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피해요? 우리가 뭐 했어요? 지호씨랑 내가 뭘 했냐고?"

당근. 하다마다. 뭘 해도 아주 많이 했다.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일들, 하지 않았을 거짓말을 하고, 숨기고 숨고 모르는 척을 했다.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지을 수 없는 행복한 표정을 짓고 당신 앞에 당당히 갈 수 없어서 우울해지고 예민해졌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도망칠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둘 다 기회를 잡지 않았으며 대신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고 자기 자신을 속여가며 조금씩 조금씩 서로를 향해 나아가는 일, 그걸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빠져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표현이었다.

정인이는 번호를 단번에 외웠다. 지호는 톡을 씹었다. 그 덕에 다시 만났지만 정인은 지호의 식사 제안을 거절했다. 거기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정인의 친구가 지호집 아래층에 살고 있다는 우연은 또 운명을 만든다. 그 조차 수습할 수 있었지만 그냥 톡으로 할걸. 실수한 것 같다는 정인의 말처럼 그들은 불필요하게 굳이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들 사이를 굳건히 가로막고 서 있는 두 가지, 약혼자와 아이를 털어놓고 원점에 다시 선다. 약혼자가 있다고 사과할 일도 아니고, 아이가 있다고 나쁜 놈도 아니니 웃으며 헤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또 거기서 끝내지 못했다. 그 후 우연과 운명의 협조 하에 약혼자의 대학 후배로 대학 선배의 약혼자로 또다시 만난다. 농구장에서 지호를 발견한 순간 정인이는 동생에게 '나 저 사람 알아'라고 말하지 않았고, 지호는 경기가 끝나고 기석과 정인이에게 다가가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서로에게 반하지 않았으면 왜?


"누가 거짓말이 싫다면서... 자꾸 거짓말을 해..."

거짓말이 싫다던 정인은 지호를 만난 이후 주변에 계속 거짓말만 했다. 얽혀 있는 인간관계 속 누구도 위험해지지 않도록 '친구'라는 관계 규정으로 지호를 묶어 놓고 자기 자신을 묶어 놓는다. 하지만 '친구'는 무엇보다 자신을 속이기 위한 용도다. 정인이 지호를 맘에 들이지 않았다면, 지호에게 제안한 친구가 진심이라면 누구에게도 거짓말할 이유가 없다. 농구 경기장에서 지호를 처음 본 척할 필요도 없었고 지호의 직업을 들어서 아는 게 아닌데 얼핏 들었다고 하지도 않았을 거다. 지호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려 굳이 동생을 피할 이유도 없다. 지호의 아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처럼 듣고 있지 않았을 거고 '누가 있냐'는 기석의 질문에 그렇게나 흔들리는 눈빛으로 부정할 필요도 아픔을 삼키려 주먹을 꽉, 그렇게 쥘 일도 아니었다. 사실, 거짓말이라면 지호도 마찬가지다. 마음 잘 접었으니 부담 갖지 말라고. 그래. 친구 하자고. 미치기 전에 정리한다고. 약국 약사들에게 나 별일 없다고. 두 사람의 거짓말은 역설적으로 두 사람의 내면에 휘몰아치는 진심을 담고 있다.



'엄마?'

친구라고. 우리 친구라고. 열심히 상대방과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이 가엾은 어른들에게 팩폭을 날리듯이 아이는 놀라운 직관으로 그들의 관계에 대해 진짜 본질을 말한다. 속내를 들킨 당황스러움은 거짓말하는 어른들의 몫이다. 그들의 친구 놀이는 오래가지 못한다. 정인에게 줄 약을 사러 온 기석을 상대한 후 지호는 이미 스스로를 속이는 일에 지칠 대로 지쳤다. 술기운을 빌어 근처에 와 있는 정인을 보러 간다. 약혼자가 있는 정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솔직할 수 있었던 지호는 술김에 고백한다. '보고 싶어 왔다'. 다가가려는 지호를 가까스로 막는 정인. 바로 저기 도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보이는 그녀에게 지호는 다가갈 수가 없다. 정인은 아무 일 없는 척 괜찮은 척 직장 동료들과의 술자리로 돌아가 거짓 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지호를 밀어낸 정인이지만 아무리 꾹꾹 삼켜도 자꾸만 새어 나오는 눈물은 눈가를 촉촉하게 적신다. 그렇게 그들의 짧은 친구 놀이는 아픔으로 끝났다.

