민은 무슨. 내가 오빠 배신하고 다른 사람 만났다는 거 아셨는데, 아버님이 날 반기시겠어? 우리 아빤 무슨 낯으로 재단 일을 하시고.

기석: 핑계대지 말고. 아버님은 우리 재단 들어올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정인: (기막혀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랑 다시 잘해보고 싶은 거 맞어?

기석: (??)



정인: 난 아빠가 선생님으로 계신 학교도 못 다닌 사람이야. 대답이 됐지?

기석: (아차 싶다.)



정인: 들어가봐야해서 배웅은 못해. (벌떡 일어나며) 조심해서 가.

기석: (정인이 들어가는 모습을 빤히 본다.)

-> 정인과 기석은 연인으로 4년을 만나면서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상대에게 크게 놀라거나 새로울 것이 없는 일상이 되었다. 부모 형제보다 더 자주 보는 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족처럼 서로를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부모 자식이나 형제 관계는 내가 맘에 안 든다고 버릴 수도 바꿀 수도 없다. 서로가 못마땅해서 부딪히고 상처받아도 평생 함께 가야한다. (정인은 재인에게 툭 하면 '죽을래!', '못살아.'하며 욱 하고 심지어 발로 차기도 한다. 그래도 자신의 침대를 기꺼이 동생에게 양보하는 자상한 언니기도 하지. ㅋㅋ)

반면, 남에서 시작한 친구나 연인 관계는 다르다. 아무리 가깝고 편한 사이가 되어도 내 맘대로 막 대할 수 없다. 상대가 자신에게 기대하는 걸 파악해서 잘 보이려 애쓰고, 상대가 싫어하는 말이나 행동은 조심하게 된다. 화를 내고 싸울 때도 있지만 관계를 끝낼 게 아니라면 서로가 적정선을 찾아 타협한다. 특히나 연인 사이에서는 사랑을 내세워 상대에게 어떤 존재이기를 기대하고 바라기에 그 지점이 서로가 상대를 아는 모습이 된다.

기석은 정인과의 이별을 거부하며 그녀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으려 한다. 영양제를 사다 주고 비싼 반지로 프로포즈를 하고, 그녀 주변 사람들을 만나 맘 변한 그녀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한다. 태학에게 불법 촬영한 사진을 보내서 그녀를 압박했지만 그 결과 그는 아버지와 그녀에게 실망만 안겨줬다.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를 졸라 태학에게 재단 일을 제안하게 한다. 그녀를 붙잡으려 애쓰고 노력할수록 그는 자신이 알던 그녀와 실제 그녀 사이에 깊은 간극을 느끼며 망연자실한다.

사랑이 아닌데 사랑인 척해서 미안했다는 그녀의 말에, 그는 그녀가 그동안 자신의 배경 때문에 떠나지 못했던 거라 착각하는 것 같다. 그 또한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순 없다니, 하아... 그녀가 바라는 건 집안의 평온이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진실된 마음임을 그는 언제쯤 알 수 있을까? 사학재단 이사장 아들을 버리고 세탁소 집 아들을 택한 그녀의 더 큰 욕심이 뭔지 제대로 파악하려 하지 않고, 아버지의 지위나 재산을 내세워 호가호위하는 그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한 때 음악을 사랑햤던 그가 어쩌다 이렇게 못난 사람이 되버렸을까?



정인과 하린, 영주가 먹을 것을 잔뜩 사들고 언덕을 올라온다. 본가에 갔다온다는 지호의 톡에 영주포차에 합류한 정인, 불 꺼진 3층 베란다를 올려다본다.

영주: (정인을 보며) 어휴, 그렇게 보고싶어? 전화해서 빨리 오라그래.

정인: 부모님 댁 갔다니까?

하린: 에이, 보내주시겠지. 아들이 데이트하러 간다는데.


정인: 자꾸 말하니까 더 보고싶다 야. (하린에게 비닐봉투를 쥐어주며) 먼저 들어가~

하린: 어어~~

정인: (웃으며 지호 집으로 뛰어 올라간다.)

하린: (어이가 없다.) 뭐야, 빈집이라도 보러 가는거야?

영주: (기가 막힌다.) 와~ 어떻게 하면 저렇게 미치냐...


바로 몇 주 전만 해도 정인은 지호의 집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를까 말까 망설였다. 조심스레 들어간 그의 집 침실에서 발견한 지호와 은우 부자의 사진은 그녀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그의 집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사랑을 나누며 그가 더 욕심난 그녀는 이제 은우까지 셋이 함께 하는 미래를 꿈꾼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서 주변의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면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거라 믿는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다. 아무리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해도 과연 백일도 채 되지 않은 시간동안 상대를 제대로 알 수 있었을까? 기석 집안에서 무시받으며 생긴 그녀의 컴플렉스와 은우 엄마한테 버림받고 미혼부로 살며 갖게 된 그의 트라우마는 이제 제짝을 만났으니 한 번에 리셋되는 건가?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놓인 외적 갈등은 둘 사이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주지만,  한편 서로를 더 알아갈 수 있는 시간과 여유는 뺏어간다. 그의 과거를 굳이 캐묻지 않는 그녀는 자신이 상처주지 않으면 그가 더이상 아플 일은 없을거라 생각한다. 작은 배려에도 감동받고 울컥하는 그의 여린 마음이 지난 연애의 실패 때문이란 걸 그녀는 알까? 쉽게 기죽으면 안 만날 거라고 협박(?)하며 그가 달라지길 바라지만, 그녀가 그에게 상처를 안 주려고 혼자 싸우는 동안 그의 불안감은 커지고 자신감은 줄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