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간만에 영주포차로 뭉친 셋은 부엌에서 술자리를 정리 중이다.
영주: (빈 맥주캔들을 모으며) 나머지는 내가 할게. 너 택시부터 불러.

하린: 내려가서 불러도 되요.

영주: 정인아, 넌 어떻게 할거야, 3층으로 가?

정인: 잠깐만. (휴대폰을 확인한다.) 이상하게 톡을 안 보네.

영주: 야야, 이정인 차인 거 아니냐?
정인: (영주를 째려보며) 치~




그 때 빌라 복도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올라가는 것 같다.
하린: 뭐예요?

정인: 지호씨 아냐?

영주: 지호씨라고?

정인: (서둘러 문을 열고 올려다본다.) 야, 나 잠깐만~

영주: 맞어?

정인: (신발만 급하게 신고 나간다.)

영주: 정인아!



지호네 집, 정인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온다. 영재가 침실에서 나오다가 정인과 마주친다.

정인: (신발 벗고 들어서며) 지호씨한테 무슨 일 있어요?

영재: (설명하기 난감하다.) 아, 좀 취해가지고.

정인, 걱정스런 맘에 침실을 들여다본다. 지호가 침대에 걸터 앉아 퉁퉁 붓고 벌게진 얼굴로 정인을 올려다본다.


정인: 지호씨,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요? (지호 옆에 앉는다.) 무슨 일 있었어?
지호: 정인씨, 정인씨도... (정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우릴 버릴 거예요?
-> 연인 사이에 한쪽의 일방적인 변심으로 헤어지면 '차였다'란 표현을 쓰지 않나? '떠날 거예요'도 아니고 '버릴 거예요'라니, 늘 어른스럽던 지호가 왜 그런 표현을 쓴걸까? 그는 지금 자신이 아닌 은우가 되어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모한테 버림받은 은우 입장에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울다가, 눈앞에  새엄마(가 될지 모르는) 정인이 나타나자 투정 섞인 불안을 내비친다.
정인: (??)



지호: 그럴거면, 지금이라도 괜찮아요.
-> 지난 번 은우랑 셋이 나들이를 갔을 때 정인이 물었다. "은우가 오늘 일을 기억할까요?" 라고. 지호는 "분명히 기억할 거예요."라고 단언했다. 근데 뭐가 괜찮냐구...


지호: (울컥서 고개 떨구며) 괜찮아...
-> 아니, 이게 무슨 g.o.d.의 '잘 가(가지마) 행복해(떠나지 마)'도 아니고, 그는 왜 세상이 무너져버린 것 같은 표정으로 괜찮다고 거짓말을 하는걸까? 응? 지호야...

그가 지난 6년 동안 가장 많이 듣고 되뇌인 말이 '괜찮아, 괜찮아'인가보다. 하루 아침에 미혼부가 되어도 어떻게든 살아야 했기에 동아줄 붙잡듯 부여잡은 말이 '괜찮아'인가보다. 전혀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이라도 해야 은우가, 부모님이, 친구들이 걱정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별 일 없다는 듯 위장하고 살았나보다. 가슴 한켠이 썩어 문드러지는 줄도 모르고...
정인: (왜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호: ......

정인: (지호 어깨에 손을 올려 흔들며) 어? 무슨 말이냐구? 뭐 땜에 이래요?



지호: 정인씨 마음, (고개 들어 정인을 보며) 믿어도 되요?
-> 지호에게 '괜찮아'라는 말은 이제 썩은 동아줄이 되어버렸다. 그는 이정인을 자기 인생의 마지막 여자라 믿고 붙잡고 싶다. 그녀라면 나와 은우를 구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정인: (순간 굳는다.)
-> 지호의 물음에 정인은 기석을 버리고 지호를 택한 그녀의 변심을 저격당한 것처럼 뜨끔한다. 사람 마음은 언제 바뀔지 모르니 확신하는 게 이니라던 영국의 말을 듣고 심란했던 그에게, 는 '날 만나서 그런 건 아니잖아요.'라믿음을 보여주었다. 들은 서로의 인연을 운명이라 여기여기까지 왔는데, 왜 갑자기 그그녀의 마음을 의심하는 걸까?