"지금 나한테 오면 이정인, 다신 못 돌아가."

왜 피하냐고 따지고 들었지만, 기석에게 지호에 대해 말할 수도 차마 지호에게 갈 수도 없었던 정인은 심하게 흔들리는 마음 때문에 결혼까지 고려해 본다. 하지만 괴로운 마음은 감출 수가 없어서 '좋아하는 사람 있구나' 언니의 말에 참아왔던 눈물을 쏟는다. 지호를 만나러 갈 수도, 그렇다고 가만있지도 못하는 마음은 정인을 약국 근처로, 집 대신 친구 집으로 향하게 하고 지호 역시 불 켜진 아래층 집을 쉽사리 지나치지 못한다. 지호는 밥맛이 없어 밥도 거르고 애꿎은 약국 창밖만 바라본다. 지호도 정인이도 서로에게 다가서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상황. 재인이가 함부로 갖다 쓴 약은 친구 흉내를 멈춘 두 사람이 약사와 손님으로 다시 만날 수 있는 좋은 핑계가 된다. 약 사러 간다. 약국 열었다. 또다시 거짓말이다. 만나서 좋은 건 잠시, 지호는 정인이에게 걸려 온 기석의 전화가 맘이 아프고 정인이는 기석이에게 데려다주겠다는 지호의 배려에 맘이 상한다. 속은 상하는데 속상해야 할 처지가 아니니 화만 난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냐. 감정이 여기까지 와버린 책임의 공을 서로가 서로에게 떠넘기다 팽팽해진 긴장감은 눈치 없는 공사장 소음 때문에 실없는 웃음으로 마무리된다. 그렇게 웃고 나서야 마침내 그들은 서로에게 흔들렸고 서로를 흔들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정인씨한테, 정인씨한테 안 들킨다구요."



지호는 비로소 정인이에게 친구도 아니고 지인도 아닌 자신을 제대로 규정한다. 나쁜 사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정인이조차 모르게, 또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정인이를 계속 보고 싶어 하는 사람. 지호는 마음을 정했고, 지호에게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는 이제 정인이에게 달렸다. 예고를 보니 정인이도 이미 마음을 정한 듯하다.



이야기는 그야말로 디테일의 향연이다. 허투루 쓰이는 대사가 없고 의미 없는 장면이 없다. 정인과 지호의 첫만남. 일상을 뒤흔드는 '운명적인 원샷 원킬'의 순간 이후 휘몰아치듯이 밀려오는 감정 때문에 어쩔 줄을 몰라하는 정인과 지호의 흔들리는 마음이 세밀화를 그리듯 그려진다.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작은 행동이, 몸짓이, 손짓이, 눈빛이 스쳐 지나가는 표정이 그들의 설레고 불안한 심리를 그대로 전하기에 모두가 저마다의 의미가 있는 대사처럼 굴어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남녀에 대한 심리묘사는 현미경을 들이 댄 듯 자세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카메라는 그 모습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비추고 있다. 마치 연극 무대를 보여 주듯이 저만치 떨어져서 얼굴 표정 하나에만 담긴 심리상태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주인공의 몸짓, 손짓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주변의 공기와 주변 인물들의 리액션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전하고 있다. 섬세한 대본과 관조적인 연출이 만난 이 환상의 궁합은 현실감을 더하고 그러기에 공감은 극대화된다. 영리하고 세련됐다.