지호: 말해봐요. 절대... 절대, 변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 정인의 마음이 튼튼한 동아줄인지 자꾸 확인하려는 지호.

정인: (지호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내린다.) 지금, 날 못 믿는다는 거예요?
-> 정인에게 자격지심이 없다면 그의 물음에 정색하지 않고 자신있다고, 믿으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지호: 믿어도 되냐고 묻는 거예요.

정인: (심장이 철렁한다.) 내가 변할 거 같애요?
-> 좋은 말도 되풀이하면 나쁜 말이 된다는데, 지호의 절박한 물음도 반복되니 정인의 마음을 의심하는 말로 들린다.


지호: 모르지... 알 수가 없지...

-> 지호야, 누가 뭐래도 이정인은 유지호라며 안아주던 그녀의 마음을 못 믿으면 어쩌란 말이냐... 은우가 왜 아빠 술 마시는 걸 싫어하는지 알겠다. 이걸 정인이 금주 각서 1장으로 넘어가준 걸 보면 진짜 천사다 천사.

정인: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러는지 몰라 답답해서 한숨이 난다.)


정인: (술 취한 사람 붙잡고 따져봐야 헛수고일 거 같다.) 너무 취했어. 내일 다시 얘기해요.

지호: (텅빈 눈으로) 대답을 못하네... (한숨을 내쉬며) 그렇구나...


지호: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침실을 나간다.)

본가에 갔다온다던 지호에게 무슨 일이 생긴건지 정인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다. 그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아 서운하고 화가 난다.



잔뜩 심란해져서 지호의 집을 나서는 정인, 계단을 내려가는데 영재가 뒤따라나온다.
영재: 정인씨.

정인: (뒤돌아 영재를 올려다본다.)

영재: (정인에게 다가와)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거니까 정인씨가, (두 손을 모아 잡고) 이해를 좀 해주세요.

정인: 오늘만이에요, 앞으로도 각오를 해야 되는 거예요? 과하게 마시면 또 뭐하는데요. 다른 주사는 없어요?

영재: (할 말이 없다.)


정인: 그동안, 지호씨가 나한테 불만 있었어요?

영재: 아니요, 전혀.

정인: 그러면 더 이상한 거 아니에요? 갑자기 저런다는게?

영재: 그... 사실은, 유미가...

정인: 누군데요? (그러다 퍼뜩) 혹시, 은우 엄마?

영재: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정인: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영재: 이게 말하기 좀 그렇긴 한데

정인: (영재를 보지 않고) 말하지 말아요. 안 듣고 싶어요.

영재: (어찌할 바를 모른다.)

정인: (살짝 고개만 숙이고) 갈게요. (계단을 내려간다.)
영재: (낭패감이 든다.)



정인은 영주네 가서 가방만 챙겨들고 서둘러 나온다. 영주가 따라나온다.

영주: 정인아. 무슨 일인데 그래?

정인: (계단을 내려가며) 연락할게.

빌라 공동현관을 나서는 정인 뒤로 영주가 따라나온다.

영주: (정인의 팔을 붙잡으며) 정인아, 정인아~

정인: (뒤돌아보며) 나 진짜 괜찮아. 전화할게. (팔을 빼며) 미안해.

영주: (언덕을 내려가는 정인을 보며 한숨을 쉰다. 무슨 안좋은 일이 생긴건지 걱정스럽다.)



늦은 밤 골목길을 홀로 걸어가는 정인, 전화가 울려서 꺼내보니 기석 오빠다. 하... 굳은 표정으로 다시 길을 걷는다.

골목을 벗어나 큰 길가로 나온 그녀는 우리 약국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지난 겨울부터 봄, 그리고 여름. 이곳에서 시작된 지호와의 만남이 세 계절을 지나는 동안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오늘은 모든 게 낯설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